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이걸 제가 해요?

의 긍정편

by 지은

2020년은 국가적으로 암흑의 시기였지만, 나한테는 약간의 기회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는 지금도 종종 언급이 되고 있는, 코로나가 터진 바로 그 연도였다.



당시 나는 약간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내가 여기서 하는 일이 분명 이 직무에 필요한 일인 건 맞지만,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아닌 누구나 할 수 있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단순 사무보조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나 전편에 있던 진상과의 통화로 인해 더 이상 운영-특히 CS-을 하고 싶지 않단 마음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뭔가 할 일이 생겨버렸다.

내가 속해있던 운영팀의 인원 중 한 분은 마케팅 쪽을 담당하던 분이셨는데, 브랜딩과 KPI를 위해 나에게 제안을 주셨다.


컷툰을 그려보지 않겠냐고.



?


저 만화가 아닌데요;


그분의 목표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널리 쓰이는 고전짤방과 같이,

그런 이미지들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짤을 사용하고,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도 "이게 어디서 나온 거지?"싶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미 상사들에게 컨펌도 다 받아 놓은 상태셨다(물론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내가 미술이나 디자인과를 나온 것도 아니었고, 단순 취미로만 그리는 거라 잘 그리는 편도 아니었는데,

그냥 직원들 중에서 그림이라는 것을 그려본 사람이 나뿐이었던지라 내가 하게 되었다.

웃긴 건 또 회사에 타블렛도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주제 하나를 선정하여 하나의 짤로만 만들었다.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가 바로 코로나가 터진 시기였어서, 직원들 중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집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했던 주제는 바로 재택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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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전설 아닌 레전드 아닌 그냥 컷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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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은 미미했다.

사실 당연했다.

내가 만들긴 했지만 그림도 별로고 별로 재밌지는 않았다. (ㅋ)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게시글은 안 올려도 틈날 때마다 SNS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는 자.

우리끼리 머리 싸매서 노잼 주제 선정하지 말고, 유행에 편승하기로 하였다.

MBTI가 유행하니 MBTI를 활용하고, 인기 있는 드라마나 영화 속 임팩트 있는 장면을 활용하여 짤을 만들었다.



성실함이 결과로 나타난 걸까.

꾸준히 업로드를 하면서 (나름)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니 점차 봐주는 사람도 늘고 인기도 나름 높아져 갔다.

사내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 한 켠에도 컷툰을 싣기 시작하면서, 관련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하면 언급해 주는 사람도 많았었다.

그땐 뿌듯함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나에게 이 프로젝트를 해보자고 하신 분은 건간상의 이유로 당일 그 해인가 아니면 다음 해 초에 퇴사를 하셨지만,

그 뒤로도 나는 혼자서 작업하였고, 2020년 9월부터 2024년 2월까지 업로드를 진행했다.

사실 더 할 수는 있었는데, 이런저런그런 사정들로 인해 중단하게 되었다.

나름 인기가 많아져 컷툰만 모아놓았던 게시판도 있었는데, 오랜만에 찾아가 보니 게시판은 사라져 있었다.(ㅠ)



나에게 이 제안을 주신 분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생각지도 못한 업무를 내려주신 덕분에 나름의 콘텐츠와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다고 지금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 일은 하고 있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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