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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림 Jun 25. 2020

살림 못하는 여자가 어때서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은 타고났어!

"니가 살림 못하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른데 그런 거 가지고 죄책감 절대 가질 필요 없어. 너는 니가 잘하는 것만 하면 돼. 그러니까 절대로 기죽지 마."


며칠 뒤인 내 생일을 맞아 직접 미역국과 반찬을 싸들고 집에 오기로 하신 시어머님이 혹시 특별히 더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따로 전화를 하셨다. 결혼 후 매년 내 생일마다 미역국과 반찬을 해서 보내주셨는데, 올해 우리가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는 직접 와서 축하해주고 싶다고 하셔서 초대를 드린 상태였다.  아들 생일은 그냥 넘어가시면서 며느리 생일을 항상 특별히 챙겨주시다니 매년 놀랍고 감동스럽다.


며느리로서, 혹은 아내로서 나는 마음 한 편의 죄책감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내가 살림에 서툰 것이 시어머님에게 부족하게 느껴지진 않을까, 아들 제대로 못 챙겨줄까 봐 걱정하진 않으실까(시어머니들이 다들 그렇다던데) 이상한 열등감이 알게 모르게 나를 괴롭혔다. 집에서는 남편과 집안일은 평등하게 해야 한다며 주방일은 남편이, 청소는 내가 하기로 당당하게 나눴으면서(사실 주방일이 훨씬 많기에 남편이 자주 억울해한다) 시댁에 가면 왠지 다른 며느리들처럼 내가 주방일에 더 능한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남녀평등의식 투철한 남편은 시댁에 가서 내가 움직여 일하는 경우가 없도록 먼저 움직여 자기가 해버리기에 결혼 몇 년 동안 시댁에 가서 설거지를 해본일도 딱히 없을 정도다.


그러다 두 달 전, 전원주택으로 이사 온 후 시부모님과 시누이 부부를 집들이에 초대했다. 아마 이때 나의 살림 실력이 제대로 뽀록났을 것이다(아니, 그전부터 이미 알고 계셨겠지). 남편이 주도적으로 음식을 다 만들고 나는 옆에서 보조하며 열심히 샐러드 양상추를 씻고 다듬었다. 남편이 너무 주도적이어서 내가 주도하는 척 조차 할 수 없었다. 식구들은 남편에게 음식 잘 먹었다고 인사를 했다. 남편 덕분에 화기애애하게 손님 대접은 잘했지만 가족들이 돌아가고 난 후,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여자로서 역할을 못하는 것만 같은 느낌, 그 알 수 없는 열등감과 죄책감은 누구에게 말하기도 애매한 것이었다. 배가 넘 불러서 방귀 뀌는 느낌인 건가 이게....


그런 애매한 죄책감 속에서 해마다 시부모님이 해주시는 미역국과 반찬까지 받자니 고마움을 넘어 부담스러운 감정까지 올라오고 있던 차였다.


"어머님,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돼요. 매년 너무 감사해요. 제가 맛있게 대접해드려야 하는데 항상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제가 부족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내 말에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첫 부분에 나온 문장이다. 그때 그 말이 어찌나 감사하던지, 난 왜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혼자 강박관념을 가졌을까. 나 스스로가 편견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어머님은 진짜로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예뻐해 주신 건데.


"아버님이 너를 얼마나 예뻐하시는지 아니? 항상 칭찬하셔, 요즘 애들 같지 않게 착하고 차분하고 사치스럽지 않다고. 나도 니가 내 식구인 게 너무 감사하고 좋아. 우리 아들이랑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고."    


살림을 못하면 배워서 잘하면 된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못하는 걸 가지고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고,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르니 잘하는 것만 하면 된다고 말씀해주시다니,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아니야, 잘하고 있어" 같은 어설픈 위로의 말이나 "앞으로 잘하면 되지"같은 격려 아닌 격려의 말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애정으로 말씀해주셔서 그게 제일 감동이었다. 다가오는 이번 생일의 가장 큰 선물은 직접 끓여주신 미역국보다도 따뜻한 그 말 한마디인 것 같다. 어머님, 사랑해용♥


내가 살림은 못하지만 사람 보는 눈은 타고난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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