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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름 Mar 08. 2017

울지 않았다

대신 자전거에 올라 학교로 향했다



스물 다섯, 다시 한 번 일본으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나는 곧장 일본에 가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미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았던 내가 일본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취업 비자와 유학 비자 외엔 방법이 없었다.

고작 일본어 자격증 하나 갖고 있는 내가 취업이 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현실적으로 그 때까지도 가정 형편이 좋질 않아 유학 비용을 부모님께 도움 받을 수 없었다.

1년 8개월동안의 월급은 매 달 매 달의 생활비만으로도 벅찼다. 다영이와 함께 일본으로 가자고 말했던 어느 여름날.

나는 다음해 4월에 떠나는 것을 목표로 일과는 별개로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틀 뿐인 알바비를 모아 3개월간의 학비와 입학금을 겨우 마련했다. 개다가 대행 업체에 지불해야 할 비용도 필요했다.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대행 업체에 부탁하여 학교를 드디어 등록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부모님은 나의 유학 계획을 모르고 계셨다.






그리고 2년 3개월의 유학 비자를 받았다.








유학 비자가 나온 후엔 생활비를 마련해야했다.

블로그를 통해 가계약을 하고, 대충 생활비를 계산했다.

방세가 4만 3천엔에 보증금을 준비해야했기에 초기 입주 비용만으로 약 10만엔의 돈이 필요했고, 생활비로 5만엔을 준비했다. 도쿄에 들려 오사카에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도쿄 여행을 위해 5만엔을 준비하고 도쿄로 가는 편도 티켓을 끊었다.






모든 것이 다 정리되고 부모님께 숨겨왔던 유학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는 안된다고 했지만, 이미 학교 등록과 집 계약이 끝난 걸 아시고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아빠에게는 딱 1년만 있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난 약 20만엔의 돈을 들고 나는 도쿄로 떠났다.









도쿄에 가서 동일본지진 때 큰 신세를 졌던 일본인 친구 하루카를 만났다. 그리고 하루카의 도움으로 도쿄의 많은 곳을 둘러보았다. 절약한다고 노력했음에도 여행인지라 어느 정도의 지출이 있었다. 그렇게 도쿄에서 3일을 보내고 나는 오사카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다.







정말 웃음이 날만큼 무모하게






  스물 여섯의 3월 오사카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신칸센은 생각보다 너무 비쌌다. 신칸센 중에서도 조금 저렴한 코다마를 이용했는데도 예상치 못한 큰 지출에 저녁을 굶어야만했다.

그리고 난 신오사카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부동산 사람을 만나야해 와이파이를 찾는데, 와이파이가 어디에도 잡히지 않았다. 큰 캐리어를 들고 여기저기를 헤매다 스타벅스 앞에서 와이파이를 연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방을 안내 받고, 보증금과 방세를 건네주고 침대에 누웠다.

3월 중순임에도 너무나 쌀쌀한 날씨.

늦게 도착한 탓에 이불을 살 큰 마켓도 이미 닫혀버린 상태였다.

심지어 가스 연결조차 되어있질 않아 따뜻한 물조차 나오지 않아 정말 차가운 물로 머리를 감아야만했다.

처음에는 냉방/난방이 같이 다 되는지도 모르고 그 날은 추위에 떨며 잠들어야만했다.





자다 너무 추워 몇 번이나 깼고, 닥치는대로 옷을 껴입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추위를 녹이기에 역부족이라 커텐을 뜯어서 덮고 잤다.


오사카에서의 첫 날은 정말 추웠던 기억이 강렬히 남아있다. 침대에 누워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고나니 눈물이 났다. 아무 것도 몰라 즐겁기만했던 워킹홀리데이 때와는 달리, 도피처럼 온 스물 여섯의 일본 유학이었다.



한 번만 더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스스로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다.




그다지 어리지 않는 나이가 날 무겁게 짓눌렀다.

외로움과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마리코 언니가 이사 준비를 위해 집까지 와주었다. 언니는 이불부터 시작해서 나에게 필요한 생필품 하나하나를 전부 다 같이 사러 가주었다.

그러다 난 전 날 돈을 아낀다고 저녁을 먹지 않았던 탓에 현기증이 나서 길에 주저 앉고말았다.

언니는 날 위해 편의점에 가서 물을 사다주었고, 난 물을 마시고 조금 쉰 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생필품을 모두 사고 자전거를 사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고작 1만 8천엔 정도였다.





덜컥 겁이나기 시작했다.





50만원만 들고 떠났던 워킹홀리데이에 비하면 여유롭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오산이었다.

또다시 우울한 생각이 날 덮쳐오려고 하고 있었다.

그치만 난 무너지지 않았다.

누구 뭐라도 나는 혼자였고 더이상 어리지 않았다.

어떻게 절약해 나갈 것인지, 아르바이트를 어디서 해야할지를 알아봤다.

그리고 교통비를 아끼기위해 자전거로 통학을 하는 방법을 택했다.




입학을 하고 체력이 부족함에도 40분이 넘는 거리를 매일 자전거를 탔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다리에 힘이 풀려 턱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바지가 찢어지고 피가 났다.

그리고 자전거가 쓰러지며 매일 절약하겠다고 들고 다니던 도시락이 쏟아졌다.



정말 너무 비참했다.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냥 그대로 모든 걸 다 버려두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난 울지 않았다.

대신 상처가 벌어져 피가 나는 다리로 나는 자전거에 올라 학교를 향했다.

찢어진 바지 사이로 계속 피가 나고 벌어진 상처로 인해 자전거 페달을 돌릴 때마다 다리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견뎠다.






   나에게는 장학금을 받겠다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더이상 난 어리지 않았고, 나약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2년 3개월간의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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