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연인에게로의 송금

by 범버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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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점에 자주 오시던 30대 중반의 여성 고객(A) 께서 신용대출 3,000만 원을 신청했다. 신용도도 양호했고 지점의 실적에도 도움이 되는 좋은 대출 케이스였다. 대출 자금 용도는 결혼 자금. 대출 승인 후 대출 서류 작성의 마지막 단계를 진행하며 대화를 나눈던 중, 나는 순간 멈칫했다. 결혼할 남성이 캐나다인이라는 대목에서 불길한 예감이 스쳤기 때문이다.


"혹시 그 남성분을 실제로 만나보신 적 있으세요?"

조심스럽게 여쭤보자 그녀는 수줍게 답했다.

"아직 만나진 않았어요. 저와 결혼하기 위해 입국 중인데, 금괴를 들고 오다가 세관에 걸려서 세금을 내줘야 한다네요."

순간 확신이 들었다. 전형적인 로맨스 스캠이었다.


common.jpg 연예인 김상혁님도 로맨스스캠에 속았다고 한다. 피해자가 특정 성별이나 나이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맨스 스캠(romance scam)은 매력적인 이성인 척 온라인으로 접근하여 유대감을 쌓은 뒤, 이를 이용해 돈을 갈취하는 사기 수법이다. 사기범들은 유명인을 사칭 하기도 하고, 매력적인 외모나 직업을 가진 인물로 자신을 꾸며 접근한다.

고객 A 역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금발의 캐나다인 남성과 SNS로 정을 쌓았고,
그 남성이 금괴를 들고 한국으로 와서 결혼할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특히 ‘금괴,은닉자금’ 시나리오는 너무나 많이 접해본 케이스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혹시 SNS로 먼저 접근하지 않았나요? 최근 이런 피해 사례가 많습니다. 대출은 언제든 실행할 수 있도록 대기해둘 테니, 일단 직접 만나보신 후 결정하는 게 어떨까요?"

그녀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그 길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행히 다른 금융기관에서도 대출을 받지는 않은 듯했다. 하지만 부끄러우셨는지 이후 은행에 오시더라도 내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서둘러 볼일만 보고 가셨다.




로맨스 스캠의 피해자들은 처음엔 "절대 그럴 리 없다" 며 현실을 부정한다. 그러다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수치심에 빠져 피해 사실을 숨기려 하는 경우도 많다. 일반적인 보이스피싱은 피해자가 사기범을 ‘범죄자’ 로 인식하지만 로맨스 스캠은 피해자가 사기범을 ‘연인’ 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충격이 더 크고, 심리적 방어 기제가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그래도 고객 A는 금전적 피해 없이 현실을 깨달은 다행스러운 경우였다. 하지만 모든 피해자가 그렇게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은행으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저는 고객 B의 친구인데요. 곧 고객 B와 함께 은행에 갈 건데, 좀 말려주세요."

전화를 건 사람은 고객 B의 친구였다. 아마도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친구가 몰래 전화한 듯했다. 잠시 후, 고객 B는 친구분과 함께 은행에 도착했다. 친구분은 내게 은밀히 눈짓을 했고 나는 ‘로맨스 스캠이겠구나’ 짐작했다.


고객 B는 거액의 금액을 해외송금 요청하였다. 사유를 묻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해외에 있는 장군님이 물건을 사야 하는데, 제가 대신 송금해 드려야 해요." 그녀는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장군에게 푹 빠진 상태.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미 타행에서 본인의 연간 해외 송금 한도를 꽉 채워 송금한 상태였고 이번엔 친구 명의로 추가 송금을 하려고 온 것이었다.


"지금 바로 해당 은행에 가셔서 송금 취소 전문 요청을 하셔야 합니다. 아직 중간 경유 은행단계라면 돈을 지키실 수 있습니다." 라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단호했다. "다른 은행으로 가볼게요." 경찰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그 후에도 로맨스 스캠으로 해외 송금을 하러 오는 고객들을 종종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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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보다 로맨스스캠이 잔인한 점은 감정을 이용한 사기이기에, 피해자의 정신적 충격이 크다. 그들은 돈만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던 사람도 잃는다. 설령 금전적 피해를 방지한다고 하더라도 배신감과 정신적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보이스피싱을 예방했을때, 고객분들이 안도하고 감사의 인사를 건낼 때에는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로맨스스캠을 방지했을 때에는 좌절한 표정과 무너진 자존감 앞에서 위로조차 건네기 어려울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피해를 막아냈음에도 늘 씁쓸한 여운이 남는다. 당신의 연인은 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장밋빛 미래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통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물론 이런 ‘직업병’이 빗나갈 때도 있다. 한 번은 지점의 거래처 돌싱 사장님이 해외송금을 하러 오셨다. 사유를 여쭤보니 조금 민망해하며 결혼 이야기를 하셨다. 스무 살 넘게 어린 여성에게 결혼자금이라니 이 또한 로맨스스캠이구나! 나는 사장님에게 준비된 멘트로 “혹시 그 여성분을 실제로 만나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라고 로맨스스캠은 아닌지 운을 띄워보았다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라”고 된통 한소리만 들었다. 나중에 대출할 때 서류들을 보니 사장님은 정말 그 스무살 넘게 어린 해외 여성과 재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혼인신고도 했더라 . 로맨스스캠이 아니라 정말 로맨스라 다행이었다.


다만 아쉬운 건, 이런 일차적인 검증 단계가 갈수록 귀해진다는 점이다. 지점 수가 줄고 비대면 업무가 일상이 되면서 창구 너머에서 오가던 ‘참견 섞인 질문’들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기계적인 시스템은 고객의 미세한 망설임이나 어색한 침묵을 읽어내지 못한다. 과거에는 서툰 번역체의 말투 때문에 어색했지만 요즘은 생성형 AI의 발달로 말투도 자연스러워지고 사진들도 정교해지며 감정의 교류도 더 깊이 이루어진다. 존재하지 않는 연인을 향한 송금 버튼은 이제 아무런 방해 없이 더 손쉽게 눌러질지도 모른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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