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나에게 온전한 휴식을 선물할 것
너 정말, 괜찮아?
요새 들어 동료, 친구에게 심심찮게 듣는 질문이다. 특히 첫 번째 글이었던 '괜찮은 하루'를 읽고 주변에서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가 왔다. 정말 괜찮은지를 묻는 질문이 유독 많았다. 나의 당시 힘들었던 감정이 고스란히 글에 담겨 상대방에게 나의 지친 마음을 공유했나 보다. 나의 감정이 글로써 상대에게 전달됐다니.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글을 잘 쓰는 걸 지도 몰라...!!
스스로 괜찮은가의 척도를 알기 위해서는 병원에 가면 흔해 빠지게 듣는 '스트레스'가 있는가를 체크해보면 되겠다. 전문가는 아니기에 스트레스가 왜 생기고 어떤 상태라고 명명할 수는 없지만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게 되고 한숨이 절로 나오고 자주 당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면 당신에게 스트레스는 있다고 보면 된다. 우리는 이런 스트레스라는 놈을 물리치기 위해 돈 주고도 못 사는 노하우, '스트레스 해소법'을 각자 연구한다. 누군가는 친구를 만나 풀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밤이 새도록 게임을 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고 글로 마음속 깊은 감정을 풀어내는 사람들도 있다.
나의 경우 스트레스라는 이 귀찮은 녀석을 물리치기 위해 어떤 행위로 잊어내기보다 온전하게 그 녀석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갖는다. 빼꼼히 녀석을 들여다본다. 스트레스를 겸허히 받아들임으로써 인생이 뜻대로 안 됨을 인지하고 욕심의 허상을 깨우치며 무소유의 자아를..(여기까지). 무튼 나에게는 멋진 그 어떤 것도 딱히 필요가 없다. '휴식'이 유일한 해소법이다. 일명 '혼자시간'. 스트레스가 많을 때는 정말이지 철저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불평불만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서 미간 주름이 V자로 각인된 사람이 됐겠지.
혼자시간, 유일한 나만의 것
혼자시간이 필요해진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어릴 때도 일명 '잠수'라는 병(?)을 통해 혼자시간을 즐기긴 했다. 어떤 관계에 있어 삐치거나 기분이 나쁘면 연락을 일절 안 받았다. 당시에는 친구도 가족도 내 것이 아닌데, 마치 내 것인 것처럼 생각했다.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나를 생각해주지 않으면 그게 그렇게 마음이 상했다. 관계중독이 심각했던 때였던 것 같다. 그때는 잠수를 타고난 뒤 오는 걱정과 격려, 나에게 주는 그 관심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잠수를 자주 탔다. 돌이켜보니 진짜 말도 안 되는 관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온 몸의 털이 설 정도로 부끄럽고 숨고 싶다. 미안하다, 내가 그렇게 관계에 성숙하지 못했어.
이런 인간관계 중독에 걸린 것은 기본적으로 내 성향이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표현방법이 조금 서툴렀을 뿐. 사람의 존재 자체를 좋아하는 탓에 많은 사람들과 잘 지내려 힘을 쓰고 살았다. 과거에는 모든 에너지를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데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애정을 쏟았는데 결국 내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은 없는 게 정상인데 그게 그렇게 속상했다. 배려가 당연함이 됐고 믿음은 배신이 됐다. 사회로 나오니 계산에 의한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배신의 배신을 거듭하며 나의 인간관계 중독은 종결됐다.
그렇게 사람에게 치이고 지쳐가다 보니 잊히던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도 내 소유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사람에게 받은 상처들을 스스로 치료하며 조금씩 관계들을 정리해갔다. 그렇게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마음속에 존재한다. 관계는 협소해졌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편하다. 알게 모르게 사람 관계의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고 그 벽이 드러나 불편해지지 않도록 잘 포장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누군가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시간들을 지내다 보니 필요해졌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혼자시간. 마음도 표면도 온전하게 자유가 되는 시간. 그동안 지켜내고 싶었던 사람이나 관계가 아닌 그 시간만이 유일한 나만의 것이었다.
비교 대조군으로의 나
스스로를 가장 빨리 불행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고 있다면 ‘비교’를 추천한다. 그건 실패가 없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완]
혼자만의 시간을 너무 길게 갖게 되면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비교'다. 참 많은 비교를 당하고 남과 비교를 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여전히 비교를 당하고 하며 산다. 수동이든 능동이든 결과적으로 비교의 대조군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불쌍한 내 몸뚱이는 하필 나로 태어나 일생동안 비교하고 비교받으며 살아간다. 스스로에게 부족한 게 너무 많다고 화를 낸다. 나를 만나 네가 고생이 참 많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나에게, 나는 사과해야 할 것이 참 많다.
돌이켜보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나를 타박할 때가 있다. 남들은 육아도 직장생활도 다 잘하는 것 같은데 나만 제대로 못하는 것 같을 때, 상사의 지시에 다른 동료에 비해 퍼포먼스가 떨어질 때, 다들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은데 나만 유독 힘들어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 등 이 녀석과 비교해도 저 녀석과 비교해도 늘 비참해지는 것은 나일뿐인데, 나는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상처를 준다.
물론 비교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때로는 비교를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비교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성장곡선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비교 때문에 힘든 것도 많지만 덕분에 얻은 것도 많다. 그래서 꼭 비교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몇 가지 큰 문제들이 있을 뿐. 그래서 혼자시간도 너무 길어지면 못쓴다.
남 인생의 들러리
비교를 할 때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저 녀석보다 내가 잘 '못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만큼은 '비교'가 나를 최고로 불행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정말이지 실패라는 것이 없다. 비교하는 순간부터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저 사람들은 괜찮은데 오직 '나'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야속하다. 이런 느낌을 받고 싶지 않아서, 그런 순간을 최대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내가 취했던 방법은 '잘난 놈 말 잘 듣기'였다.
잘 나가는(?) 사람들이나 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말을 온전히 신뢰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비교 대조군으로 만든 원인제공자일 텐데, 그 사람들은 내 삶의 기준이 되었고 그들이 바라볼 때의 '올바른 삶'을 그대로 옮겨 살기 시작했다. 졸업, 취직, 연애 그리고 결혼, 자녀 등 당연히 성인이 되면 순리대로 지켜야 하는 미션. 마치 레벨업을 위해 퀘스트를 깨듯 그렇게 살아갔다. 인생이 게임과도 같았지.
그렇게 그 잘난 양반들이 하라는 대로 잘 살아왔는데 나도 그들처럼 잘난 사람이 됐을까? 그럴 리가! 오히려 보이는 것보다 더 보잘것없는 내면을 갖게 됐고, '자존감 따위 없는 성인'으로 성장해버렸다. 그 잘난 놈처럼 살고 싶었던 나는 그들의 말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남들이 볼 때는 제법 그럭저럭 근사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적어도 평균은 하고 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딱히 불편함은 없었다. 잘난 놈 말 잘 들으니 내면은 보잘것없었지만 표면적으로 중간은 가는 것 같았다. 잘난 놈 주변에서 남이 시키는 인생의 들러리로서 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그래 결심했어!
아주 오래전 MBC에서 했던 프로그램 '이휘재의 인생극장'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 아.. 물론 인생극장 할 때 나도 어렸어요. 진짜임 - 그 프로그램의 콘셉트는 인생의 선택의 기로에서 한 인간의 갈등을 재미있게 풍자하여 그려낸 한 편의 미니 드라마였다. 살다 보면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 선택 앞에서 온전히 본인의 의지만으로 결심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그저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했더라. 그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지만 알 수 없는 억울한 감정에 울컥해졌다. 왜 나는 내 인생인데 남들의 눈만을 인식하고 살고 있는 걸까.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순탄하고 말끔해 보이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늘 같은 생활이 반복됐다. 반복되는 생활을 한탄하며 지루하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누군가는 그런 불만에 동조를 하기 시작하고 결국 그들만의 리그에서 네가 더 힘드네 내가 힘드네 하면서 살아갔다. 그래 결심했어! 는 꺼내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아무런 의지 없이 불만만 가득 쌓아가며 살아갔다.
주기적으로 조율이 필요하다.
햇볕이 아주 따사로운 화장한 어느 날이었다. 문득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지만 뇌도 가슴팍도 더 이상 입출력이 불가능한 정지상태가 됐다. 갑작스럽게 휴가를 쓰고 집에 혼자 있었다.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남편은 나를 깨우지 않고 아이를 엄마에게 데려다주었고 나는 그렇게 늦잠을 잤다. 오랜만의 늦잠이었다.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몇 달만의 늦잠인가. 술 먹고 잔 것도 아니고 맨 정신으로!
그렇게 늦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는 세탁기를 돌리고 커피를 내려서 마루에 가만히 하늘을 보고 앉아있었다. 청승도 그런 청승이 없지, 갑자기 눈물 핑 돌더니 한 방울이 무심하게 툭- 떨어졌다. 그렇게 펑펑 울었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않고 혼자 그렇게 그 자리에서 열심히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뭔가 개운함 같은 게 느껴지더라.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가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으니 천국인가 싶었다. 얼마 만에 갖게 된 건지, 소중한 혼자시간을 충만하게 즐겼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낸 다음 날, 뇌에도 어느 정도 여유공간이 생겼는지 일도 제법 잘 됐고 상사에게 혼이 나더라도 참을만했다. 아이 때문에 걸려온 친정엄마의 잔소리 폭격도 견딜만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휴식을 통해 나의 에너지를 충전한 것이다. 꽉 차고 풍요로운 하루를 보내고 싶은 게 아니라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남의 삶처럼 느껴지던 내 삶이 휴식을 통해 내가 중심으로 돌아오면서 '괜찮아'지는 여유가 생겼다.
낡은 악기도 조율을 주기적으로 해주면 악기가 낡아도 아름다운 선율을 만든다. 나의 마음도 주기적으로 조율을 해주니 삶이 조금씩 고쳐지더라. 내가 주체가 되어 살아가기 시작했고 선율이 비록 아름답지 않아도 나름대로 인생의 '흐름'이라는 것이 생기더라. 결심하는 대로, 의지대로 살아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휴식이 전해준 마음의 여유가 내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힘을 준 것이다.
사과해 나에게. 지금 당장!
한 때는 휴식이 사치라고 느꼈던 때가 있다. 이럴 때가 아니라고, 남들은 지금 전쟁터에서 승리가 코앞인데 나만 이렇게 여유로워서는 지고 만다는 나를 다그치고 몰아세웠었다. 바보 같은 짓이다. 지면 좀 어떤가? 다시 장전하고 전쟁터에 나가면 된다. 대한민국 1% 상위권의 금수저가 아니면, 어차피 아등바등 살아봐야 거기서 거기다. 마음을 좀 편히 갖자. 내가 주체가 되어 삶을 의미 있게 살자. 내가 나를 존중해주는 삶을 산다면 그걸로 됐다. 다만, 이 글을 보는 당신이 1% 상위권이라면 연락 주세요. 이상하게 친해지고 싶네요.
휴식을 사치라고 느끼지 말자. 휴식은 선물이다. 내가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한 초석이고 의지다. 만약 이 글을 읽는 그대가 지금의 불행한 상황은 내가 자초한 것이라고 나 스스로를 압박하고 남과 비교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스스로에게 먼저 사과하자. 그리고 가능한 빠른 시간 내 휴식을 선물하자. 지금의 모든 내 주변 상황이 어떻든 다 떨쳐내고 온전하게 나의 내면을 가꿀 수 있는 그런 휴식. 사람마다 방법은 달리하겠지만 온전히 나를 위한 하루를 선물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당신의 그대는 솔직히 할 만큼 했다. 남들의 잣대로 자신을 잃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특히, 친구야 너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