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탄소가 단단한 ‘횡령’의 다이아몬드가 되기까지

by 범버맨


ghldfud.jpg


수억원대의 은행 횡령 기사가 뉴스 사회면을 도배할 때마다 사람들은 혀를 차며 분노를 쏟아낸다. 지점에서 현금을 빼돌리는 고전적인 수법부터 대출 서류 위조나 본부 부서 단위의 고도화된 범죄까지 그 규모와 대담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사건이 터지고 나면 “그 녀석 원래 인상이 쎄했어”라고 말하는 이른바 관상가 ‘쎄믈리에’들이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사고가 터진 현장의 목소리는 전혀 다르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일했던 동료들의 반응은 대개 “전혀 그럴 줄 몰랐다”, “정말 성실하고 유능한 친구였는데 충격이다”라는 쪽이다. 괴물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바로 옆자리에서 아주 평범하고 신뢰받는 얼굴을 한 채 서서히 자라난다.


은행은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해 영업점은 2~3년, 본부 부서는 최장 5년마다 강제로 자리를 옮기는 ‘순환 근무 제도’를 운영한다. 업무 분장을 철저히 나누고, 명령 휴가를 보내 불시에 자리를 검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횡령은 발생한다. 미국의 범죄심리학자 도널가 주장한 크래시의 ‘부정 삼각형’에 ‘역량’을 더한 ‘부정의 다이아몬드(The Fraud Diamond)’ 이론은 그 비극의 메커니즘을 설명해 준다.



fraud diamond.png 부정의 다이아몬드 이론


횡령이라는 악의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축이 완벽하게 맞물려야 한다.

첫째는 인지된 압력(Pressure)이다. 도박 빚, 주식이나 코인 투자 실패, 혹은 감당 못 할 사치나 유흥에서 오는 경제적 압박이다. 둘째는 합리화(Rationalization)다. “잠시 며칠 빌렸다가 넣어놓을 뿐이야”, “내가 회사에 기여하는 수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라는 자기기만이 시작된다. 셋째는 인지된 기회(Opportunity)다. 내부 통제의 허점이나 감시의 눈길이 느슨해진 틈을 발견하고 “이거 이렇게 바꿔 놓아도 아무도 눈치 못 채겠는데?”라며 허점을 포착한다.

하지만 은행 횡령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마지막 네 번째 축, 바로 역량(Capability)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업무를 가장 잘 알고, 조직의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시스템의 약점을 꿰뚫고 있는 ‘에이스’ 만이 대범한 횡령을 저지를 수 있다. 시스템을 우회할 지식과 권한을 가진 유능한 직원이 ‘압력’과 ‘기회’를 만나는 순간, 시커먼 탄소 같던 부정의 삼각형은 견고하고 단단한 ‘부정의 다이아몬드 로 완성된다.

동료들이 범인을 의심하지 못했다가 충격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횡령 사고를 치는 이는 대개 낙오자가 아니라, 누구보다 일을 똑똑하게 처리하던 ‘믿음직한 김 대리’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윗선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는 데 몰두한다. 그래야만 상사들이 “알아서 잘하겠지”라며 사소한 결재나 전산 이력을 꼼꼼히 살피지 않게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주식이나 투자 시장이 활황일 때 유혹은 더 짙어진다. 유능한 에이스들은 투자에도 관심이 많고 실제로 성공해 본 경험도 있다. 그들은 늘 ‘시드머니가 더 있었으면 수익이 훨씬 컸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러다 은행의 자금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활용해서 수익을 낸 뒤 채워 놓으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시작해 레버리지, 선물거래 등에 과도하게 투자하다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


이런 사고가 터질 때마다 강화되는 시스템적 감시 체계는 남겨진 은행원들에게 커다란 짐이 된다. 모든 것을 필터링하겠다는 취지는 좋으나, 실무 단계마다 입력해야 할 항목과 사후 조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과거에는 ‘A 규정에 근거하여 처리했다’로 충분했다면, 이제는 ‘이 건이 왜 A 규정에 해당하는지 일일이 규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간혹 고객들이 ‘은행원들은 왜 이렇게 빨리 일처리 안하고 꼼지락 거리는 거야’ 라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대부분 업무 도중에 실시간 검출되는 감시의 늪에 빠져 소요 시간이 늘고 있다.

선량한 대다수의 직원이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규명’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다. 하지만 결국 이 촘촘한 그물망은 평범하고 선량한 직원이 ‘부정의 다이아몬드’라는 치명적인 유혹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막는 마지막 방어선이기도 하다.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마음 한구석엔 지우기 힘든 질문이 남는다. 만약 감시 체계가 더 정교했다면, 그 유능했던 친구들은 엇나가지 않고 끝까지 조직의 인재로 남았을까? 아니면 제아무리 시스템이 아무리 견고한들, 마음속에 '괴물'을 품은 자들은 결국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 더 큰 파국을 맞이했을 뿐일까. 결국, 유능함만큼이나 측정하기 어려운 '도덕성'이라는 가치를 조직이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에 대한, 어찌 보면 가장 기본적이고도 어려운 과제로 귀결된다.


오늘도 내 옆자리의 김 대리가 평범하고 성실한 동료로 남을 수 있기를, 그리고 이 무거운 시스템이 그의 유능함을 범죄의 역량으로 바꾸지 않도록 지켜주는 최소한의 보호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화요일 연재
이전 05화일 년에 딱 이틀만 쉬던 치킨집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