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력이 두려운 당신에게
지난 3월, 브런치 서랍에 '1년만 버틴다'라는 글을 쓰다가 만 흔적이 있다. 1년을 더 버티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은 사이닝 보너스를 반납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1년 X개월로 표기된 커리어상 내 이력이 싫었던 것도 있다. 프로 이직러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주니어 시절, 나는 일에 대한 욕심이 있다 보니 더 좋은 환경, 더 일해보고 싶은 회사, 더 꼭 맞는 업무로의 이직을 자주 하는 편이었다. 운이 좋게 원하는 곳에 이직을 잘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1년 전후로 이직을 자주 하다 보니 매 면접마다 퇴사한 이유를 하나씩 설명해야 했고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는 '프로 이직러'라는 딱지가 붙게 됐다. '이직이 목적은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에 조금은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흘러 면접관이 되어보니 나처럼 1년 X개월의 경력이 촘촘히 나열된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런데 나도 그렇게 꿈을 찾아 이직을 해왔으면서 막상 면접관이 되니 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 하는 순간에도 쉽게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끈기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나 역시 끈기가 없어 보이는 사람으로 커리어 한 줄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2년이라는 기준선을 마련했던 것 같다. 모든 회사는 이력서라는 문서 하나와 짧디 짧은 면접만으로 나를 평가하니까, 평생 회사원으로 살고 싶은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현 회사가 나와 리더의 결이 맞지 않는 것뿐이지 회사의 환경은 대부분 만족스럽다. 처우도 나쁘지 않고 업무 환경도 괜찮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참 좋다. 그래서 솔직히 일을 루팡처럼 하면서 그냥저냥 버텨보기에 그리 큰 어려움은 아니다. 도망치듯 떠나고 싶을 정도로 최악인 상황은 아니니 2년 정도 쉽게 버틸 줄 알았다.
그런데, 퇴사를 한다.
1년 7개월 커리어가 한 줄 늘었다.
결정을 하기까지 수많은 고민이 동반됐다. 가장 먼저 현재의 이 안락한 환경을 내가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쌓아온 노력을 다시 처음부터 쌓으러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2년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좀 더 버티고 다시 새로 시작하자 라는 생각에 계속 결정을 미루고 미뤘다.
그러다 문득 이전 회사의 내가 떠올랐다. 정말 '대접'받으며 일을 했던 곳인데 내가 왜 퇴사를 했었지? 돌이켜 보니 '나의 일'에 대한 고민스러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는 내가 하는 일에 ’ 재미‘를 느껴야 한다. 팀장이 되면서 일을 직접적으로 하기보다 사람 관리가 주 업무가 됐고 일의 재미는 점점 잊혀갔다. 내 손으로 기획하며 만들어가는 즐거움에 대한 갈증이 컸다.
그렇게 새로운 회사를 와서 나의 기획 일은 되찾았는데 그 일에 지금 '재미'가 빠졌다. 처음에는 모든 게 새로운 환경이다 보니 배우고 채우는 게 너무 재밌었다. 그때까지는 이미 회사에 오래전부터 일해온 기존 동료가 상사를 커버했고, 나는 내 할 일만 재밌게 했으면 됐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만족도가 꽤 높게 지내왔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동료가 떠난 것을 시작으로 다른 동료들 까지 줄줄이 떠나면서 결국 상사와 가장 많이 부딪히는 사람은 내가 되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재밌게 해야 할 나의 일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고, 상대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에게 쓰는 감정노동의 시간이 너무 많이 허비되는 것을 느꼈다. 결국 팀장시절 매니징과 비슷한 심리적 피로감이 생겼다. 심지어 지금은 팀장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피로감에 대해 나는 내 상사보다 위의 직급, 그러니까 본부장 급의 리더에게 면담을 여러 차례 했다. 그 리더는 당시에는 내 심정에 대해 진지하게 들어주고 변화를 줄 것 같은 기대를 주었었다. 그러나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냥 일시적인 하소연, 고민상담 수준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나중엔 조금 강하게 팀을 바꿔달라는 제안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하는 일 자체가 현재 내가 소속된 곳에서 일을 해야 합리적이기 때문에 이동하는 것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지금 하는 일을 버리고 가겠냐는 질문에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안 맞는 건데 왜 일을 바꿔야 하지?라는 생각에 팀 이동은 포기를 하게 됐었다.
그렇게 약 1년 정도는 어떻게 지내왔는데 순간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되더라. 아니, 이게 맞나?
그래서 그때부터 커피챗과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회사의 리더를 만나보기로 했다. 지금 내가 하는 고민들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눴고 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은지 파고들었다. 그렇게 2년이 몇 개월 남지 않은 시점,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고 다시 재미를 느낄만한 일과 비전을 가진 리더를 따라가보기로 했다.
물론 이것도 가봐야 안다. 가보니 아닐 수도 있다. 근데 어쩌겠는가? 안 가보면 평생 알 수 없는걸. 타인의 주관도 잡플래닛, 블라인드 같은 여론의 평가도 내 기준과 꼭 같을 수 없기에 가서 해봐야 안다. 그렇게 또 약간씩 어긋나는 도전들을 마주하고 하나씩 미션을 클리어해보는 방법 외에 그 회사가 좋은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든 기회에는 불확실성이 있다. 그렇기에 현재 나의 상황과 기회를 잡았을 때를 비교하게 마련이고 그 비교는 당연하다. 나 역시 새로운 기회가 다가올 때마다 현재와 비교를 했었고, 마침내 그 비교가 새로운 곳이 더 나은 환경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혹시나 사람에 대한 감정선이 상해서일까 오해를 할까 봐 하는 말인데 내 상사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선하고 착한 사람에 가깝다. 그러나, 나는 동료면 몰라도 나의 상사로 있는 사람은 그러니까 내 '리더'는 이래서는 안 된다. 단순히 동료와 맞지 않는 건 내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을 더 하고 싶고, 더 재밌게 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리더가 필요하다.
어떤 환경이 나에게 안 맞는 경우, 거기에 맞추려고 하는 것보다 새로운 환경을 찾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회사원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한기용 멘토의 영상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혹시 안 보신 분들은 꼭 한 번 영상을 보면 좋겠다.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도움이 많이 된다.)
물론, 새로운 환경을 찾기 전에 리더와 나의 관계를 개선해 보려는 노력은 반드시 해봐야 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말을 건네면 가볍게 해결될 일도 해결하지 못한 채 아쉽게 떠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도를 수차례 했음에도 변함이 없다면 무조건 버틸 필요는 없다. 이력서에 1년 X개월 회사명 이 한 줄 추가되는 것은 싫지만 내가 더 즐겁게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환경이 있다면 떠나는 게 맞다. 이력서 상에서는 끈기 없어 보일지언정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다면 그걸로 됐다.
커리어를 쌓아가는 하루하루는 매우 귀하고, 특히 시니어에게는 맞지 않는 것을 버텨가며 일하기엔 시간이 낭비되는 느낌이다. 매일 재밌게 일하기에도 남은 회사생활 빠듯하다.
매일을 버티며 고통받고 자신감 잃어가며 무능해지기보다는 더 나은 환경에서 좋은 성과를 내면서 지내보자. 물론 거기도 결국 어려운 상황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내 선택이니까 다시 방법을 찾으면 된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해서 아무런 행동하지 않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으련다.
미래의 나에게 '회사 잘 선택했다'는 말을 과거의 내게 건넬 수 있도록, 근사한 넥스트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