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vs 캄보디아 국경분쟁 (2/2)
본격적인 냉전체제가 다가오고 있던 1940년,
태국은 이 사원에 경비병들을 배치합니다.
유럽에 전쟁이 발발하여 프랑스 정부가 독일에 항복하였고, 인도차이나반도에도 일본군들이 쳐들어오는 등의 혼란한 시기를 이용한 것이었죠.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캄보디아의 든든한 뒷배였던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철군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이 지역에서 태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식민지 상황에서 막 벗어난 혼란스러운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1953년 독립을 한 캄보디아는 태국에게 '프레아-비히어 사원'에서 병력들을 빼줄 것을 요청합니다만..., 태국 정부는 말을 듣지 않았죠.
아무튼, 험악하게 돌아가던 상황이었지만 사실 캄보디아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지도에서 보듯이 캄보디아와 태국이 체급 차이가 워낙 났기 때문이죠.
캄보디아 입장에서는 산 위에 있는 사원에 나부끼는 태국 깃발을 보면서, 태국군인들이 사원 곳곳의 보물들을가져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답니다.
1958년, 태국과 외교적인 협의가 실패하였습니다.
이제 캄보디아는 이 문제를 국제법정으로 들고 가 해결해 보기로 합니다.
1959년 10월 6일에 첫 고소장이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CJ)'에 접수됩니다. ICJ는 UN 헌장에 명시되어 있는 국제사법기구에 하나랍니다.
캄보디아의 요청은 간단했습니다.
산 꼭대기에 있는 지금 태국군이 있는 저 사원은 누구의 것인지? 를 판단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요청을 접수한 ICJ는 태국 정부에게도 재판에 참여할 것을 통지합니다. 그런데..., 태국 정부가 펄쩍 뛰게 됩니다.
아니, ICJ 너희들이
왜 남의 집안싸움에 간섭을 하는 거야?
사실 태국과 캄보디아는 ICJ에 재판에 제기되면 재판소로 자동으로 가도록 동의를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보며 태국은 이야기합니다.
"그건 예전에 UN이 없을 때 이야기고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잖아!"
사실 국제사법재판소(ICJ) 이전에도 국제법원이 있었답니다. 바로 상설국제사법재판소(PCIJ) 였어요. 태국은 1929년부터 10년마다 '재판이 있으면 자동으로 참석할 것'이라는 내용을 선언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 PCIJ가 1946년 4월 19일에 해산됩니다.
태국 입장에선
내가 재판소에 자동으로 가겠다고
한 건 예전 PCIJ 때야, 지금은 다르지."
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사실 완전한 억지도 아닌 것이 이 사건 전에 1959년에 '이스라엘-불가리가'의 분쟁(Aerial Incident 사건)이 있었고, 불가리아가 비슷한 논리로 재판을 받지 않게 됩니다. 태국도 이 이야기를 가져왔죠.
그런데..
여기서 태국이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답니다.
재판소의 결정은 당사자 사이와 특정사건에 관하여만 구속력을 가진다
(ICJ 규정 제59조)
ICJ는 이런 사태를 예상하였는지 몰라도, 설립당시 규정에서
예전에 재판소가 이렇다고 판결했잖아?
그런데, 다른 다음에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라고 정해놓고 있답니다.
판단은 전적으로 그 사건에 참여한
판사님들 몫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더해서, 재판소는 이야기합니다.
'불가리아와 태국은 케이스가 달라,
태국 너희는 이미 그렇게 한다고 했잖니!"
무슨 이야기냐구요?
1950년 5월 3일, 태국은 또 10년 동안 분쟁이 생길 경우 다시 국제 재판에 군소리 없이 갈 것을 선언합니다. 물론 태국정부는 이야기합니다.
그때는 ICJ가 아니라 PCIJ 였잖아요,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다구요!"
ICJ의 판사님들은
억울해하는 태국 정부에게 찬찬히 이야기합니다.
상설국제사법재판소(PCIJ) 규정 제36조에 의거하여 행하여지고 여전히 유효한 선언은, 이 규약 당사국 간에는 그 선언의 잔여기간 동안 그 조건에 따라,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강제관할권 수락>으로 간주된다
(ICJ 규정 제36조 제5항)
"그럴 줄 알고 준비했지,
조문을 보렴,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단다!"
판사님들이 말하는 제36조 제5항의 내용입니다.
과거 PCIJ에서 어느 국가든 따르겠다고 선언한 내용의기간이 남아있다면, 새로운 재판소인 ICJ에서도 여전히 그 내용이 유효하다는 것이었답니다.
이제 태국은 울먹이며 재판정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제 논쟁의 대상은 사원이 누구의 것인가가 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태국은 적극적으로 싸워보자고 합니다.
태국(당시에는 시암왕국)과 캄보디아(당시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1904년 2월 13일, 1907년 3월 23일 두 번에 걸쳐서 국경조약을 맺게 됩니다. 물론 프랑스 식민지정부의 야금야금 정책 때문이었죠.
태국 정부는 ICJ에서
오래전 <국경협약>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국경 구분은 양 교섭국이 임명한 장교들로 구성된 공동위원회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국경조약 제3조)
더해서 '국경조약 제1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언급합니다.
국경은 그레이트 레이크의 왼쪽 강가, 스퉁 롤로우스 강의 하구에서 시작하여, 그 지점에서 동쪽 방향으로 평행선을 따라 흐르다가 프렉 콤퐁 티암 강과 만나면 북쪽으로 향해 그 만남 지점에서의 자오선을 따라 프놈 당렉 산맥까지 이어진다. 그곳에서부터는 한쪽으로는 남센과 메콩의 유역, 다른 쪽으로는 남문 유역 사이의 분수령을 따라 프놈 파당 산맥과 연결되며, 이 산맥의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메콩 강까지 이어진다 (국경조약 제1조)
내용이 장황하지만 간단히 이야기하면,
산과 강들이 만나는 지점들 또는 높은 산맥들들이 갈라지는 부분(분수령)을 기준으로 국경이 나뉘어야 한다고 되어있다는 것이었죠. 태국대표단은 여기서 이 점을 이야기합니다.
첫째, <지도 1번>은 잘못 만들어졌다.
국경조약 제1조에 따른다면 명확하게 지형이 구분되는 부분들이 경계선이 되어야는데 원래 지도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저 선은 우리와 같이 긋지 않았다!
국경조약 제3조에 따른다면 모든 국경의 결정 작업에는 '공동위원회'가 참여해야 했지만, 기록을 보면 공동위원회가 활동을 했는지 모호하다고 지적합니다.
협약을 보면 부속서와 지도 작성에 두 나라의 실무자들이 있어야 하지만, 프랑스 위원회 단독으로 작성이 되었고 발표되었다는 점을 지적했어요 (B.I.(1))
이거 프랑스 장교들이
작성한 지도잖아!
우리 측 의견은 넣지도
않고 자기들한테 유리한 것만 넣은 거 아냐!
이건 국경조약 제3조 위반이야! "
사실 이 부분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습니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1905년 2월에 프랑스 위원회 측의 군인 티시에(Tixier) 대위가 처음으로 당렉 지역 산맥을 통과한 내용이 보입니다.
그리고, 1906년 12월 3일에는 프랑스측의 측량장교 움(Oum)대위의 팀이 태국과 합의 하에 이곳을 조사하기 위해 출발하였다는 내용도 보여요.
그런데,
태국 정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비록 합의는 했지만)
측량과 탐사는 프랑스팀이 했다구!
심지어 저렇게 만들어진 지도가 정식 회의를 통해서 공동위원회에게 채택된 기록도 없잖아.
우린 아무것도 모르고
만들어진 지도에 당한거라구!
모든 의견을 들은 ICJ 재판부는 이제 판결을 합니다.
지도가 있고 조약이 있는데...
회의록은 없고 불만이 발생한 상황.
여기서, 재판부는 과연 태국이
'정말 모르고 있었는지?'를 따져보게 됩니다.
재판부는 국경 협정이 있던
당시의 기록들을 살펴봅니다.
우선,
태국의 말처럼 측량의 과정이 프랑스팀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이후에 이 결과를 인정하는 공동위원회의 회의기록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태국주장 인정).
그런데,
우리가 계약이란 걸 하면, 공증이란 절차를 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게 공개적인 증명을 하는 과정이죠.
그럼,
이 지도는 프랑스측이 태국 몰래 혼자서 만든 것인가?
ICJ 재판부는 1908년 8월에 프랑스에 주재하고 있던 태국 대사가 본국으로 송부한 보고서에 주목합니다. 20일자 보고에서 "프랑스에 위탁한 국경 지도가 도착하여 본국에 송부한다"는 내용이 전문에 있는 것을 확인하였죠.
1908년 6월 6일자 프랑스측 대표단 회의록에는 "시암(태국)왕국 대표단이 지도를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라고 공식적으로 요청이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청에 따라, 프랑스 대표단은 공식 절차를 거쳐 저명한 출판사에 의뢰하여(출판시 오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지도책을 출간했음을 확인합니다.
총 160세트의 지도가 제작되었고, 이 중 50세트가 태국정부에게 전달되었죠. 나머지는 각 국가별 공관으로 전달되었다고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재판부는 1909년 3월,
후속작업을 위해 태국대표단이 파리에 도착하여 논의할 때에도 이 지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점도 확인하였죠. 다시 말하면,
지도가
제대로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잘못된 걸 알았다면,
고칠 기회가 있었는데,
너희는 왜 가만히 있었지?
라는 뜻이랍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음... 지도의 정확성을 이야기 하는데, 사실 이 부분은 판결에서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답니다, 측량도 정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ICJ재판부는
9:3 의견으로 '프레아-비히어 사원'의 소유권은 캄보디아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더해서, 7:5 의견으로 태국은 사원에 소유 물품들 역시 캄보디아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판결했어요.
단, 이 판결이
태국-캄보디아의 국경선을 확정하는 판결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했답니다. 사원의 소유권에 대한 판결만임을 확인한 거죠.
자,
여기서 우리는 국제법에서 중요한 원칙 중 하나를 확인할 수 있답니다. 바로,
알고도 침묵하는 그대의 의사는
동의로 볼 것이니
(Qzri tacet consentire videtur si loqui debuisset ac potuisset)
이 밖에도 재판부는 여러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태국 정부가 1934년 이후 '프레아-비이허 사원'을 자국 땅으로 표시한 공식 지도를 만들고도 예전 지도를 공식적인 국가행사 등에서 여전히 같이 사용한 점,
1937년 '태국-프랑스의 우호통상항해조약' 체결 과정에서 태국왕립지리원이 지도를 다시 제작하였는데, 여기서도 사원이 캄보디아 땅으로 되어있는 있었으나 태국정부가 침묵한 점 등을 확인하였습니다.
이후에 태국은
'그 당시에 우리가 지도를 정확히 볼 줄 몰라 오해했다', ' 실무처리를 한 관료들이 상부에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등의 이야기를 했지만, 재판부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태국-캄보디아의 국경분쟁 사건은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시사점을 줍니다.
우선, '지도'의 영향력이에요.
앞으로도 여러 사례에서 살펴보겠지만, 국제분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해가 하나 있답니다. 바로, '우리 땅이라고 옛날 지도에 표시되어 있잖아!'가 법정에서는 통할 거라는 생긱이에요.
생각해 보면 간단한 논리예요.
누구나 지도를 만든다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 겁니다. 태국 입장에선 사원이 태국 땅으로, 캄보디아 입장에서는 캄보디아 땅으로 표시되겠죠.
그렇다면, 국제분쟁에서 지도가 효력이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바로, '공신력 있게 만들어진 지도를 분쟁 상대방도 인정했을 경우'입니다.
프랑스가 만든 지도를 태국이 묵인했고
심지어 자국 행사에서 사용하기도 했죠.
재판부가 보기에는 이는 명백한 증거로 보았습니다.
다음으로는 '침묵의 효과'입니다.
일반 소송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하려고 했다" 만으로는 일아 주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지한 순간 적극적으로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아무도 우리의 권리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조금 냉정해 보이지만,
음, 그렇답니다.
지금도 저 두 나라 간에 포성이 울리고 있다고 해요.
국제법정에서 이미 판결 난 사안에 대해, 다시 화약냄새를 풍기는 지금의 상황을 보면,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전쟁이란 또 다른 수단의 정치'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캄보디아 같이 힘의 균형이 열세인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국제법이 절실하지 않을까? 이 마저도 없다면' 하는 생각도 든답니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럼 우린 국제법이 필요한 국가일까요, 아닌 국가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