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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스터 Apr 15. 2018

두 얼굴의 도시

취리히에서 보낸 2박3일

2013.12.27.~13.12.29.

스위스 취리히    


사람들의 몽롱한 눈빛. 문 틈 사이로 풍기는 끈적한 공기. 그리고 머리 위로 보이는 붉은색 네온사인. 그러니까 그곳은 성매매 업소와 술집이 뒤엉켜 자리 잡은 골목이었다. 친구와 나는 숙소를 찾아 헤매다 그곳으로까지 흘러가게 된 것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취리히에 갓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우리가 가방 하나씩을 짊어지고 기차에서 내렸을 이미 관광안내소가 문닫은 뒤였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 친구와 내가 여행을 시작한 지도 수 일 째. 그제껏 인터넷 연결 안 된 스마트폰 지도로도 그럭저럭 길을 잘 찾아다녔으니까. 우리는 신속하게 역을 빠져나와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고, 뭐든지 일찍 문 닫는 유럽의 도시답게 취리히의 거리는 고요했다.    


하지만 주변을 잘 살피지 않고 지도 위 목적지를 향해서만 냅다 걸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예상치 못한 곳까지 접어들게 됐다. 사실 처음에는 한적한 거리만 걷다가 꽤나 소란스런 곳으로 들어서게 되니 살짝 들뜨기도 했었는데, 가까이서 본 사람들의 얼굴은 유쾌하기보다 몽롱했고 꽤 오랜 시간을 유럽에서 지낸 우리로선 그와 같은 상황이 우리 같이 덩치 작은 동양인 여성들에게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상황을 파악한 후 아무 말 없이 재빠르게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거리를 한참 동안 걸은 후에야 겨우 숙소에 도착다.


쓸쓸하거나 끈적하거나. 그것이 바로 우리가 느낀 취리히의 첫 인상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우리가 전날 마주한 취리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거리는 깨끗하고 사람들로 활기찼으며, 특히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는 화려한 상점들과 레스토랑이 즐비해 전날의 음습한 골목과는 영 딴판이었다.


취리히 호수. 당시 폰이 고장나서 아이팟으로 찍었더니 그 아름다움이 충분히 담기지 못했다.


특히 취리히 호수는 내가 꿈에서만 그려오던 이국의 이상적 풍경 그 자체였다.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최대한 즐기고자 자전거에 올라 탔는데, 얼마나 심취했던지 중간에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에 계획보다 일찍 방향을 틀고 돌아왔음에도 장장 4시간의 여정을 달린 후였다. 그만큼 힘든 줄도 모르고 우리는 내달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어느날 아침의 호수 산책. 취리히를 떠나는 날 일찍 일어난 나는 홀로 호숫가 근처를 살짝 걸었는데,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수 위 아직 잠자고 있는 백조들을 훔쳐보거나 오리들이 자기들끼리 장난 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영국 내 모든 백조들의 소유주라는 영국 여왕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내 정원, 내 호수 속, 내 새끼들이 아니고서야 볼 수 없는 그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본 느낌이랄까.


아직 자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먼저 잠이 깬 백조
이른 아침부터 물놀이 하던 오리들


아직 문 열지 않은 호숫가 작은 상점들의 내부를 몰래 들여다보는 일도 재밌었는데, 가죽을 다듬든 생활 소품을 팔든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공간에서라면 그 어떤 생업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나도 무슨 일이든 해서 돈을 좀 모은 뒤 (그래야 물가 비싼 취리히에서 살 수 있기 때문에) 취리히로 이민을 온 다음에 작은 상점을 열어 볼까 하는 철 없고 용감한 마음을 먹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침 산책의 절정을 찍은 것은 우연히 들어가게 된 어느 작은 성당에서 들은 파이프 오르간 연주였다. 아마도 오르간 연주자가 아침 일찍부터 나와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덕분에 나는 그것이 오롯이 나만을 위한 연주라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니까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 게 아니라, 일찍 일어난 여행자가 온갖 호사를 누리는 셈이다.


그 날 그 공간의 그 음악소리와 내가 그 모든 것을 운 좋게 누리고 있다는 감사함은 내게 아름답고 맑고 착한 마음을 먹게 하는 힘이 있었다.

    

만약 내가 첫날밤의 기억만 안고 취리히를 떠나게 됐다면, 지금의 나는 취리히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춥고, 외롭고, 추한 곳 정도가 아닐까. 반대로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모습만 봤다면, 관광지가 아닌, 하나의 생활공간으로서의 취리히를 알지 못했을 테다.     



취리히는 언젠가 또 가볼 거다. 그 때 두 얼굴의 도시는 또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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