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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빈 Jun 02. 2020

밀라노의 심장에 소쇄원을 세워라

제가 이 전시 책임자입니다만

 거리에는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오늘은 두 달 전 인천 앞바다에서 배로 부쳐진 전시물품들이 아침 일찍 미술관으로 반입되는 날이다. 대부분이 원목으로 만든 가구인지라 혹여나 작렬하는 적도의 태양 아래 틀어지거나 휘어지진 않았을까 내심 걱정하던 차였다. 아무래도 컨테이너에서 내리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봐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서둘러 호텔 문을 나섰다.


 밀라노 도심 서쪽에 위치한 '트리엔날레 지구'는 거대한 녹지대를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한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과 다양한 미술관 및 박물관이 산재하는 곳이다. 내가 담당하는 전시가 열리게 될 '밀라노 트리엔날레 디자인 박물관(Triennale di Milano)'은 그중 단연 돋보이는 곳으로 1923년 개관한 이탈리아 최초의 디자인 전문 박물관이다. 역사성과 상징성을 겸비한 곳에서 열리는 전시인 만큼 개관 전부터 현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전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마다 깊게 심호흡을 해가며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았다.


박물관 입구 전경, 건물 자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멋진 곳이다.
오래전 떠나보냈던 전시 물품들과 재회했다, 반가워라!
이봐 학생, 여긴 사진 찍으면 안 된다구! 네... 저요?


 지어진지 백 년 가까이 된 고풍스러운 박물관 건물은 과연 외관에서 풍기는 자태부터 남달랐다. 때마침 열리고 있던 엑스포의 열기 또한 건물 곳곳에 내걸린 큼지막한 로고의 현수막들을 통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벌써 하역장에는 전시의 물품을 실은 5톤 트럭 여러 대가 도착해 있었다. 막 짐을 내리려 준비하는 인부들에게 다가가 짧은 인사를 건넨 뒤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섰다.


 회사에 보낼 보고자료도 만들 겸 카메라를 꺼내 작업 면면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별안간 누군가가 나를 향해 소리치는 게 아닌가. 화물차 운전석에 앉은 덩치 좋은 기사님이셨다. 이탈리아어로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손을 좌우로 흔드는 모양새로 추측컨데 사진을 찍지 말라는 뜻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정중하게 내가 이 전시의 담당자(curator) 임을 몇 번이나 설명했지만 영어는 한 단어도 못 알아들으시는 눈치였다. 첫날 아침부터 분위기 험악해져서 좋을 건 없었다. 조금 억울했지만 조용히 카메라를 끄고 가방에 집어넣었다.


학생인 줄 알았다오, 거 참 미안하게 됐수다...


 사건은 아홉 시가 훌쩍 넘어서야 일단락됐다. 때마침 도착한 이탈리아어 통역사에게 이러한 상황을 알렸고, 그녀는 인부들에게 내가 이번 전시설계의 책임자이며 설치 감독을 위해 온 것이니 반드시 나의 지시를 따라 작업을 진행할 것을 주지시켰다. 통역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부들의 낯빛이 180도 바뀌었다. 특히나 좀 전에 나에게 소리쳤던 기사님은 내 손을 꼭 잡아가며 몇 번이나 진심으로 사과하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내가 너무 어려 보여서 그저 여행 중인 학생인 줄로만 착각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모두가 웃으며 마무리된 해프닝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바가 컸다. 비행기에서부터 유지하던 셔츠와 구두 차림을 끝까지 고수했던 것도 이날의 경험에서 비롯된 처사였다. 비록 얼굴의 나이는 감출 수 없을지라도, 책임자로서 품위를 보일 수 있는 약간의 노력이라도 해야만 했다.


사과한 이후 뭔가 더 열심히 일하는 아저씨들... 고생이 많으십니다!
정면에 보이는 작은 방이 이번 전시가 열릴 공간이다.
아직은 텅 비어있는 내부
무사히 반입에 성공한 가구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소목장 양석중 선생의 작품이다.


 트리엔날레 미술관 건물의 정 중앙에는 작은 쿠폴라(cupola, 돔 형식의 지붕)가 있다. 그 바로 아래에 위치한 가로, 세로 각 20m 정도의 공간이 이번 전시가 열리게 될 곳이다. 미리 방문해볼 수 없었던 관계로 제한된 몇 장의 사진과 도면으로만 상상하여 설계를 진행하느라 어려움이 다소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시장 자체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이다 보니 천장, 벽, 바닥 그 어디에도 못이나 스크루 등은 사용 불가였다. 첫 전시설계치곤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의 공간이었다.


 마침내 머릿속으로만 그려보던 전시장에 두 발을 디뎠다. 감개가 무량한 가운데 제일 먼저 확인했던 건 단연 '공간감'이었다. 설계하며 상상했던 천장의 높이, 벽의 비례, 바닥의 재질 따위가 과연 일치할지가 관건이었다. 예를 들어 전체 공간 규모에 비해 전시품이 너무 작다던지, 바닥이나 벽의 색상과 전시품의 색조가 미묘하게 다르다던지 따위의 상황이라면 크게 낭패였을 게다. 다행히도 나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공간의 '치수'와 '동선'도 일일이 점검했다. 전시품들이 제법 덩치가 있는 편이라 하역장에서부터의 반입 동선이나 운반 방식, 출입문의 통과 높이와 폭 따위에도 상당히 민감했었다.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돌발상황에 대비하여 한국에서부터 몇 번이나 확인하고, 점검했던 부분이었다. 그 정성이 통했던 모양인지 다행히 아무런 문제 없이 반입 작업이 완료되었다.


미술품 운반을 전문으로 하는 '아트 핸들러(Art Handler)'의 역할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하나 다 다른 모양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죄다 비슷해 보이는 묘한 매력의 도자기들
흰색으로 칠해진 열 개의 가구들은 '동일 형태-다수'의 전시물을 담아내고, 보여주는 최대한의 가짓수를 고려했다.


 이번 전시의 진짜 주인공인 청자도 무사히 도착했다. 유려한 물방울 모양의 작품들은 도예가 이가진 선생의 작품으로 총 50개가 준비됐다. 이번 밀라노 전시의 목적인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홍보'를 위해 각각의 도자기에는 정치인, 예술가, 건축가 등 국내외 유명인사 50명의 시그니쳐를 일일이 각인하여 특별 제작되었다. 전시 폐막 후에는 경매에 부쳐 수익금을 자선활동에 쓰고 대외적인 홍보 효과도 누릴 계획이라고 했다.


 전시공간을 설계하는 입장에서 고민됐던 부분은 따로 있었다. 50개의 청자는 각각 다른 문양과 빛깔이기는 해도 기본적으로 동일한 형태와 크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칫 전시가 단조로워질 수 있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묘수가 '열 개의 서로 다른 가구'였다.


 승 선생님 뜻에 따라 저마다 다른 크기, 형태, 용도로 설계된 원목 가구들은 도자기를 관람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군집의 가짓수를 전제로 한다. 이를테면 어떤 것은 단 한 개의 도자기만을 올려놓을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아홉 개를 한데 모아 보여주는 식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은 무릎 정도 높이도 채 안되는가 하면 , 또 어떤 것은 사람 키만큼 높은 벽장이기도 했다. 결국 단일 형태의 대상을 '군집의 행태'를 달리함으로써 관람자가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다음은 투명 필름에 미리 인쇄해온 도면을 바닥에 붙이는 작업이다.
바닥 대리석이 손상되지 않도록 접착제 대신 물을 이용해가며 붙였다.
작업을 지켜보시던 경비 아저씨께서도 자연스럽게... 합류!
완성된 모습, 대리석 고유의 빛깔과 필름의 질감이 어우러져 기대 이상의 효과를 냈다.

 

 청자를 올려놓을 가구의 형태와 크기를 정했으니 다음은 '어떻게 배치하는가'의 고민이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정방형의 작은 실내공간에서 관람객의 다채로운 동선을 이끌어 내고자 '소쇄원(瀟灑園)'의 지혜를 빌렸다. 전시장의 바닥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정원인 소쇄원의 도면이 1/4 크기로 재현되었다. 기물과 배치를 고려하여 놓인 가구들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소쇄원의 공간을 돌아보는 것과 같은 순서와 방향에 맞춰 천천히 관람하도록 유도한다. 전시장 그 어디에도 직접적인 언급이나 설명이 없음에도 안에 들어온 모든 관람객들은 가장 한국적인 공간을 경험하고 나가게 되고야 마는 재미있는 의도였다.


 실제로 전시 개막 이후, 많은 사람들과 매체들이 이 독특한 바닥 표현에 관심을 보였다. 내마모성이 있는 반투명 필름에 인쇄된 도면은 전시장 바닥의 유백색 고급 대리석 질감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은은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치 대리석 바닥에 목탄이나 연필로 도면을 그린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물론 준비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선의 두께나 농도를 확인하기 위해 실제 사이즈로 대형 출력을 몇 번이나 해가며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고, 그럼에도 실물 대리석과의 중첩 시 효과를 확인할 길이 없어 상상력을 동원해야만 했다. 잘 마무리되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번 전시의 유일한 건축공사(?)인 정자 세우기 작업 중이다.
가구들도 제자리를 찾아 다시 움직여진다.
전시 인트로에 안내 텍스트를 잘라 붙이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조명등까지 다 달아야만 비로소 끝난다. 참 많은 과정들의 연속이다


 반입부터 설치 완료까지 사흘에 걸쳐 계속된 작업은 조명등을 설치하는 것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특히나 조명을 일일이 조정하는 과정은 전시 계획의 백미다. 인부들이 사다리를 타고 조명등을 천장에 걸면 내가 아래에서 조명의 각도나 범위 등을 보아가며 조정하고 확인해주는 식이다. 똑같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조명등 하나의 각도, 밝기, 색상, 빛의 퍼짐 형상 등에 따라 그야말로 전혀 다른 느낌으로 연출되기 때문이다. 보통 전시 준비 과정의 맨 마지막 작업인 만큼, 조명 조정을 마치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턱 하고 긴장이 풀리곤 한다.


 첫 전시설계 프로젝트를 무사히, 그것도 멀리 밀라노 한복판에서 해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무실에서의 첫 미팅에서부터 지금까지 수개월간의 대장정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전시 기획자, 큐레이터, 건축가, 소목장, 도예가, 아트 핸들러, 목수, 도장공, 조명공... 힘을 모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고마운 얼굴 또한 아른거렸다.


개막을 앞둔 저녁, 아무도 없는 전시장을 홀로 거닐며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복기해봤다.
아쉬움이 가득했던 정자의 모습, 그 사연은 다음 글에서 계속....
이제, 관람객들을 반가이 맞이할 일만 남았다.


 건축과 전시는 모두 공간을 다루는 것이기에 닮은 점이 참 많다. 공간, 빛, 동선, 재료 따위를 세밀하게 다루고 조정하는 일이며, 도면이라는 도구를 통해 설계되며, 누군가에 의해 시공되어야만 비로소 세상 앞에 내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는데, 바로 '호흡'이다. 건축이라는 공간은 실제로 구현되기까지 설계기간을 포함해 적어도 수개월에서 수년까지 소요되는 긴 호흡의 작업이다. 특히나 마스터플랜처럼 다루는 면적이 넓거나 초고층 건물처럼 높이가 높은 경우에는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전시의 호흡은 비교적 짧다. 설계한 결과물이 시공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도 빠르고, 일단 개막일이 지나고 나면 관람객들의 평가나 기사 등을 통해 피드백을 받는 것도 즉각적이다. 그리고 정해진 기간이 지나고 나면, 가차 없이 폐기된다. 전시의 공간이란 곧 짧은 생명력으로 화려하게 피어났다 금세 시들어버리는 꽃처럼 그 빛을 발해버리고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인 게다.


  그게 바로 전시의 매력이다. 밀라노 한복판에 세워졌던 전시 공간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때의 숨 가빴던 시간과 경험들은 나의 기억 속에서 영원하다. 도록에 실린 몇 장의 사진 만으로도 생생하게 그때의 감각을 복기할 수 있는 까닭은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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