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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다비 Nov 08. 2023

8살, 첫 감옥 생활

미성년 수감자들의 고통


청소년보호소라고 불러야 할지, 소년구호소라 불러야 할지 그 명칭이 애매모호하여 ‘감옥’이라 부르며 글을 쓰려고 한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강압과 폭행으로 쳐진 울타리.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여 ‘소년구호소’라 이름 붙였지만 실체는 감옥이었다. 자유가 없고 노동이 있었으며, 폭행이 난무한 그곳은 어른들이 만들어 낸 수십 가지 고상한 이름으로 불린다 한들 감옥이 ‘사랑의 집’으로 변할 리는 없다. 어린 수감자들을 규칙적으로 벌하고, 노동 착취하면서 제대로 된 음식을 제공해 주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은 통강냉이를 소금에 삶아서 주고, 또 며칠은 세투리(씀바귀) 죽만 주었다. 세투리 죽을 줄 때는 뒤돌아서면 바로 배가 고팠다. 차라리 20알 정도 주는 통강냉이 죽이 훨씬 나았다. 어린 수감자들은 소금물에 끓인 통강냉이 죽이 나오면 후루룩 소금물을 재빨리 마시고 강냉이는 따로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다음 식사 시간을 기다렸다. 어린 수감자들은 다음 식사 시간이 되면 주머니에 보관해 두었던 강냉이를 꺼내 합쳐서 양을 두 배로 불려 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매 끼니마다 주는 양으로는 배에 기별도 가지 않기 때문에 어차피 배가 고픈 것 몇 시간만 더 기다렸다가 두 배로 양을 불려 먹으면 적어도 포만감은 생겼다. 많은 아이들이 이 방법을 썼다. 


미성년자들만 수감하는 감옥에는 열 살도 안 되는 아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삶의 터전을 잃은 아이들, 장마당(시장)에서 훔쳐먹다 안전원(경찰)에게 붙잡혀 들어온 아이들, 거지 생활하는 아이들 등 여러 죄목으로 이 감옥으로 들어왔다. 북한에서는 부모에게 버림을 받아도 죄가 될 수 있다. 죄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강제로 수감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북한에서 어린아이들을 모두 감옥으로 보내는 이유는 청소 차원이다.  나라가 어수선하고 힘든 상황에 어린아이들이 길거리를 배회하며 구걸을 하고 도둑질하면 일반 시민들에게 극도로 피로감을 주고 정신적 고통을 주기 때문에, 그 피로감을 덜어주기 위해 평범한 백성들에게 주는 북한 정부의 최소한의 배려(?)일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썩었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일상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심적 부담감을 덜어서 시위를 할 수 없게 하는 일종의 사전 차단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많은 미성년자들이 어른들의 완력에 학대를 당한다.  


내가 처음으로 ‘소년구호소’, 그러니까 감옥으로 갔었을 때는 8살 때였다. 아버지 따라 대홍단이란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 가면 감자라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살기 위한 아버지의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최종 목적지인 대홍단까지 가보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대홍단 감자를 맛보지 못하고 아버지는 중간 함흥 기차역에서 세상과 이별을 했다. 아버지가 세상과 이별을 고하며 나에게는 침묵으로 작별을 했다. 일찍 고아(어딘가 살아갈 가족들 소식은 모름)가 된 나는 그렇게 안전원의 강압으로 감옥으로 끌려가 몇 개월을 보냈다. 배고픈 아이들은 그중 최약자였던 나의 밥을 뺏어 먹었다. 어차피 만성 기아증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어 음식이 있어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차리리 그 음식을 고수하려 맞느니 뺏겨서 매라도 안 맞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넘어질 것처럼 영양실조에 걸려, 거기에 매를 맞으면 자칫 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는 함흥 감옥, 청진 감옥, 온성 감옥을 거쳐 거의 1년을 감옥 생활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는 8살 때부터 세상을 누비며 북한 전국에 있는 감옥에 수감됐다. 나중에는 외국 감옥도 가보게 됐다. 연길 감옥, 화룡 감옥, 용정 감옥, 투먼 감옥... 내 인생이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든다. 8살 때부터 15살까지 수시로 국내와 국외를 오가며 감옥 생활을 했다. 이게 다 북한에서 태어나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준 우리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김일성 밥상에 고기가 하나 얹혀질 때 백성들의 밥상에서 하나 사라진다. 김정일의 배가 불러 올 때 백성들 중 한 명이 사라졌다.


13살 때 중국 투먼에서 구걸하며 불법 체류자로 살 때였다. 두만강 주변으로 상점들이 즐비해 있었고, 관광 상품들이 가득했다. 맞은편으론 북한이 훤히 보이고, 싼값에 두만강 중앙까지 나가 북한을 볼 수 있어서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왔다. 북한 땅을 보기 위해 이곳으로 온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나는 돈을 구걸했다. “북조선에서 왔습니다. 배고파서 그러니 돈 좀 주세요.” 솔직히 진짜로 배고팠던 것은 아니다. 배가 고픈 건 구실이고 실제로 원하는 건 돈이었다. 관광 온 한국인들 중에는 정말 순진한 사람들이 많았다. 배고프다고 하니 돈은 안 주고 본인들이 먹기 위해 사온 간식들을 나한테 줬다. 구걸하는 사람이 짐이 있으면 불쌍해 보이지 않을까 봐 나는 가방 같은 것은 메고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관광에게서 받은 먹을 것들은 다른 중국인들에게 나눠주거나 버렸다. 저기 한국 분들, ‘두만강에 돈을 버리지 마시고 바로 앞에 있는 구걸뱅이 조선 백성에게 돈을 좀 주시지요? 여기 봐요! 제가 여기 있잖아요!’ 하기야 눈앞에 탈북자에게 돈을 주는 것보다 두만강 맞은편에 있는 북한이 더 궁금했을 것이다. 기록에 남기고 감정이 웅장해지는 느낌을 받기 위해 초라하고 볼품없는 북한 땅을 바라보며 위로와 안도감을 곁들여 남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함을 느껴야 하니까.


한국인 관광객들은 ‘북조선에서 왔습니다’라고 하니 천원짜리, 오천원짜리, 만원짜리 한국 돈을 쥐어줬다. 한국 돈을 헐값에 중국 돈으로 환전해서 늘 같은 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조선족 아줌마에게 맡겼다. 그렇게 5일 정도 돈을 구걸하다 보니 한국 돈 5만 원 정도 모았다. 그때 주변에 탈북자들이 많았다. 십대 탈북자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며 그룹으로 돈을 구걸했는데, 경쟁이 심해서 돈을 구하지 못했을 때는 만만한 어린 탈북자들의 돈을 갈취하기도 했다. 나약자에 속해 있었던 나는 조선족 아줌마가 그들(탈북 무리들)보다 더 신뢰가 가서 늘 돈을 맡겼다. 그러던 어느 날, 탈북자 무리와 함께 어울리다가 반 강요로 45도 되는 백주(소주)를 한 사발 마셨다. 정신을 잃고 두만강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다음날 오후까지 깊은 잠에 빠졌다. 꿈속에서 아버지의 흥얼대는 콧노래를 들었다. 행방불명이었던 엄마와 재회했다.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누나가 찾아오고, 형이 찾아왔다. 나는 탈북자가 아니었다. 소년단 넥타이를 매고 딸랑딸랑 책가방을 메고 ‘어린이는 나라의 꽃봉오리’라는 극찬을 들으며 등교를 했다. 


“야, 일어나! 공안이야! 빨리 도망쳐!” 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여전히 꿈속에서 가족들을 만나고 있었다. “꼬맹아! 빨리 도망쳐! 공안이 온단 말이야!” 공안이란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는 전속력으로 뛰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빠르단 생각으로 열심히 뛰었다. 그렇게 열심히 머리를 휘날리며 한참을 뛰었는데 누군가가 내 뒷덜미를 덥썩 잡았다. “베뚱, 베뚱.” 중국말로 ‘움직이지 마’라고 말하며 내 팔을 뒤로 꺾었다. 허무한 달음박질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간마냥 한참을 뛰었는데 바로 뒤가 내가 조금 전까지 잠자고 있던 돌의자였다. 여전히 나는 알코올에 취해 있었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탈북자 형들의 강요로 마신 것이 나를 잡히게 했다. ‘젠장, 술이 웬수로다!’ 나는 공안에게 말했다. “제발, 이거 놓으시오! 나 중국애란 말이에요!” 뻥이다. 어차피 조선족들이 조선말을 한다고 해도 억양이 다르고, 단어가 다르다. 한국어와 조선어가 다르듯이. 난 한국어가 아닌 조선어를 하고 있었다. 공안들은 내 말을 믿을 리 없다. 어차피 거짓말이었고 한눈에 봐도 공안들 눈에는 나는 ‘북한꽃제비’였다. 그렇게 쓸데없는 달음질만 하고 허무하게 붙잡혀 투먼 감옥으로 끌려갔다. ‘조선족 이모님, 2001년에 맡긴 제 돈은 잘 갖고 있죠? 22년이 흘렀으니 이자가 꽤 모였겠어요?’ 조선족 아줌마에게 맡긴 돈은 지금까지도 받지 못했다. 


투먼 감옥에는 공안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한 십대 초반 약골인 탈북자들만 잡혀 왔다. 공안은 현장에서 도망친 탈북자들을 끝까지 쫓았다. 그리고 며칠 후 한 무리의 탈북자들이 내가 있는 감옥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4-5명의 십대 후반 탈북자들로 무산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서로 고향 친구들이었다. 투먼 시장에서도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돈을 구걸할 때 몇 번 마주치면 트러블이 있었던 무리였다. 그 십대 후반 무리는 감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행패를 부리며 약골인 탈북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본인들보다 좋은 옷을 입은 탈북자들의 옷을 강제로 벗겨 바꿔 입었다. 그 빌런들은 어린 탈북자들의 몸을 수색해서 공안의 눈을 피해 겨우 숨겨 온 돈을 모두 빼앗았다. 그 돈은 북한으로 송환된 후 요긴하게 쓰기 위해 잘 숨겨두었던 돈이었다. 돈을 뺏긴 어린 탈북자는 손을 비벼가며 돌려줄 것을 부탁한다. 사정을 하지만 그 깡패 탈북자 무리가 들어줄 리 없다. 


그중 한 명이 나를 향해 외쳤다. “얌마, 옷 벗어!” 

“내가 왜 내 옷을 벗어야 합니까?” 

“이 쬐끄만 새끼, 버릇없이 형님들한테 개기는 거야? 왜 허리를 90도로 접어서 수령님께 인사하게 만들어 줄까?” 

어차피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다. 나를 향해 맹렬히 짖어대는 승냥이의 샤우팅에도 절대 내 옷을 벗지 않았다. 아니, 절대 벗을 수 없다. 이 옷은 나의 목숨과 같은 옷이었다. 북한으로 송환된 후 운 좋아서 이 옷을 끝까지 사수하게 된다면 나에게 큰 위로를 줄 옷이 된다. 장마당에 팔아먹을 것을 살 수도 있다. 혹은 고향집으로 돌아가 누더기만 입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를 과시할 수 있다. 나를 거지라고 놀리던 그 아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 옷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온갖 욕설과 협박에도 옷을 주지 않자 그 무리는 일심동체가 되어 나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지금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는 거지?” 탈북자 무리의 발이 내 몸을 짓눌렀다. 난 머리를 다치지 않기 위해 엎드려 머리를 감쌌다. 한참을 맞다 보니 어지럽고 메슥거렸다. 쌍코피가 터지고 눈이 충혈됐다. 많이 맞았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포기하고 옷을 벗어 주기로 했다. “잘못했습니다. 형님들, 제발 그만 때려주세요. 옷 벗어 드릴게요.” 나는 다급하게 외치며 폭행을 멈추게 해야만 했다. “그러게, 좋게 말할 때 말 들었어야지. 말 안 듣는 새끼들은 매가 약이란 말이야.” 때리던 것을 멈춘 무리는 서로 웃으며 말했다. 강제 북송당하는 것만이라도 분한데 같은 처지인 탈북자 놈들한테까지 쥐어터지니 너무 억울하고 분통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옷은 벗어 주기로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 했다. 


무리의 폭행에서 벗어난 나는 옷을 벗는 척하면서 이빨로 내 옷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단추가 사방으로 튀었고, 팔이 잘려져 나갔다. ‘내가 갖지 못한다면 너희들도 가질 수 없다!’라는 생각으로 내 옷을 내가 찢어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 승냥이 무리는 “와, 저게 완전 정신병자 새끼네” 하며 욕을 했다. 나는 그 탈북자 무리가 분명히 나를 때릴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순한 양이 된 것마냥 나에게 일절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자신들 것이 아니었으니 더 이상 쓸 수 없는 물건에 관심이 떨어졌던 것 같았다. ‘쌍놈 새끼들. 처음부터 무관심했더라면 옷을 찢지 않았을 거 아니야!’ 여름이었으니 다행이지 겨울이었다면 나는 일찍 얼어죽었을 것이다. 나는 내 손으로 찢은 너덜너덜해진 옷을 북한으로 끌려갈 때까지 입고 있었다. 옷의 기능을 잃은 옷을 그 누구도 탐내지 않았다. 다행인가?


2000년 초반에 수많은 어린 탈북자들을 만났다. 그 탈북자들 중에는 참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이들도 있었다. 남에게 싫은 말 한마디 못하는 아이들, 동정과 배려가 많은 아이들도 있었다. 너무 겁이 많아 어두운 밤을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과연 어떻게 탈북자가 되었을까? 그런 순박한 아이들을 궁지로 내몰고 대우도 받지 못하는 중국 땅으로 가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일까? 그들의 부모일까? 아니면 3대 독재자들일까? 이 모든 책임을 누구한테 물어서 보상을 받아야 할까? 그중에는 일찍 세상을 등진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00년 초반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죽었다. 장마철에 두만강을 넘던 많은 어린 탈북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깊은 애도를 표한다. 자신의 자식을 내팽개치고 본인들만 살겠다고 도망친 부모들을 재판대에 세워 죄를 물어야 하며 어린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어른들을 단죄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나 역시 어른인 것을. 지난 나의 아픔을 누구 탓으로 돌리겠는가. 어차피 세상이 동정하는 듯하지만 결국엔 본인의 십자가일 뿐이다.


본인의 십자가를 계속해서 쓰는 것은 언젠가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이 글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내가 쓰고 그들이 읽어, 나의 삶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삶과 연결이 되어 ‘우리 스토리’였다는 것을 그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 그러기에 할 수만 있다면 나의 모든 기억력 세포를 총동원하여 지난 추억과 기억과 경험을 자세히 쓰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나의 이름 석자가 고향 땅에 새겨져 '깊은 산골 마을에 볼품없던 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 생각마저 어른이었다'라는 한 문구라도 새겨지길 바라며, 자기 고향, 깊은 시골 마을을 기억한 작가로 그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북한의 삶을 써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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