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아, 죽음을 생각하다

[서평] 황정은, 디디의 우산

by 디아키


이 책을 왜 지금 와서야 읽었나 싶기도 하지만, 지금 읽어서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마음은 턱에 있어. 마음은 언제나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것이니까. 최종적으로 턱이 남았다면 마음은 여기에. 위턱과 아래턱, 턱을 짓누르는 턱, 그 간격에, 서로 다른 극끼리 붙은 자석처럼 꽉 달라붙은 그 간격에 간신히. 녹슨 자물쇠로 꽉 잠긴 듯한 입속에. 뻣뻣한 혀와 화약 맛이 도는 침에.
- p. 34
d는 그동안 자신이 무언가를 잃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세계가 변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야. 본래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이제 생각했다. dd가 예외였다. dd가 세계에, d의 세계에 존재했던 시기가 d의 인생에서 예외. 따라서 나는 변한 것이 아니고 본래로 돌아왔다......d는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었다. 차가우면서 뜨거운 금속 창처럼 양쪽 귀를 꿰뚫는 것이 있었다. d는 그간의 흔적들이 멀고도 긴 궤적을 그린 끝에 자신에게 돌아왔음을 느꼈다. 세계는 잡음으로 가득했다.
- p.40
그 죽음은 내게 조그만 점도 남기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삶이 내게, 알량한 점 하나 남겨주지 않았어.
- p. 46
이것은 망가지지 않는다.
자신있게 말하는 인간은 더러 보았지만 이것을 관리하는 인간,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인간을 d는 본 적이 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그저 망가지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농담처럼 그들의 믿음을, 그것도 부주의한 믿음을 말이다. 그러나 여기 이렇게 균열들이 있다. 멀쩡하다는 것과 더는 멀쩡하지 않게 되는 순간은 앞면과 뒷면일뿐. 언젠가는 뒤집어진다. 믿음은 뒤집어지고, 거기서 쏟아져 내린 것으로 사람들의 얼굴은 지저분해질 것이다.......
- p. 69
죽음을 생각할 때 나는 그런 광경이 떠올라요. 분명히 있었거나 너무 있었던 것 같은 순간들이요. 그것은 모두 과거이고 정지되어 있죠. 지금과는 완전하게 동떨어지고 무관한 채로 영원히 그 뒤가 없는 것처럼.......멈춰 있고 중단되어 있어요. 실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거나 움직일 때,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 죽음을 느껴요. 매우 정지된 지금을요. 너무 정지되어서, 지금 바로 뒤를 나는 상상할 수도 없고요 궁금하지도 않아요. 지금이라는 것은 이미 여기 와 있잖아요. 그냥 슥........그렇죠 아저씨 말대로 이미 슥....... 따로 상상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이 세계 이후의 저 세계라는 것을 상상하지 않습니다. 내가 현재나 과거를 생각할 때, 그것은 매번 죽음이고, 죽음을 경계로 이 세계와 저 세계로 나뉘는 것이 아니고 죽음엔 죽음뿐이며, 모든 죽음은 오로지 두 개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목격되거나 목격되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나요?
- p. 112 ~ 113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p. 114
불시에.......라는 것은 내 생각에.......우리가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 일상을 말이다. 일상에 조짐이 다 있잖아. 전쟁을 봐라. 맥락 없는 전쟁이 없고.......방사능도 마찬가지. 원전이라는 조짐이 있으니까 유출도 있는 거잖아. 지금도 그렇다. 내게는 언제나 지금이 그래.......지금은 꼭 전간기 같다. 1차대전과 2차대전, 두개의 거대 전쟁 사이엔 조짐이 아주 충만했지. 그런 조짐을 느껴. 세계가 곧 한번 더 망할 것이라는 예감이 있는데 그게 굉장히 확실하다. 또 망할 것 같고 이번이 되게 결정적일 것 같다는.......그런 예감이 있어. 너 전간기 예술가들의 작업을 봐라. 특히 음악하는 사람들, 클래식 재즈 할 것 없이.......종말을 앞둔 사람들처럼 노래하고 연주를 해. 그들은 확실히 뭔가를 느낀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내가 지금 느끼는 것, 대기 속에서 다가오는 재앙을. 나는 지금이 그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해.......한마디로, 직전이고....... 그래서 이런 광경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며 박조배는 장통교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턱으로 가리켜 보았다.
이 상황을 봐라. 얼마나 투명하고....... 얼마나 좆같냐. 그리고 그 좆같음이 눈에 보이잖아? 그냥 조용히 아닌 척하고 망해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나는 생각한다.......
- p. 129 ~ 130
그렇다. 이어지고 있다. 조짐도 무엇도 없이 이것은 이렇게 이어진다. 박조배는 금방이라도 세계가 망할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d는 의아했다. 망한다고?
왜 망해.
내내 이어질 것이다. 더는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삶이. 거기엔 망함조차 없고....... 그냥 다만 적나라한 채 이어질 뿐.
- p. 134
여소녀가 다시 다이얼을 돌렸고 그들을 엘라 피츠제럴드가 부르는 「블루 문blue moon」을 들었다. d는 눈을 뗄 수가 없어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너무 쉽게 깨지거나 터질 수 있는 사물. 그 진공을 통과한 소리들에도 잡음이 섞여 있었다. d는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얇은 유리 껍질 속 진공을 들여다보며 수일 전 박조배와 머물렀던 공간을 생각했다. 그 진공을. 그것은 넓고 어둡고 고요하게 정지해 있었으나 이 작고 사소한 진공은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져 있었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름이 사라진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愛人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을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

너의 오디오가 이제 좀 특별해졌느냐고 여소는 물었다. 같은 모델이라도, 그 기기를 다룬 사람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고 여소녀는 말했다. 세상에 그거 한 대뿐이니까, 빈티지를 고치려는 사람들은 고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살린다고 말하지.
눅눅한 바람이 수리실 안으로 불어 들었다. 비가 들이치자 여소녀는 창을 닫았다.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유리 벌브 속에 불빛이 있었다. d는 무심코 손을 내밀어 그 투명한 구球를 잡아보았다. 섬뜩한 열을 느끼고 손을 뗐다.
쓰라렸다.
d는 놀라 진공관을 바라보았다. 이미 손을 뗐는데도 그 얇고 뜨거운 유리막이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통증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 있었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 여소녀가 말했다. 그것이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
- p. 144 ~ 145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착각은 지독한 착각이었고 그의 문장은 갈수록 탁월해졌다. 김연수를 읽은 이후로 오랜만에, 문장이 부럽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죽지도 않고 살아있지도 않은 나는 오래간만에 찾아온 여유 속에서 문장을 읽는다.

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