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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끌려간 아이는 왜 혼나고 있는가

29. 교집합

by 삐딱한 나선생

카페에 가면 혼나는 아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분명 그 아이가 잘못한 부분도 있는 듯하다.

아이가 남에게 피해를 주고 다니는 것을 방치하는 부모보다는 나은 것 같다.

하지만 내 눈에 그 아이는 왜 이리 안쓰러워 보일까.



나도 가고 이퍼


우리 첫째는 카페 가는 것을 좋아한다.

아내가 카페라떼를 정말 좋아한 영향이었겠으나 이젠 우리 아이도 가자고 한다.


그 안에 자신의 욕구도 있기 때문이다.

간식과 음료, 넓은 공간, 지루하면 얼마든 나가서 뛰어다닐 끝없는 해변까지.


난 이 아이의 삶을 카페에서 죽이고 싶지 않다.



무엇이 보이는가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스마트폰인가, 책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아이를 데려온 당신은 지금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가.


부모는 커피를 잡고 아이는 우유를 잡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겠는가.

아이의 눈을 보고 있다면 이 아이가 즐거운지 지루한지를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다른 이와의 만남에 아이를 데려가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이에게 준 외로움은 혼내야 할 일이 아니라 미안해야 할 일이다.


아무리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중요해도,

스마트폰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도,

아이가 이 자리에 어떤 의미로 존재하고 있는지, 외면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끌고 가는가


끌고 가는 것은 자신의 욕구만 있는 것이다.

함께 가는 것은 각자의 욕구가 있는 것이다.


카페에 있는 아이에게 자신의 욕구가 있는가?


아이는 뛰지도 못하고 다른 물건을 만지지도 못한다.

소리도 마음껏 낼 수 없고, 가지고 놀던 장난감도 없다.

그저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뿐이다.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아이는 결국 관심을 끌기 위한 이상한 행동을 한다.

다른 곳을 다니며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아이는 혼난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아이의 의미를 채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함께 가는가


차라리 아이의 손에 '뽀로로'라도 쥐어준 경우는 차라리 낫다.

스마트폰 중독은 차후로 두더라도 우선 그 아이가 가질 하나의 욕구는 생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지속되면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나와야 할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또 "우리 아이는 스마트폰만 봐요" 이러고서 또다시 아이를 탓할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에게 넘긴 당신의 의미는 다시 돌려받기 힘들지 모른다.

함께 가는 것은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의미를 함께 하지 못한다면 남과 다를 바 없다.


아이의 의미를 먹을 것으로 채워도 좋다.

책을 읽어주든, 장난감을 주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이의 의미를 채워주길 바란다.

안타깝게도 아이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문을 열라


카페 문을 열고 한 걸음 나가보자.

그 작은 카페에는 없던 많은 것들이 밖에는 있다.

아이와 걸을 길이 있고, 함께 볼 수 있는 풀, 나무, 구름, 바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다.


어쩌면 도심의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는 가질 수 없는 마음일지 모른다.

빼곡히 들어선 건물처럼, 문을 열어도 막혀있는 복도처럼 마음을 열 곳도 없는지 모른다.


하지만 갑갑한 이 세상에서 부모마저 아이를 가두어 버린다면 이 아이는 어디에 마음을 열고 살 수 있겠는가.


난 내 아이와 카페에 왔으나 카페에 갇혀있지 않다.

난 카페에 가면 첫째와 함께 밖에 있는 시간이 정말 많다.


아이에게 열어놓은 내 마음은 함께 온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

아이가 기다려준 시간들의 미안함을 알기에 카페 문을 열고 나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아이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가지고 카페에 오지 않길 바란다.

그 중요한 무언가가 당신을 카페에 가두고 아이를 혼내게 만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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