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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딱한 나선생 Nov 07. 2022

벌 받지 않음에 대한 벌

멈추라고 했을 때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손 들라고 했을 때 손이라도 똑바로 들지.

넌 그것조차 제대로 안 하고 더 혼나고 있니.



무지의 죄


올해 1학년을 처음 맡았다.

기본적인 생활태도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시간을 맞춰 들어오는 것도.


그래도 반복하고 꾸준히 지도하니 나아졌다.

유치원생 같던 애들이 지금은 학생답다.

좀 유별난 한 명을 빼고 말이다.


이 친구는 좀처럼 잡히질 않는다.

길을 가도 길이 아닌 곳으로 가려한다.

누가 도와달라고도 않는데 먼저 가서 훼방을 논다.


얼마 전엔 놀이터 공사 중이라 들어가지 말라는 데도 갔다.

전부 4명이 걸려 왔고 똑같이 혼났다.

하지만 이 아이는 더 많이 오래 혼났다.


내가 얘만 미워해서 그런 게 아니다.

다른 애들은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데 얘는 비비 꼬고 난리다.

벌을 받는 것도 견디지 못해 벌 받는 태도로 다시 혼난다.


틀린 글씨를 다시 써도, 남긴 급식을 좀 더 먹게 해도 그렇다.

다른 애들은 시늉이라도 할 때, 얘는 구시렁거린다.

자기의 잘못을 잘못인지 몰라서 너무 힘들다.



양심의 죄


이런 경우엔 학부모와의 대화도 어렵다.

고학년이면 그래도 좀 들어왔기에 알 텐데.

1학년은 아이의 문제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게 문제다.


"유치원 때는 아무 문제없다고 했는데요?

우리 애가 장난이 좀 심하지만 괜찮은 아이예요.

선생님이 우리 애를 너무 나쁘게 보시는 거 같네요!"


물론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가 우선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해선 더 나아질 수가 없다.

문제의 해결보다 책임공방만 하게 된다.


더 심한 경우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다.

매번 여러 아이들에게 시비를 걸고 하는 건 A다.

그러다 발끈해서 주먹이 나간 B는 학폭 신고를 당한다.


A의 부모는 본인 아이의 잘못을 모른다.

아니, 알아도 자기 애가 당한 것만 나열한다.

우리 애가 잘못이 있어도 벌을 받게 두지 않는다.


마치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는 것처럼.

경찰에 걸리지 않고 너만은 교묘히 빠져나가길.

부모는 아이를 구했고, 아이의 양심은 버려졌다.



벌하지 못한 죄


"초등학교에서 좀 잘 가르쳐서 보내줘요~"

인근 중학교 선생님이 농담조로 한 말이다.

"아이구.. 우리도 걔 졸업시키기까지 오죽했겠어요."

아마 그 선생님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변화시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를.


요즘 중학교 수업엔 자는 걸 깨우는 것도 두렵다고 한다.

괜히 건드렸다가 반항하고, 선생님을 신고도 하니까.

수업하는데 방해하는 게 아니라면 자는 것 까지야.


초등학교는 선생님이 소리쳤다고 민원전화도 받는다.

글의 서두에 손을 든다고 쓴 것도 신고당할까 무섭다.

교육의 힘은 크지만, 교육할 수 있는 힘은 크지 않다.


그렇다고 체벌을 부활시키길 원하는 건 아니다.

사사건건 소리치는 히스테릭한 교사를 편들고 싶지도 않다.

다만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잘못인 것 같은 이 상황은 너무 싫다.


"그냥 좋은 얘기만 해줘~"

학부모 상담을 앞두고 해준 주변의 조언이다.

나도 괜히 긁어 부스럼인가, 분란만 일으키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내 안전을 위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건 직무유기로 느껴졌다.


다행히 나중엔 어머님도 어느 정도 납득을 하셨다.

시간적 여유를 두고, 내 평가가 아닌 구체적인 사건들을 알려줬다.

무엇보다 내가 아이를 미워하는 게 아니며, 긍정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부분도 많다고.

"우리 아이도 선생님이 좋대요. 저도 가정에서 잘 지도해 보겠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한 편이 되었고, 아이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하나의 아름다운 성공 사례를 말하고 싶지 않다.

한 명의 지도를 위해서도 이만큼 어려움이 있단 말이다.

권위가 무너지는 건 좋지만, 그 안의 정의까지 무너지면 안 된다.


불매 운동이고, 정치에 대한 비판이고 다 좋다.

잘못을 바로 잡지 않으면 같은 사고가 또 발생하니까.

그러나 멀리 있는, 큰 주제에만 목소리 높이는 건 차라리 쉽다.


"선생님, 저희 애 많이 혼내 주시고 바르게만 키워주세요."

아무리 학생의 인권이 중요하고 내 자식이 무엇보다 소중하다지만, 이랬던 마음이 그리운 건 이 때문이다.

자기 자신부터, 자기 아이부터, 내가 할 수 있는 내 것부터 제대로 벌하고 살기를.

벌하지 못한 업보가 나를 벌하러 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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