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하 Sep 20. 2023

취하지 마라

곧 40세를 맞이하며

곧 내 나이 40세가 다가온다. 두렵다. 그동안 해둔 게 없어서, 모아둔 돈이 없어서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냥 두려운 거다. 인간으로 태어나 반 정도의 삶을 벌써 살아버렸고, 이제 반 정도밖에 안 남았다는 그 느낌이 너무나 무게감 있고 어떻게 살면 좋을지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사실 그냥 뭘 어떻게 살려고 고민을 해, 흘러가는 대로 살면 되지 생각할 수 있다. 틀린 말도 아니다. 그냥 살면 되지 뭐, 인생 뭐 별 거 있나?


그럼에도 40이 주는 무게감은 조금도 가볍지 않다. 한 때는 불혹이라 불리던 사십. 어린 시절, 밤이 되면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는 씻고 흰 난닝구에 담배를 재떨이에 수북이 쌓으며 신문 보는 것이 루틴이던, 그 아빠의 모습이 40세쯤 됐겠지.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되었다. 홀로 외로이 고군분투하는 아빠의 그 모습이, 이제 퇴근하고 씻고 나와서 캔맥주를 따는 가장의 모습으로 내 아이의 눈에 비쳤으렷다.


그래도 이제 인생의 반 정도를 살아본 덕분일까 딱 하나, 인생의 정답을 알게 된 것이 있다. 시간이 가면서 더더욱 굳어지는, 평생을 죽기 전까지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 그건 바로 취하지 않는 것이다.

살다 보니 취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한 둘이 아니다. 이런 순간순간을 꾹 참고 감내하는 것, 견딤을 통해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앞으로 죽기 전까지 해내야 할 미션이 아닐까 싶다. 특히 아래 3개만큼은 평생 조심하며 인생의 액션아이템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


취한다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술을 먼저 얘기해 볼까. 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술과 열애에 빠졌었다. 나를 특별히 사랑하다가도 어느 날 갑작스레 이별을 고하고, 또 어느 날은 어깨를 토닥여주며 위로를 해주기도 했다. 기쁘면 기뻐서, 슬프면 슬퍼서 나의 희로애락을 언제나 옆에서 내 인생을 고스란히 반영해 주는 친구이자 애인 같은 존재였다.


사실 술은 취해야 제맛이다. 어릴 땐 특히 그랬다. 영롱한 초록병에 담긴, 냄새부터 코 찡한 소주에 지글 보글 끓는 감자탕, 육두문자가 입 끝까지 마중 나와 서로를 헐뜯어도 그냥 재밌는 내 친구들과 함께라면 취해야 맞았다. 얼큰하게 적셔 취한 서로가 서로의 등을 두들기고 전 날의 진상을 회상하며 이불킥을 하던 그때의 나는, 취하는 게 정답이었다.


그러나 이제 달라져야 한다. 모든 사건사고는 술로부터 벌어진다.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은 스스로를 가장 빠르게 포기할 수 있는 방법이다. 내 인생 조져버릴 거야 싶으면 이 선택을 해도 좋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 거 잘 살아봐야겠다 싶다면 술에 취하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물론.. 잘 안된다.)


적절히 알딸딸하고 씁쓸한 기분을 즐기는 것, 술 자체보다 사람과의 대화, 밖의 풍경을 즐기는 것. 그것이 40살을 맞이하는 내게 주어진 미션이 돼버렸다. 나를 아는 모두가 알 것이다. 이 미션이 내게 얼마나 힘겹고 큰 미션인지 말이다.


사람

다음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본다. 한 때, 나는 특정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에게 취해있던 적이 있다. 어떤 일을 해도 칭찬을 받았고, 많은 사람이 나를 따르며 독보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던 찬란한 순간이 있었더랬다.


그렇게 칭찬만 듣던 어느 날 벼락같은 피드백을 듣게 되면 그 상처가 그렇게 크더라. 달콤한 사탕을 쪽쪽 빨아먹다가 생강이 한 움큼 갑자기 왈칵 씹어지는 기분이랄까. 눈물도 살짝 나고 기분이 은근하게 더러운 게 모든 상황을 객관성을 잃고 바라보게 돼버렸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취한 나는 기어코 자만을 넘어 교만이 되고 여유와 아량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이 되고 있었다.


칭찬이 그렇게 무섭다. 칭찬은 즐기되 경계해야 한다. 스스로가 어떤 위치이고 어떤 사람인지 파악을 평생 한 번이라도 또렷이 알아가고 싶다면 적절하게 칭찬을 받아들이는 연습도 분명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과하게 받을 때는 스스로 덜어내야 한다. 이 또한 어렵지만, 해내야 하고 다행히 나는 조금씩 연습이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사람에게 취하는 것도 얘기해 보자. 결혼 전에는 친구에게 연애 상대에게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 후에는 주로 나의 상사, 동료들에게 취하곤 했다. 그들이 내 인생의 전부처럼 느껴지고,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것이 싫어서 부단히 관계를 지켜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내 과몰입이 오히려 관계를 망치는 경험을 지속해서 가져다주었다.


경험 덕분에 깨닫게 된 진리는 상대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상대에 대한 과몰입은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논리를 나는 40 가까이 되어서야 나지막이 느끼게 됐다. 이제 나 또한 상대가 나를 전부처럼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해 약간의 거리를 둔다. 다행히도 수차례의 경험을 통해 이제 타인에게 취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가족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가족 또한 내가 아닌 또 다른 사람일 뿐인데, 태생이 피가 섞인 것에 대한 맹신을 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서인지 가족에 대한 애정이 가끔 과몰입을 만들어낸다. 가족에게 취하는 것은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매일의 내 컨디션에 가족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이 발생해서는 안된다.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나를 포함한 그 어떤 사람에게도 취하지 말 것, 그것이 두 번째 실행해야 할 미션이다.


마지막은 나에게 특히 술보다 사람보다 어려운 것, 일에 취하지 않는 것이다. 내게 붙는 많은 수식어 중 하나가 워커홀릭이다. 모두가 일이 많아서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난 그다지 불행하지 않다. 일이 없을 때보다는 많을 때가 더 좋고, 그 일을 해냈을 때의 성취감은 그 어떤 보상보다 강력하다.


일에 진심이 되면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일의 재미 덕분에 그냥 일을 했을 뿐인데 주변의 인정을 받기도 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기도 한다. 회사입장에서는 특히 ‘내 회사처럼 일하는 직원’ 덕분에 인력비가 절감되니 얼마나 예쁘겠는가. 덕분에 승승장구하며 직급 높은 자리를 꿰차기도 한다.


그럼에도 일중독은 많은 부작용을 가져온다. 가장 먼저 오는 부작용은 건강이다. 피부야 노화 때문에 점점 사막이 되어간다 해도 ‘낯빛’은 건강에 의해 좌우된다. 안타깝게도 일중독은 낯빛은 잿빛이 되고 어둑어둑한 오로라를 주변에 풍기게 한다. 거기에 툭하면 찌릿한 어깨결림과 딱히 힘든 상황도 아닌데 한시가 멀다 하고 나오는 깊은 한숨들. 일중독인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외모의 형상이다.


두 번째 부작용은 금단현상이다. 놀랍게도 일 중독인 사람들은 일을 놓는 순간부터 불안감이 생긴다. 이제 내가 뭘 해야 되는지, 어떻게 쉬는 건지 몰라 바보 같은 행동들을 한다. 가만히 누워서 낮잠 좀 청해도 되는데 깨어있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야 된다는 강박 때문에 집안 청소를 하거나 책이라도 꺼내 읽기 시작한다.


그래서 일중독인 사람들은 ‘주기적인’ 휴식이 매우 중요하다. 갑작스레 주어진 휴식은 생산성을 따지기 시작하지만 주기적인 휴식은 쉬는 것을 습관화 함으로써 일이 멈춰도 된다는 것을 학습시켜 준다. 일에 취해있다면 자주 잠시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휴식을 건네주는 것. 그렇게 일에 취한 스스로를 조금 꺼내주는 것이 마지막 인생의 미션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고 딱 3가지만 조심하면서 살자. 안되면 될 때까지 반복해서 40세를 맞이한 그 순간에는 약간이나마 성공률을 높일 수 있기를.


취하지 마라.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검은 양'은 무엇인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