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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May 06. 2020

버릴 것 없는 회사생활

배움은 정말이지 끝이 없다.

회사생활을 한 지 10년이 됐다.


진득하게 뭔가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닌데 회사생활은 참 길게도 했고, 딱히 질리지도 않는다. 사실은, 돌아보니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 맞지만 분명 이 기나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 같아서 그 이유들을 하나씩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름대로, 회사생활 좀 해본 직장인으로서 몇 자 적어보겠다.


우리 모두는 항상 배우며 살아간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하물며 여가시간에 즐기자고 보는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도 뭔가 배운다. 배움은 끝이 없다.


지금부터 이 거지 같은 회사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있을까 싶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나의 소중한(?) 몇 가지 경험을 공유해본다. 그 당시에는 정말이지 배울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던 손절하고 싶었던 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것들이.





최악의 상황을 대처하는 법


"김대리, 이리 와 봐"

아침부터 어김없이 찾는다. 이제 내 이름이 대리인지 본명이 있기는 한 건지 헷갈릴 정도. 내가 대리가 아니었으면 이름을 저렇게 수 천 번 불렀겠지 생각하니 직급이라는 게 유용할 때도 있구나 싶다.


"네 팀장님"

"여기... 이 도형 좀 없애줘."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빨간색으로 바꿔줘"

"네, 알겠습니다."


나는 저 자식 일을 대신해줘서 대리인가. 자리로 돌아와 생각한다. '저 자식은 대체 회사에 와서 뭘 하는 거지?' 파워포인트에서 도형 지우는 것도 혼자 못하면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있긴 한 걸까? 저것도 기획팀 팀장이라고 앉아 있노라면 내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게 있나 싶다. 그렇게 또 뭐가 불만인지 혼자 얼굴이 붉어져 씩씩거리면 담배를 태우고 돌아온 팀장이 또 부른다.


"김대리"


팀장놈아 그냥 녹음기에 이름을 녹음해두지 그래? 버튼만 누르면 이름 호출되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뒤 팀장의 자리로 간다. 재떨이를 입에 물고 말하는 건가 싶을 정도의 담배 쩐 냄새가 주변을 감싼다. 머리가 핑 돌기 시작한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손을 공손히 하고 말한다.


"네, 팀장님"

"이거... 왜 이렇게 개발됐어? 바꾸자"


다음 주는 서비스 오픈일이다. QA(Quality Assurance) Test가 곧 마무리되는 시점인데 서비스랑 전혀 연관 없는 것으로 또 딴지를 걸기 시작한다. 한 차례 참아내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팀장님, 이거 전에 이렇게 가자고 말씀하셔서..."

"그건 그때고, 난 지금 맘에 안 들어"

"그럼, 오픈하고 개선하면 어떨까요?"

"김대리, 지금 내 말 안 들려? 바꾸라고"


다음 주면 오픈인데... 다 같이 불철주야 개고생하면서 겨우 테스트를 마무리하는 중인데 지금 와서 대충 훑어보고 또 바꾸자고? 미친 거 아니야 진짜??? 김치찌개 끓이는데 흩어진 참치 다 걷어내고 스팸으로 바꾸자는 거랑 같은 논리다. 본인 취향에 맞지 않으니 당장 바꾸라는 뜻. 서비스 본질에서 문제가 있다면 작업이 많아도 바꾸겠지만 그냥 고집이었다. 확인해보겠다고 자리로 돌아와서 한숨을 쉰다. 메신저가 깜빡이는 게 보여 확인을 한다. 개발팀이다. "김대리님, 괜찮아요? 또 뭐가 불만이래요?" 바꾸는 게 취미인 팀장의 말을 들은 개발팀 과장님이 말을 건넨다. 팀장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달했더니 저만치 개발팀에서 큰 한숨소리가 들린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팀장 아래에서 일하면 늘 있는 일이다.  


팀장 전화벨이 울린다. 수신번호를 보고 표정이 한껏 찌그러져 미간은 있는 대로 모으고 한숨을 엄청 크게 내쉬더니,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갑자기 미친사람처럼 씨익 웃고는 전화를 받으며 나간다. "아이고, 황대표님~ 바쁘신데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안 그래도 연락을..." 어안이 벙벙하다. 당장이라도 육두문자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았는데, 세상 불만 다 쏟아낼 것 같은 표정을 했었는데 저런 말투가 곧바로 나온다는 게 정말 미친 건가 싶었다. 그때는 대단했다는 느낌보다는 재수없었다는 느낌이 강했다. 앞뒤가 다른 인간이라고, 저런 인간은 주변에 친구도 없을 거라고.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고 여러 사건들을 겪어보니 어느 순간 내가 그 모습을 배웠더라. 화나고 짜증 나고 괴로운 순간에도 억지로라도 웃어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끔은 미친사람 소리를 들어야 일이 풀릴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최악의 팀장으로 남아있지만, 나는 그에게서 '최악의 상황을 대처하는 처세술'을 배웠던 것이다.


거짓 미소와 친절함이 가져다주는 긍정적 효과를 많이 경험했다. 그 대상은 상대일 수도 있고, 우리의 갑질 대상자일 수도 있다.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면, 거짓일지라도 끝까지 친절함을 잃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결과로 조금 더 이끌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이 상황은 도저히 못 참겠다 싶을 때, 한 번 미친사람이 되어 미소를 지어보자.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저 세상에 갈 준비가 됐다는데 라고 오해할 정도로, 스마일-



잘하는 게 하나는 있어야 한다.


집에서 육아를 하다 보면 정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의 아들의 단골 문장이 두 개 있다.


"엄마, 이리 와 봐"

"엄마, 그게 뭔데?"


두 번째 문장을 당당하게 말하는 연구실 소장이 있었다. - 성이 워낙 독특해서, 편의상 '박소장' 정도로 하겠다 - 박소장은 우리 업계에 대한 이해가 아예 없었다. 대표님의 지인이었고, 박사학위가 있다는 이유로 고액 연봉을 들여 '모셔온'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온갖 학술지와 영어 원서를 보고 약간 위축되고 쫄아있었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이 자식은 회사에 왜 왔지?라는 생각이 가득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아이폰3G가 이제 막 국내에 도입되어 너도 나도 앱을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때였다. 지금은 앱 하나 만들려면 솔루션이나 오픈소스가 잘 되어 있어서 뚝딱뚝딱 만들 수 있지만 당시 앱 하나를 만들기 위해 많은 인력들이 투입되었다. 하루는 신규 앱 서비스에 대한 결정을 하는 자리였다. 사용자 A/B 테스트를 거쳐 결정된 안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정말 이상한 구간이 없는지 다 같이 결정하는 자리였다. 내 사수였던 윤과장님이 서비스에 대한 목적부터 어떻게 개발을 해서 타겟은 누구다 라고 컨셉을 설명을 하는 자리였는데 박소장이 묻는다.


"앱? 그게 뭔데?"

(...??????...)


정말 약 1분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윤과장님은 참다 참다 못 참았는지 얼굴이 빨개졌고 한숨을 엄청 크게 내쉬더니 물 좀 가져오겠다고 나간다. 내가 대신 소리쳐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말한 거!!

우리 회사가 지금 만든 거!!!

이 똥멍청이 자식아!!!!!


진심으로 저 멍청한놈은 여기 왜 있는 거지 싶었다. 당시 신입사원인 나도 이렇게 화가 났는데 윤과장님은 어떻게 참아내지 싶었다. 과장님은 분명 절에 가서 수련을 받는 걸 거야. 냉수를 원샷하고 온 윤과장님이 돌아와서 차분히 다시 설명을 했다. 그제야 박소장은 "아~하"라는 말 같지도 않은 추임새 따위를 넣고 난 모르겠으니 너희가 알아서 결정하라며 나가버렸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펜과 들고 있던 스토리보드를 책상에 던졌다.


얼마 후 GPS를 활용한 위치기반 서비스(LBS) 앱을 출시하고자 아이디어 회의를 하는 자리였다. 대표님도 참석을 하는 자리여서 그런가 또 박소장이 참석을 했다. 도움이 1도 안 될 사람이라 전혀 생각 않고 있을 때 갑자기 박소장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 원서를 갖고 와서는 비슷한 사례를 좀 살펴봤다며 지금의 회의랑 관계없는 사례들을 예시로 든다. 대표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저 얘기가 지금 왜 나오는 거야? 하는 표정을 한다. 말 같지도 않은 사례들이 막을 내릴 때쯤, 대표님이 급한일이 생겼다며 나갔다.


운영기획팀 최과장님이 필요한 운영 툴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다들 끄덕일 때쯤 박소장이 묻는다.


"GPS? 그게 뭔데?"

그래 모를 수도 있지 생각했다. 그런데 또 묻는다.


"근데... 이 회의는 왜 하는 건데?"

아이디어 내는 회의!!!! 인마!!!!!!


대표님한테 예쁨만 받으려고 하지 회의에는 정작 아무 관심이 없었던 거다. 모두가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쯤, 대표님이 갑자기 다시 들어온다. 그러더니 이내 자세를 다시 잡고 말을 한다. "대표님, 저희가 GPS를 활용해서 위치기반 서비스를 만들려고 이 자리를 마련했는데, 대표님께서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 주시면 힘이 될 것 같아요." 뭐지..? 저 대단한 뻔뻔함은?


대표님 아이디어가 곧 회사의 방향인 이 가'족'같은 회사에서 서비스의 방향이 결정되었고, 대표님은 아이디어를 내달라고 제안했던 박소장을 PM으로 앉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는 실질적으로 윤과장님이 PM역할을 도맡아 했고 우리는 윤과장님 지시 하에 열심히 일을 했다. 그리고 서비스 론칭이 있기 1주일 전, 언론 홍보를 위해 기자가 회사에 인터뷰를 하러 왔다. 박소장은 말이 PM이지 실제 업무는 윤과장님이 도맡아 했기 때문에 인터뷰는 당연히 윤과장님이 들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박소장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과장님! 박소장님이 들어가면 설명을 못할.."

"냅둬, 이름 알리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야"


인터뷰가 30분 만에 끝이 나고 기자와 아주 밝은 모습으로 헤어지고는 윤과장님께 명함을 주며 말을 건넨다. "윤과장, 서비스 소개 문서 기자한테 보내고 요약해서 설명 좀 같이 보내줘" 그랬다. 서비스 설명은 안 하고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 우리 회사의 주요 서비스를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말하고는 인터뷰를 끝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능력이었다. 그렇게 끝낸 인터뷰를 통해 나온 기사는 내용만 봐서는 성장 가능성이 높은 회사에서 나온 올 해의 주력 서비스 같은 느낌이었다. 박소장의 기깔나는 포장지와 윤과장님의 문서와 요약본 덕분에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기사가 나온 것이다.


현실은 시궁창이어도 위 사례와 같이 멋진 포장지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실제 그 서비스는 포장 덕분에 잠시지만 앱다운로드 수 5위 안에 들었고 서비스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들을 고객들이 접수해주었다. 서비스를 기획하다 보면 내부자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느 정도 기반은 내부자들이 마련해야겠지만, 서비스에 대한 업그레이드는 실제 시장에서의 고객의 소리에서 찾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똥멍청이가 현명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됐다.


박소장은 모르는 건 정말 레알 모른다고 하고, 잘하는 부분에서 본인이 가진 힘을 발휘한 거다. 그 누구보다 '그럴듯한' 포장을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똥멍청이에게 정말 '잘하는 거 하나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 대신 하나만 가질 거면 정말 누구보다 잘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적당히 잘하는 하나만 바라보다가는 진짜 똥멍청이가 된다.





지랄도 배워두면 쓸모가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불합리하고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은 인간들이 있다. 흔히 회사에 이상한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내가 이상한 인간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 '이상한 인간'들에게도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면 배울 점은 반드시 있다.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정말 이 자식 하고는 일 도저히 못하겠다 싶을 때는 하나라도 찾아보자. 그 자식의 배울 점을.


말 같지 않은 소리만 하는 사람을 보며 '말은 바로 해야 한다'를 배울 수도 있고, 하다못해 지랄하는 것도 배워두면 쓸모가 있다. 인간다운 인간들만 있는 곳이었다면 애초에 회사생활이 어려울 일이 없지 않겠나. 안 그래도 어려운 회사생활을 조금 더 마음 편히 지내고 싶다면, 이런 곳에서 잘 살아남고 싶다면 무엇이든 우선 배우고 보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딱히 별다른 자기 계발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하면 멘탈 관리에도 좋고 가끔 덕분에 인정을 받기도 한다.


배울 것 없어 보이는 곳에서 잘 배워보기, 나름대로 회사생활을 잘할 수 있게 해 준 첫 번째 나의 방법이다.

10년이 지난 오늘의 출근길에서, 또 누구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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