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다 나오코가 감독을 맡은 <목소리의 형태>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영상화를 통해 파급력을 높이는 기존 교토애니메이션의 기획 방향과는 다른 맥락의 영화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인 만큼, 영화는 기존 이야기의 디테일을 살리기보다는 압축을 통한 포인트를 살리는 데 중점을 둔다. <목소리의 형태>는, 그렇기에 핵심인 트라우마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전개한다.
주인공 이시다 쇼야는 니시미야 쇼코의 삶을 망가뜨렸던 철저한 가해자인 동시에, 그 스스로 피해자인 인물이다. 업보는 그의 삶을 옥죄고, 까불거리던 천방지축 안하무인은 사람의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하는 소심남이 된다. 청각장애인인 쇼코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던, 아니 듣지 못했던 이시다가, ‘친구’라는 단어를 그 앞에서 표현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6년이었다. 스쳐가듯 그려지는 고독 속의 시간과, 삶을 죽음 앞에 내던지게 할 각오가 생기게 할 아픔이 뒤따르고 나서야, 그는 말할 수 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두 남녀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넘어’ 서로를 진정으로 마주하기까지의 시간을 서서히 쌓아 올린다. 그 과정에서 조연들의 이야기가 깎여나가고 드라마는 다소 거칠게 진행되지만, 그럼에도 둘 사이의 감정선만큼은 이해될 수 있는 맥락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그 감정은 세간의 평대로 단순한 청춘 남녀 사이의 사랑이 아닌, 고통과 절망의 우물을 들여다본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깎아내린 조연들의 이야기에서 ‘트라우마’와 관련된 부분들만큼은 최대한 남기려고 애를 쓴다. 지고지순한 선도 철저한 악도 없는 청춘들의 맨 감정은 맨질맨질한 껍질을 벗겨내면 두리안과 같은 냄새를 풍긴다.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이 희미해지기 위한 표백의 순간들은, 살갗을 벗겨낸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영화 역시 “가해자의 판타지”와 같은 비판의 항목들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영화마저도 이야기 너머로 지워질 수 없는 트라우마의 흔적을, 어떻게 지울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뾰족한 답을 온전히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두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시간은 그 모든 걸 온전히 지워내질 못한다. 사랑은 구원처럼 그려지지만, 현실에서는 사랑도 구원도 요원한 일이다. 영화 속의 판타지는 모두를 구원하지만, 그렇기에 영화는 판타지로 남는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왠지 모를 씁쓸함을 곱씹는 건 여전히 관객의 몫이다.
영화는 매끄럽다. 너무 과하지 않은 연출, 잔잔한 듯 물결치는 작화는 유려하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틀로써의 기능만큼은 거의 완벽히 수행하는 느낌. 생각해보면 <목소리의 형태>는, 어쩌면 애니메이션이라서,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들을 그려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