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vs 캄보디아 국경분쟁 (1/2)
우선, 퀴즈입니디.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람을 많이 죽인 동물은 무엇인지 알고 계시나요? 제가 저렇게 사진을 박재를 해놓았으니 답은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바로 '모기'랍니다.
저 조그만 곤충이 무슨 짓을 그리 하겠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모기가 사람들에게 준 영향은 어마어마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매년 모기로 인해
죽어 나가는 사람들을 70만 명 이상으로 보고 있어요.
말라리아, 뎅기열, 뇌염 등의 각종 질병들이 저 조그맣고 성가신 벌레를 통해 옮겨지고, 한해 천안시 인구만 한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사라지고 있는 거죠.
갑지가 왠 모기냐구요?
저에게 이 모기에 대한 인상깊은 기억이 하나 있답니다.오래전 저랑 비슷한 시가에 동남아의 다른 나라로 장기파견 중이었던 단원들의 숙소가 모기 녀석들의 습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독한 모기라곤 산에 사는 흰줄무늬 '아디다스 모기'나 알던 한국인들에게 동남아 모기와 만남은 미지와의 조우 그자체였죠. 그리고, 결과는 파멸적이었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숙소에 있던 대부분이 고열로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갔었다고 해요.
모기가 물어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책 속에서나 보던 그런 내용을 눈 앞에서 겪었으니 공포감이 보통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시련이 끝나지 않았죠.
현지의 의사선생님들은 그랬다고 합니다.
치료를 위해 가야 할 쓸만한 병원을 찾아보니 있기는 한데..... 무려 10시간을 달려가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이 친구들이 비몽사몽 간에 실려간 곳은 숙소에서 670km 가 떨어진 태국의 방콕이었답니다.
이 이야기는 필리핀 태양 아래에서 '모기 따위가 물어봤자' 하며 혈액 보시를 하며 살고 있던 저희에게도 큰 화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뒷산의 모기들은 착한 녀석들이었구나.
이런 웃지 못할 자각과 함께 질문들이 따라왔죠.
"뭔데?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먼 길을 가야된다고?
심지어 수도라면서 병원도 없는겨?”
그 당시를 회상하던 친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이야기를 하던 친구는 말했답니다.
쓸만한 의사 선생님들 씨가 말랐어
그리곤 그 나라에서 일어났던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었으니,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사건 중 하나인...... '킬링필드(Killing Field)' 이야기였답니다.
킬링필드... 음,
지금의 캄보디아라는 망가진 나라를 설명하는 첫 번째 키워드일 겁니다. 여느 동남아 국가들과 다름없이, 캄보디아도 공산주의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죠.
그리고,
1975년부터 1979년까지 4년 동안, '폴 포트'라는 독재자가 지휘하는 공산정권이 들어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산당 정권이 중국의 모택동(마오쩌둥) 사상을 사랑한다는 것이었답니다.
그 당시는 중국 역시 '문화 대혁명'이라는 삽질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시기였어요 (물론 외부에는 성공이라 선전되고 있었습니다만…)
그리고, 이 폴포트라는 양반은 중국이 이미 검증해 준 희대의 삽질을 흉내냅니다. 이제 중국에서 벌어졌던 여러 끔찍한 일들이 이곳 캄보디아에서도 일어납니다,
'킬링필드'가 시작된 것이었죠.
약 5년여 시간 동안, 단순히 공부를 했다는(또는 했을 것 같다는) 이유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합니다. 정확한 사망 수치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계산에 따라서는 최대 인구 1/3 이 죽어나갔다는 연구도 있다고 해요.
손이 보들보들하고 안경만 껴도 죽을 수 있던 세상,
당연히 지식층이던 의사들 역시 이 시기에 남김없이 살해당했죠. 그리고 그 후유증은 수 십 년 후 이곳에 도착한 한국의 이방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이런 캄보디아의 흑역사를 보다가 아름다운 여행지에 가보면 또 의문이 들어요'. 이곳에도 앙코르와트'와 같은 멋진 문화유산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멋들어지고 커다란 건물들을 마주하다 보면, 이 너덜 해진 나라가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될 거예요. 분명 이나라 여기저기에 찬란하던 캄보디아의 옛 모습을 뒷받침하는 여러 흔적들이 남아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흔적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외부인들로부터였답니다. 이중에는 원나라의 '주달관'이라는 사람이 동남아 국가들을 돌아보고 작성한 기행문인 <진랍풍토기>라는 책이 있었죠.
사실 커다란 중국대륙을 점령하고, 아라비아 왕국들을 연신 두들겨 패던 원나라였지만 이상하게 동남아에서의 전투에서는 성적이 좋지 않았답니다.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칸은 우선,
말 잘하고 똑똑한 신하를 스파이로 보내보기로 합니다.
슬쩍 신하를 보내어 말이 잘 통한다면 알아서 그들이 머리를 굽힐 것이고, 그게 안된다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와서 나중에 삥을 뜯으러 가면 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파견된 사람이 바로 사회생활 만렙의 글로벌 상인, 주달관씨 였죠 (이름부터가 ‘달관’ 입니다. 역시!)
1296년,
달관씨는 지금 인도차이나반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중화사상이 머릿속에 가득했던 달관씨의 뒤에는 몽골기병대라는 든든한 빽까지 있었기에 발걸음은 자신만만했답니다.
그리고
그가 마주한건 당시 이 지역에서 쌀 좀 씹고 다니던
'크메르왕국' 이었답니다.
지도에서 보듯, 원나라 입장에서도 크메르왕국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죠. 주달관씨가 이 나라를 방문했을무렵, 크메르왕국은 농업과 어업이 발달한 비옥한 나라였습니다.
왕이 행차할 때면 수많은 수레와 코끼리 부대가 함께했죠, 1년 간의 짧은 방문을 통해 달관씨는 크메르왕국에 대한 원정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본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 크메르 북부의 산악과 정글지대, 험상궂은 코끼리때와 모기와 습기 가득한 더운 날씨는 몽골기마병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옆에 있는 베트남도 원나라 군대에 맞서서 악에 받쳐 저항하고 있는데, 괜히 이곳까지 들쑤셔서 적을 많이 만드는 것은 좋을 리 없다는 생각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영원할 것 같은 제국은 조금씩 몰락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크메르 제국은 주변 국가들과의 전쟁으로 많은 국력을 소모하고 있었답니다.
달관씨가 이곳을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13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인 타이족들의 침공이 시작됩니다.
타이족, 그들의 기원은 중국 남부였습니다.
중국 운남성 등지에서 평화롭게 살던 그들의 땅에 북쪽의 한족들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이들은 이곳 동남아시아까지 내려오게 됩니다.
타이족들의 나라인 '수코타이 왕국'과 '아유타야 왕국', 그리고 이후 청나라의 적극적인 지원을 입은 '시암왕국'은 기존의 '크메르 왕국'에게는 재앙과도 같았습니다.
더해서, 계속해서 이어지던 자연재해로 인해 이곳에 거주하던 크메르인들은 그들의 영토를 내어주게 됩니다. 지금의 캄보디아 땅으로 쫓겨가게 된 것이죠.
이렇게 보면, 우리에겐 주목받지 못하던 이 변경지역들에서 게르만족의 이동 같은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타이족과 크메르족들의 갈등은 이때부터 위험을 안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이런 지역의 상황은 바다 건너 서양의 세력이 들어오면서 더욱 복잡하게 꼬여갑니다.
오늘날의 태국인들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식민지배를 당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아시아 국가'라는 사실이랍니다. 그리고, 이런 태국의 경이적인 생존방식을 보며, "강대국들 사이에 외교는 저렇게 해야 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죠.
하지만,
과연 강대국들 사이에서 손해보지 않는 외교라는 것이 가능할까요? 더욱이 저때의 세상은 마음먹은 것은 뺏고 보는 제국들의 시대였는데 말이죠...
'시암제국(태국)'에서 역시, 유럽의 두 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마주치게 됩니다. 탐욕스러운 두 나라는 이제, 동남아시아의 부유한 자원들을 노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서양 국가들 사이에서 태국은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외교를 해야 했답니다.
1863년,
시암제국 아래에 있던 '크메르왕국(캄보디아 지역)'에서 내전이 일어납니다. 시암제국의 '라마 4세'는 당연히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프랑스가 손을 땔 것을 주장했죠.
프랑스는 심지어 캄보디아를 건드리면 전쟁까지 불사하겠다고 선포를 합니다.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고자 했던 '시암제국'은 프랑스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이제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됩니다.
(음..., 마치 청나라(태국)보고 조선(캄보디아)에서 손을 때라고 하던 일본(프랑스) 생각이 나는 건...)
인도차이나에 발을 들인 프랑스의 행보는 더욱 과감해집니다. 1883년 베트남 전체가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들어오게 되죠. 그리고, 이듬해인 1884년에 프랑스는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영국 역시,
시암제국의 북쪽인 '버마 왕국'을 침공해 식민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열강들에게 거대한 시암제국은 그저 분할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에 불과했죠.
이 와중에 어느 정도 이익을 본 나라가 있었어요.
바로 캄보디아였답니다.
캄보디아를 보호령으로 만든 후,
프랑스는 '시암왕국'에 더 많은 땅을 뜯어낼 요량으로 캄보디아의 영토를 예전과 똑같이 만들어 놓을 것을 요청하죠. 당연히.... 캄보디아의 보호국은 자기들이니 자기들에게 땅을 내어놓으라는 이야기였답니다,
결과적으로 캄보디아는
태국의 빼앗겼던 상당 부분의 영토를 회복하게 됩니다.
태국의 입장에서는
우리 지배를 받다가 운이 좋아 독립한 나라가 캄보디아였어요,
그리고,
캄보디아의 입장에서는 원래 인도차이나 반도의 주인은 우리였는데, 굴러들어와 자신들을 밀어낸 나라가 태국이었답니다.
당연히, 두 국가의 관계가 좋을 수 없었죠.
이 과정에서 바게트국 프랑스가 끼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됩니다.
1953년,
캄보디아가 드디어 프랑스에서 독립을 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조금 시간이 흐른 상황이었죠.
독립의 기쁨도 잠시..,
이제 태국과 캄보디아는 실질적인 경계선 획정 문제로 서로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음... 생각해보면 사실 이 지역에서의 국경 획정은 간단한 문제 이긴 했어요.
이미 시암왕국(태국)과 프랑스는 1904 ~1908년에 국경을 획정합니다. 정확히는 1904년 2월과 1907년 3월에 두 번의 국경조약이 있었답니다.
긴 시간 동안 두 세력은 캄보디아의 국경을 결정하게 됩니다. 당연히, 프랑스 입장에선 조금이라도 더 시암왕국 쪽으로 땅을 넓히고자 했고, 시암왕국은 그 반대였죠.
문제의 두 나라의 접경지역인 당렉(DangRek) 산맥 정상에는 '프레아 비히어'라는 사원이 있답니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힌두교 신들을 모시는 사원입니다. 무려 9세기에 건축된 사원으로 천 년이 넘은 영토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불교를 믿는 태국이나 캄보디아 입장에서
이 사원은 알빠노였답니다.
큰 가치가 없던 이곳에 1906년 12월,
시암-프랑스(캄보디아) 국경획정위원회가 보낸 측량단이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국경선을 긋는 조사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죠.
문제는 이후의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었어요.
다음 해 1월 이곳의 측량이 끝났다는 태국주재 프링스 공사의 보고만이 존재할 따름이었죠.
어떻게 끝났다는 자세한 보고 없이 그저,
"잘 마무리되었다"는 말과 더불어 "1904년 설정하였던 국경과 연결하였다"는 기록만 있는 상황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이 중요한 이유이긴 한데... )
아무튼, 여기에 더하여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시암왕국에는 김정호 선생님 같은 숙련된 지도장인이 없던 관계로 왕국 대표단은 협상의 상대측인 프랑스에게 이 중요한 지도의 제작을 맡겨버립니다.
실제 양측은 이 부분은 기록으로 남기고,
11개에 달하는 지도 도면까지 만들어 출간까지 하였죠.
두둥~~
그리고, 이 모든 문제의 출발선이 여기에 있었으니,
문제의 그 '프레아 비히어 사원'이 캄보디아령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