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서울 환경영화제] 3일차
종착지. 세계의 '끝'.
플라스틱은 중국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영화 내내 플라스틱은 분류되고, 씻겨지며, 기계로 보내져 녹여지고, 갈갈이 쪼개져 자신의 형태를 잃은 채 새롭게 나타난다. 검은 연기는 화장장의 그것처럼 공장 위를 떠날 줄 모르고, 마치 시체의 산처럼 쌓인 플라스틱은 공장에서 결코 치워질 줄 모른다. 5000여개의 공장들은, 모두 그와 같은 모습으로 언젠가 올 플라스틱 세계의 종말까지,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사람의 삶이 있다.
끊임없는 플라스틱의 삶과 죽음의 순환 속에서, 사람들의 삶도 피어나고 진다. 공장을 살아가는 두 가족은, 그 폐허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꿈꾸며 살아간다. 쓰촨에서 온 노동자는 하루 5달러를 받는 자신의 일상을 저주하듯 끊임없이 술을 마신다. 그의 아이들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외부세계의 꿈들을 주워 담으며, 스스로의 꿈을 꾸려 하지만 그의 자식들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공장주의 가족들은, 플라스틱을 팔아 자식을 유치원에 보내고, 차를 바꾸고, 베이징까지 갔다오면서 더 나은 삶을 꿈꿔보지만, 같은 일을 하는 쓰촨성의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조차 돈이 없어 닿을 수가 없다. 같은 공간 속에서, 꿈은 서로 다른 무게를 갖는다.
그럼에도 이들의 삶이 공평하게 위태로워 보이는 건, 그들이 스스로의 꿈을 딛기 위해 내딛는 발판이 너무나도 허약한 탓이다. 심지어 아이를 플라스틱 더미 위에서 낳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들의 삶은 천천히 좀먹어 들어간다. 염소들은 플라스틱을 먹다 서서히 말라 죽어가고, 검은 물 속에서 물고기들은 죽어 떠오른다. 장난감, 화장품, 사진까지 모든 것을 플라스틱 속에서 찾는 아이들은, 그 죽은 물고기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건져 가져온다. 사람들은 물고기 튀김을 먹고, 플라스틱을 가공한 물에 자신의 손발과 얼굴을 씻는다. 채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 공장 주인은, 불현듯 찾아올 죽음이 두려워 병원조차 가질 못한다. 다른 양상처럼 펼쳐질 것 같은 삶은, 어디까지나 가느다란 경계선상의 끝자락에 걸쳐 있을 뿐이다.
사실 <플라스틱 차이나>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질 만큼 인위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난다. 잔잔한 삶들 가운데 사건들은 쓸데없이 극적이고, 변수들은 지나치게 잘 통제된 채 나열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너머로 펼쳐지는 배경으로써의 플라스틱에는, 가감이 없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니어도 어떠한가. 삶은 어차피 꿈과도 같은 것.
아이들은 여전히 플라스틱 더미에서 삶을 찾고,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듯한 불길 속에서도 계속해서 살아간다.
마치, 플라스틱처럼.
* 사진 출처 : 서울 환경영화제(http://www.gffi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