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선택 하시길
입사한 지 벌써 곧 일 년이다. 시간 정말 빠르다. 그 사이 많은 사람이 퇴사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채워졌다. 적응을 할 쯤되면 사람이 바뀌고, 다시 적응할 때쯤 되면 새로운 일들이 가득했다.
이전 스타트업에 비해 체감상 약 10배는 많아진 회식과 매일매일 출퇴근하는 물리적 체감으로 피곤이 누적된 것 같다가도 집에 가자마자 뻗어버리는 마법 덕분인지 바지런해진 느낌은 든다. (좋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얼마 전, 대기업 다녀서 좋겠다는 후배의 말과 그 회사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이전 직장 동료의 말을 들었다. 대기업이 정말 오고 싶은 사람이 이토록 많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구에게는 이곳이 생각보다 좋게 느껴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느낄까.
물론 아래 내용은 IT관련 직군에 한하여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 타 직군은 내가 알기 어려워 고려하지 않겠다.
주로 리더십이 강한 사람들. 이루고 싶은 것도, 이룬 뒤 성취감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대기업은 지옥 같은 곳이다. 여러 기능이 잘게 쪼개진 부품 같은 직무와 그 기능 사이사이 기름칠을 해주는 직무를 가진 사람들이 멈추지 않도록 하는 곳. 내가 부품도 생산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기름칠도 하고 싶다면 오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어느 쪽으로든 약간이라도 기울여 관심 갖기 시작하면 월권취급 당한다.
더불어 유연근무, 오픈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한 사람들 즉, 자유로운 사고와 의견 개진이 중요한 사람은 감당하기 어려운 속 터지는 갑갑함이 있을 거다. 작은 개선 하나도 윗선 보고가 필수이고, 컨펌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배포했다간 난리가 난다. 위계상 내 상사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금기처럼 여겨진다. 모든 의사결정은 ‘안전’이 기반이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고 시도하는 순간 전략실, 보안, 법무, 재무, 회계 등 말도 안 되게 많은 팀의 질문 공격을 받아내야 한다. 가능?
주로 팔로워십이 강한 사람들. 주어진 일을 책임감 있게 끝까지 이끌고 딜리버리 하는 것이 익숙하고 그게 좋은 사람들이 있다. 부품이 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화합을 이루고 기름칠당하는 것을 차례대로 기다리며 잘 굴러가는 것에서 안정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대기업은 더할 나위 없이 참 좋다. 본인의 일을 상부의 의견과 대립되지 않게 착실하게 묵묵히 수행한다면 크게 이슈 될 일이 없다. 이런 경우 대체로 평가도 좋다.
스타트업으로 처음 가게 되면 생기는 의문이 이렇게 체계가 없어도 일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다. 그 문화에 적응을 했다면 그 어디보다 좋은 환경이지만 바텀업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탄탄한 체계가 훨씬 일하기 좋은 환경이라 생각할 수 있다. 대기업은 본인의 업무 외 모든 업무는 체계화되어 있고 내 손을 떠나면 그들이 알아서 한다. 일의 체계나 R&R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대기업은 최적의 업무 환경이 될 것이다.
얼마 전 링크드인을 통해 우리 회사에 지원하고 싶다고 한 주니어 친구가 있었다. 본인이 일에 대한 가치에 고민이 있는 사람이라면 회사 이름에 현혹되지 말고 스스로 좀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해보길 권장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 메시지를 받고 주니어면 성장에 욕심이 더 있어야 되는 게 아닌가? 했지만 생각해 보니 나도 주니어시절 막연하게 대기업을 꿈꿔왔던 것 같다. 그럼 연차별로 대기업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 보자.
주로 1~3년 차 사이.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습득해야 할 시기. 대기업에 오게 되면 위계, 결재, 품의, 예산 등 수많은 부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조직의 거대한 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다. 좋은 복지와 회사 이름만으로 행복해하는 가족들의 총애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
만약 내가 일을 하는 데 있어 딱히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판이 중요한 가치인 사람은 대기업이 딱 좋다. 구성원만의 혜택, 회사 연계 호텔 할인 등 대기업의 탄탄한 재무에서만 가능한 꿀 같은 복지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일에 뜻이 있고 커리어 측면에서 더 깊이 있는 배움이 필요하다면 대기업은 알맞지 않다. 원하는 만큼 배우기 힘들고 그만큼 성장에 욕심 있는 좋은 롤모델도 찾기 어렵다. (정치에 욕심 있는 사람은 많다.)
대기업을 다니며 외부활동을 하면 인적 네트워킹이야 조금 나아지겠지만 외부 활동이 내 커리어의 깊이를 책임져줄 수 없다. 전문성은 일을 직접 수행하고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며 쌓인다. 많은 지식과 주변에 유명인이 많다고 나의 전문성이 쌓이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당장 내 눈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냥 일을 못하는 거고 전문성이 없는 거다. 주니어 시절에는 그 문제 해결력을 일을 통해 배워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네트워크도 자연스레 형성된다.
4~10년 차 정도. 4년 차는 이제 막 주니어 티를 벗어난 수준이겠지만 암튼 중니어부터는 전문성이 어느 정도 쌓였을 터라 선택의 문제가 된다. 만약 기혼인 사람들은 가정의 안위와 재무적 탄탄함을 위해 대기업을 오는 경우가 많은데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문성이 어느 정도 쌓인 경우 회사의 간택을 바라기보다 내가 회사를 선택해서 갈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 생긴다.
이것을 증명해 보기 위해서는 링크드인, 원티드, 리멤버에 이력서를 올려두고 공개를 해보면 된다. 나의 이력과 적당한 연차가 얼마나 잘 팔리는(?) 시기인지 몸소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커리어 관리를 잘해서 이력서 텍스트 만으로도 경험이 고스란히 묻어난다면 인사팀이 아닌 인재가 필요한 팀에서 직접 연락이 올 수도 있다.
때문에 여기서는 내 성장 의지에 따라 달라진다. 적절히 쌓인 경력으로 누가 봐도 안정적인 곳에서 편하게 지내볼 건지, 좀 더 전투적인 곳으로 가서 아직 더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를 채워볼 건지. 뭐가 좋고 나쁜 건 없다. 대기업을 꼭 한 번 경험해 보고 싶다면 이 시기가 가장 좋다. 경험해 보고 아니다 싶어 빠져나온다 해도 크게 타격이 없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는 커리어 패스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커리어의 황금기이며 K직장인으로 살 거면 자신의 성장 모멘텀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커리어는 길게 봐야 된다. 이 중요한 시기에 내 커리어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좋은 선택을 하길 바란다.
10년 차 이상. 시니어도 선택의 문제가 맞지만 미들급의 커리어 설계와 달리 여기서부턴 인생의 갈림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으로 한 번 들어가는 순간, 다음 목표가 어느 정도 정해진 답안 안에서 선택해야 되기 때문이다.
10년 차가 넘으면 안타깝게도 원하는 회사가 그리 많지 않다. 연차도 많고 경험도 많으면 어디서든 두 팔 벌려 환영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미들급에 비해 소위 단가가 세고 고집도 완강해서 시니어 잘못 들였다가 망하는 회사가 한 둘이 아니기에 채용하는 입장에서도 쉽사리 들이지 못하는 게 시니어다. 정말 마음이 아프다. (내게 다음 회사란 아마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려온다..ㅠㅠ)
이런 경우는 인생을 걸고 어찌 보면 도박을 해야 된다. 일단 이 경험이 인정되어 시니어로 대기업으로 들어가면 실무를 적당히 하다 보면 팀장이 되는 게 수순인데, 대기업은 시니어가 정말 많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여기서 경쟁이 시작된다. 팀장을 달지 못하면 드라마에서나 보던 만년 차장이 되는 거다. 물론 그렇다고 자르진 않는다. 적당히 일하면서 편한 노후를 맞이하기에 이만한 것도 없다.
허나, 대기업 가는 이유 중 하나가 돈 아니던가. 인센티브는 주로 직급에 따라 상이하고 높을수록 책임이 많아져 더 많이 쳐준다. 그래서 팀장을 달면 달콤한 금전적 이득이 생긴다. 그러나 팀장이 되는 순간 또 여기서 갈림길에 봉착한다. 현재 재직 중인 대기업 임원까지 노려볼 것인가 약간 작더라도 성장하는 스타트업의 C레벨을 경험할 것인가. C레벨로 가서 회사를 성장시켜 대박이 터지면 대기업 임원의 급여쯤이야 껌값이 된다. 문제는 그게 결코 쉽지 않은 것뿐.
시니어부터는 커리어 설계가 아닌 우리 가족과 함께 내가 어떻게 앞으로를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심도 있는 설계를 해야 될 때다. 인생의 갈림길이라 칭한 이유다. 물론 단순히 가족만을 위해 고민하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미래가 대기업 임원인가, 금전적 자유인가, 아님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기업을 궁금해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하나요. 연줄이 있어야 하나요. 스펙이 좋아야 하나요. 영어로 프리토킹 가능해야 하나요. 제2 외국어 필요한가요 등... 공채라면 이 모든 것이 고려되어 뽑히겠지만 경력직은 다르다. 경력직은 그런 거 다 없어도 ‘전문성’으로 채용된다.
대기업도 그냥 세분화된 거대한 시스템을 움직이는 하나의 회사일뿐이다. 돈 버는데 필요한 사람을 뽑아야 그들도 이득이다. 그렇기에 대기업도 사람을 그냥 기다리지만은 않고 대학 좋다고 스펙 좋다고 무조건 채용하지도 않는다. 예전이야 특화된 복지나 인센이 대기업의 큰 매력으로 작용했으나 지금은 잘 갖춰진 회사도 너무나 많아서 인재는 직접 손수 찾아다녀야만 한다.
그러니 위 이야기를 잘 참고해서 내가 대기업에 왜 가고 싶은지, 대기업에 가면 난 인정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려하고 대기업의 문을 건넜으면 좋겠다. 면접 때는 그렇게 오고 싶다고 해서 뽑아두면 내가 예상했던 회사 생활이 아니라며 3개월도 못 채우고 나갈 때가 있다. 그만큼 곤란한 상황도 없다. 따라서 대기업에 올 때는 내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메타인지를 꼭 거친 뒤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