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게 괜찮은 하루를 기대한다.
이른 아침 5:40분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부릅뜨고 알람을 끈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들을 확인하고 안 깨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숨죽여 화장실로 이동한다. 전 날 먹은 술이 아직 혈류를 타고 흐르는 것 같지만, 억지로 억지로 칫솔을 들고 치약을 짜낸다. 오늘따라 칫솔이 망치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진다. 몸도 칫솔도 천근만근. 세수를 위해 고개를 숙이니 술이 뇌로 쏠리는 기분이다. 겨우 세수를 마치고 거울을 보니 핑 돈다. 아, 출근해야지.
화장실 바로 옆 마련된 화장대에서 스킨, 로션을 순서대로 바른다. 아들이 잘 자고 있는지 다시 확인한다. 곤히 예쁘게도 자고 있다. 넌 잘 때가 제일 예뻐.. 대충 단장을 마치고 5초간 멍 때리고 대충 손에 집히는 옷을 여맨다. 시계를 보니 6:20분, 지금 나가야 버스를 놓치지 않는다. 아침 공기가 아직 차다. 나름 청아한 공기를 들이마셨는데 문득 미세먼지 나쁨이 생각난다. 서둘러 가방에 있던 마스크를 꺼내 쓰고 저 멀리 보이는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빨리한다. 버스 어플을 보니 곧 도착한단다. 줄 끄트머리에 서서 겨우 마지막에 탄다. 살았다. 배차간격이 30분이기 때문에 지금 못 타면 회사에 지각을 하게 된다. 편도 2시간, 쉽지 않다.
8:20분 회사 도착
늘 보이던 아침형 인간들이 와있다. 팀사람들, 이사님 순서대로 둘러보고는 착석을 한다. 두 대의 모니터 우측으로 오늘의 회의는 무엇이 있고, 몇 시인지 확인한다. 오늘도 회의가 Full이다. 자리에 앉아 10초간 멍 때리고 유산균을 먹는다. 우측에 마련된 쿠팡에서 주문한 일회용 콜롬비아 드립커피를 뜯고 뜨끈한 물을 조금씩 넣으며 향을 맡는다. 너무 뜨거워서 조금 식으면 마셔야지 했는데 이사님이 호출한다. 커피 맛도 못 본 채 이사님 방으로 달려간다. 어제 있었던 대표님과의 대화를 듣고 이제 우리가 무얼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신다. 가져온 다이어리에 잘 적어두고 대답하고, 잊지 않게 자리에 앉아 적어둔다. 이사님실에 다녀오고 자리에 오니 다 식은 커피가 나를 반긴다. 출근을 환영해.
이사님이 얘기하신 내용을 to do list를 업데이트하고 자리에서 오늘 회의 주제에 대해 둘러본다. 혹시나 공격할 대상이 있는지, 공격이 오면 어떻게 맞서야 할지 전쟁을 준비하는 군인이 따로 없다.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회의에 들어간다. 다른 팀과 협업을 위한 자리인데 그 죽일놈의 R&R부터 따지고 든다. 애초에 롤을 잘 지켰으면 이 일도 우리가 안 할 거다 라고 하고 싶지만 참는다. 어쨌든 해결을 해야 하니 어린이집 선생님처럼 토닥이며 회의를 겨우 마친다. 오늘 역시, 별 소득 없이 끝이 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업무에 집중한다. A프로젝트에서 진행 중인 일부를 맡아 처리 중에 있다. 생각보다 구조가 복잡해서 개발팀 사람에게도 도움을 얻고, 옆 사람과도 논의를 해본다. 마음같이 풀리지 않고 있는데 B프로젝트 담당자가 나에게 터벅터벅 걸어오는 게 느껴진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봤더니 어제도 야근을 한 건지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온 팀원이 힘없이 말을 건넨다. "팀장님, 어제 말씀하신 내용 반영을 해봤는데 여기 구간에 좀 막히는 게 있어요." 예상치 못한 문제니 내가 확인해보겠다는 답을 건네고 추욱 쳐진 팀원의 어깨를 토닥여준 뒤 돌려보낸다. 햇병아리 팀장이 된지도 어느덧 1년.
숨 쉬는 점심시간 12시
쉬지 않고 일을 해서 그런지 점심시간이 빨리 돌아온다. 대충 주변에 누군가에게 낑겨서 점심 동행을 요청해서 배고프지 않을 만큼 대략 끼니를 챙긴다. 이런저런 사적인 얘기들이 오갈 때쯤, 엄마한테 전화가 온다. "어린이집 친구 선물 샀니?" 아참... 깜빡했다. 금방 주문해서 수요일에는 보내겠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공격이 시작된다. "얘, 너는 네 자식인데 신경 좀 쓰고 살아라. 엄마도 애 보느라 힘든데 그런 건 네가 알아서 좀 챙기고 그래. 다음 주에 소풍 간다는데 도시락은 뭐 싸야 되는지도 다른 엄마들한테 물어보고" 엄마 미안해, 아는 엄마가 없어.
주변에 물어보겠다고 대충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2차 공격이 온다. "어린이집 선생님한테 얘기해서 누구누구 엄마들하고 연락도 좀 하고 해 봐. 너는 네 자식 친구들 엄마도 모르니? 아휴 속 터져" 어린이집 엄마들하고 친해져서 득 될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알겠다고 대충 방어 후 남은 밥을 꾸역꾸역 넣는다. 세상에서 가장 모성애가 강한 내 아들의 할머니, 나는 그녀의 딸이다.
오후 3:00 키즈노트
억지로 넘긴 점심이 무리가 됐는지 소화제를 한 알 삼키고서야 속이 조금 편안해졌다. 3시가 되기 무섭게 키즈노트(어린이집 활동을 기록하는 앱) 알림이 온다. 오늘은 장난감을 던지거나 망가뜨리면 안 되는 생활예절을 배웠단다. 병원놀이를 통해 다친 장난감을 진찰하기도 하고 밴드도 붙여주며 친구들과 미소 짓고 행복해 보이는 아들의 사진을 본다.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밝다. 요즘같이 아동학대 사건사고가 많을 날도 없는데, 믿고 맡길 수 있는 어린이집을 찾았다는 건 정말 나의 모든 운을 여기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따라 사진을 많이도 올려주셨다. 덕분에 아들이 잘 때 출근하고 잠들면 퇴근하는 나에게 매일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유일한 창구다.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노라면 이내 누군가 말을 건넨다. "회의 가셔야죠" 키즈노트를 급히 종료하고 다이어리를 들고 예약된 회의실로 달려간다. 아, 잠시 잊고 있었다. 아직 회사다.
오후 7:10분 퇴근준비
일을 얼추 마무리하니 7시가 좀 넘었다. 오늘은 컨디션도 별로고 집에 가야지 했는데 아직 퇴근 전인 나를 보고 이사님이 부른다. "한잔?" 너무 피곤하지만 이사님이 호출하는데 가야겠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나만 죽을 수 없지라는 생각과 함께 씨익 웃고 친한 동료를 달고 간다. 오늘의 메뉴는 명태조림. 뜨끈한 명태조림에 소주를 한 잔 걸친다. 사실 너무 피곤해서 그렇게 달갑지 않은 한잔의 제안이었지만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가다 보면 제법 즐겁다. 얼큰하게 술이 달아오를 때쯤, 1차가 마무리된다. 잘 먹었습니다.
2차는 항상 의미 없는 고민을 한다. 가려는 자세만 취해도 어딜가냐는 소리에 군말 없이 남는다. 1차에서 마신 술 때문인지 피곤함은 사라졌고, 오히려 이제 조금 고양되어 있는 것 같다. 2차는 1차에 비해 조금 진지하게 누군가 타겟을 잡아 붙잡고 얘기하기 시작한다. 상대가 좋든 싫든 나의 현재 상태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상대는 내 상태를 알고 나를 대해야 한다는 취중 논리가 시작된다. 그렇게, 오늘도 취했다. 정신의 끝을 부여잡고 택시를 불러 탄다. 카카오택시의 안심 알림 메시지를 남편에게 보내 두고 이내 잠들어버린다. 정신 PAUSE.
새벽 2:00, 진짜 퇴근 완료
"손님, 도착했습니다" 취중에도 기사님께는 꼬박꼬박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면 조금 술이 깨는 것도 같다. 행여 아들과 남편이 깰까 까치발로 조심조심 들어간다. 그 정신에도 깨우면 안 된다는 일말의 사명감 같은 게 있다. 하지만 역시 술 취한 사람의 정신은 믿을게 못된다. 소란스러운 인기척에 자다 깬 남편이 문 앞에 마중 나와 나를 맞이한다. "아휴, 늦었네. 내일 피곤하겠다 얼른 자" 화가 날 법도 한데, 한 번을 안 내는 걸 보면 가끔 스님인가 싶다.
내일은 신규직원 면접이 있어서 반드시 씻고 자야만 한다. "머리 감지 말고 그냥 자 하루쯤 안 감으면 어때" 면접관이 냄새가 나는 상태로 면접을 임할 수 없지 라는 개똥철학(그 정도로 안 먹었음 됐잖아!)을 내세워 겨우 씻고 바야바같은 머리를 말린다. 쓸데없이 많은 숱이 가끔은 너무나 번거롭다. 팔이 너무 아파서 약 10% 부족하게 덜 멀린 머리를 방치하고 자려고 안방에 들어가는 시간 새벽 2:00. 저만치 대충 널브러진 느낌으로 세상 편하게 자는 아들과 세상 차분히 잠든 남편이 보인다. 가모장의 하루 종료.
다음 날, 이른 아침 5:40분
이른 아침 5:40분,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부릅뜨고 알람을 끈다. 어제 달린 술 때문에 오늘도 4시간을 못 잤다. 특별한 사건이 없다면 비슷한 일과를 마무리하고 7시쯤 퇴근을 한다. 회사 건물을 나와 찬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이어폰을 꽂아 노래를 켠다. 환승이 필요한 버스까지 갈아타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하..' 오늘도 조금 버거운 하루를 잘 견뎌낸 나에게 대견하다 토닥이며 잠을 청한다. 인체의 신비라고 느껴질 정도로 정류장에 도착하기 10분 전쯤 눈이 떠진다. 잠에서 덜 깬 상태로 내리면 밤에는 아직 쌀쌀하다.
남편은 집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하기 때문에 친정엄마가 아들의 어린이집 등하원을 맡아주고 있다. 때문에 회사가 편도 2시간이어도 엄마집 근처에 살아야 한다. 나만 조금 피곤하면 되지 뭐.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면 집에서 나를 마중 나온 남편이 저만치 기다리고 있다. 나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공유하고 남편은 집안일의 완성도를 공유한다. 그렇게 친정집에 들어서면 꼬꼬마 아들이 "어? 엄마네?? 엄마아~"하고 폭삭 안긴다. 안아주는 느낌이 어째 매번 새롭다. 언제 또 이렇게 컸지?
익숙한 시간, 낯선 하루
비슷하면서 새로운 하루가 흐른다. 반복되는 일상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사건들로 구성된, 익숙한 시간의 낯선 하루가 지나간다. 가끔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에게서 낯선 감정이 들 때가 있고, 낯선 사람이어도 익숙한 시간이 가져다주는 안도감도 있다. 매일 하루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익숙해져서 정말 괜찮은 건지 위태로운 건지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안 괜찮은 걸 지도 모르지.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래 보지만, 그럼에도 이게 정말 괜찮은 것인지 아닌지 구분되지 않는 그런 기분. 나만 이런 것이 아니라고, 가끔은 마음껏 힘들어도 괜찮다고 누군가 말해주기를 바랐다.
'공감'이 필요했다.
그 누군가를 찾고 싶었다. 반복되는 무료함을 느끼면서도 정신없고 고단해서 무료한지 모르겠는 이런 기분. 완벽한 공감이 아니더라도 그 기분을 이해해서 끄덕여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싶었다. 서로를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 그 안에 의무를 다해야 할 아내와 엄마의 역할. 한 회사를 성장시키는 팀장, 그 안에서 끊임없이 조율하는 집과 회사의 균형.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눈칫밥 10년으로 터득한 아이가 있는 기혼 여성과 남자의 회사생활에 대한 미묘하게 차이나는 시각. 직장생활 중 아이를 케어하기에 아직 부족한 한국 사회구조로 인해 결국 할머니 손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육아 방식. 황혼육아로 감당하기 힘든 친정엄마로 부터 오는 하소연. 주양육자가 '엄마'가 아님에서 오는 주변의 불편한 시선들. 나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감정들.
그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가 없다. 나의 하루가 100이라 했을 때, 소수점 단위로 비율을 나눠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관리를 소홀히 하는 순간 멘탈은 무너진다. 그래서 썩 좋은 필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느끼는 감정들을 글로 써내면서 감내했던 답답함도 조금씩 털어내 보려 한다.
언제나처럼, 괜찮은 하루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특히 초보 부모가 된 직장인들은 힘겨운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회사에서, 집안에서 기대하는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나름 선방할 때는 그 기분에 하루를 보낸다. 이런 삶이 좋냐고 누군가 물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고 괜찮다. 예상했던 삶은 아니지만 어찌 모든 것을 예측하며 살겠는가. 내가 선택한 삶이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삶이니 어떤 하나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좋다.
오늘도 언제나 그렇듯 비슷하면서 다른 보통의 하루가 흘렀다. 오늘도 최선을 다하기보다 멘탈을 유지하는 최적의 비율을 찾는데 힘을 쓴다. 시간이 흘러 마음에도 제법 여유가 생기는 그 날, 삶을 뒤돌아 봤을 때 지금 느끼는 작고 큰 마음들이 가치가 있기를 바란다. 살아감에 있어 이 유난스러운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 믿음 하나로 언제나처럼 오늘을 살아간다.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괜찮은 하루'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