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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Jul 24. 2024

열정의 고갈은 ‘나태’일까?

열정이 식어가는 시니어에게

우리 팀에는 입사한지 얼마 안 된 패기넘치는 팀원이 있다. 열정도 대단하고 하고 싶은건 또 얼마나 많은지, 내가 못하게 막는가 싶어 미안할 정도로 불타오르는 성향을 가진 친구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싶다가도 한 편으로 나도 그랬지 참, 하고 미소짓고 넘긴다.


아니, 막말로 반백살도 아직 안됐는데 왜 이렇게 뭘 나서서 하는게 귀찮은지 모르겠다. 이렇게 꼰대의 길로 들어가는건가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일이 싫어진 것도 아니다. 일을 여전히 좋아하지만 더 이상의 성장 욕구가 없어진 것 같은 기분이랄까.


15년 간 한 가지 직무로 살았다. 작디 작은 웹 에이전시의 웹 기획자로 시작해서 자사 서비스를 살리려고 애쓰는 SI업체의 서비스 기획자, 스타트업의 PO를 겪고 대기업 인하우스 PM까지. 직무 타이틀은 제각각 다르지만 ’기획‘이라는 업무로 오롯이 한 길을 걸어왔다.


암만 좋아하는 음식도 15년 간 먹으면 질리게 마련인데 딱히 일이라고 안그럴까. 일이 크게 질린것은 아니지만 이제 ‘더 잘하려는 노력’을 딱히 안하는 것 같다. 이전에는 그 마음이라도 있어서 일하는게 재미도 의미도 있고 가치가 있다고 느꼈던거 같은데 이제 글쎄, 잘 모르겠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하나는 굳이 지금 열심히 해봤자 큰 변화가 없을거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냥 일시적인 권태기 같은것. 막연하게 전자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열정이 고갈됐구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갑자스레 걱정이 된다. 똑똑한 인공지는 부사수 GPT가 나를 돕기 시작했고 반짝반짝한 아이디어가 있는 열정 넘치는 친구들에게 뒤쳐지다 보면 나도 이제 진짜 곧 뒷방 늙은이가 되겠구나 싶어서 겁부터 덜컥 난다.


그렇다고 열정이라는게 생기거라 한다고 짠 생기는게 아니다보니 걱정은 더 깊어진다. 이전에 기획자가 하려는 의지와 열정이 있다면 득이된다는 글을 적었었는데, 내가 쓴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나의 지금은 아무 의지도 열의도 없어보인다. 일에서 성취를 찾고 회사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싶었던 시절이 분명 나도 있었는데 말이다.


요즘 채용 때문에 링크드인을 자주보는데 많은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도 산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도 뭘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네트워킹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사이트를 공유한다. 신기술을 리뷰하고 리더가 갖춰야 할 리더십을 알린다. 나는 가끔 글쓰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주기적으로 거의 매일을 올리는 분들도 계시다. 진심 대단하다고 느낀다.


그래서인지 링크드인도 결국 열정이, 재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거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됐다. 이 세상에는 나처럼 할 줄 아는게 특출나지 않은 사람들이 설 곳이 점점 줄어든다는 마음은 또 불안해진다. 이러다간 가정을 지키지 못하면 어쩌지, 이렇게 넋놓고 ‘나태하게’ 살면 안될 것 같은데!!! 라며.


그러다, 문득 출근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잠깐만, 열정이 좀 고갈됐다고 내가 나태한건가?


진지하게 깊게 생각을 해봤다. 열정이 있었던 시절과 현재의 나는 어떻게 다른지, 정말 나태지옥으로 떨어질만큼 한량처럼 살고있는지 말이다. 아침 7:05분 칼같이 일어나 씻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가서 미친 미팅을 마치면 일을 시작해서 적당히 정리한 뒤 집으로 복귀하고 약 7시간의 잠을 청한 뒤 다시 출근. 이 같은 패턴을 1주일에 5일, 일상의 약 70%를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 뭐어??? 내가 나태하다고??


인정할 수 없어서 적당한 핑계를 찾고 싶었다. 나는 나태한게 아니라 ㅇㅇㅇ 하다는 것을. 그래서 며칠동안 퇴근길에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한참을 생각에 잠겨 보냈다. 예전만큼 모든 시간을 쪼개가며 나를 단련시키고 더 잘해야 된다고 질책하며 항상 낮은 자세로 배우려던 그 시절과 지금이 다른 것은 무엇일까.


하나씩 곰곰이 씹어보니 이렇게 달라졌더라. 단련하고 싶은 누군가를 돕고 있고, 더 잘해야 된다고 스스로 질책하는 후배를 이미 잘하고 있다고 격려하고, 하나라도 배우려는 후배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하는 것. 스스로 하나라도 역량을 키우고자 찾아 나서던 것을 누군가 찾아오는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 굳이 내가 열정을 찾아 다니기 보다 그 열정을 함께 키워주려는 것.


그렇다. 핑계처럼 들릴지 몰라도 나태한게 아니라 예전에 비해 조금 ‘노련해’졌을 뿐이다. 특별히 잘하는게 없으니 갖고 있는 역량 하나라도 더 깊이있게 다듬어 좋은 선배가 되려는 것 뿐, 이제 막 파릇파릇한 움튼 새싹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정성을 다해 물을 주고 햇빛을 쬐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것을 다시 습득해서 대단한 역량을 키우려는 노력이 조금 ‘덜’해진 것 뿐이다.


TV, OTT, Youtube, Facebook에 링띤까지 굉장하고 대단한 사람들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지고 나는 정말 하등한 인간, 왜이렇게 나태하게 살고있나 싶어 나를 몰아세우곤 했다. 나같은 사람이 분명 한 명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낙심하지 말았으면. 그들은 그렇게 대단하니 그렇게 외부에 노출되는 거고(연예인이라 생각하면 편해진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길을 차분히 내게 맞게 갈고 닦아가면 그만이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면 위로가 안되겠지만...


물론 애써 나태한게 아니라 노련한거라고 마음 먹기가 쉽지는 않다. 한 번 불타는 열정을 씨게 불태웠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이 나태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열정들이 한 번 크게 불타올랐으니, 이제 남겨진 불씨로 누군가를 따뜻하게 데워줄 차례인 것일 뿐이다.


곧 입사 1년이 된다. 그리 풍족하진 않지만 곧 15년치 퇴직금이 쌓인다. 퇴직금만큼이나 차곡차곡 쌓인 나의 노련함을 열정이 조금 고갈됐다는 이유로 스스로 나태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나를 비롯한 우직하게 긴 시간 열정을 태웠던 모든 시니어들에게 부족한 내 글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쑥쑥 자라나는 후배들에게 좋은 토양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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