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역 앞 6차선 그리고 신호등

나의 멈춤이 누군가의 흐름이 되도록..

by 동연아빠

집 앞에는 왕복 6차선 대로가 있다. 서울 한복판치고는 꽤 넓은 도로다. 건너편 금남시장에 가려면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는데, 이 신호등 시스템이 묘하게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한다.

도로 폭이 넓어 횡단보도가 중간 교통섬을 기준으로 두 개로 나뉘어 있다. 지형상 육교를 놓기 애매한 곳이라 어쩔 수 없는 구조이긴 하다. 그런데 문제는 타이밍이다. 시장 쪽에서 건너올 때는 한 번에 건널 수 있는데, 반대로 집에서 시장으로 갈 때는 꼭 중간 섬에 갇히게 된다. 절반을 건너면 어김없이 빨간 불이 켜지고, 나는 도로 한가운데서 멍하니 다음 신호를 기다려야 한다.


급할 때는 빨간 불을 무시하고 뛰고 싶은 충동이 든다. 하지만 멈춰 서 있는 차들의 시선이 느껴져 차마 양심을 버리지는 못한다. 그럴 때면 30초의 멍한 시간 동안 애꿎은 신호등 설계자를 탓하곤 했다. "아니, 보행 신호를 30초만 더 주면 되는데, 왜 사람을 도로 한가운데 세워두나? 책상에 앉아서 시간 계산만 하니까 이런 비효율이 나오지."


불편함은 오로지 나만의 몫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퇴근길, 운전대를 잡고 그 길을 지나며 문득 다른 풍경이 보였다. 금호역 사거리는 늘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차들로 붐비는 곳이다. 꼬리에 꼬리를 문 차들은 짧은 직진 신호 한 번에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그때 깨달았다. 만약 보행자에게 30초의 여유를 더 준다면, 누군가의 퇴근길은 30분이 더 지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신호등 주기를 설계한 그 누군가도 분명 책상머리에서 머리를 싸맸을 것이다. 보행자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 차량 정체를 막기 위한, 그들 나름의 치열한 '최적화' 결과가 바로 이 중간 멈춤이었으리라.

내가 멈춰 선 그 30초 덕분에, 꽉 막힌 도로 위 누군가는 집으로 향하는 속도를 낼 수 있다. 나의 멈춤이 타인의 흐름이 되는 순간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묘하게 닮았다. 늘 내 앞길만 뻥 뚫리길 바라지만, 세상은 혼자 쓰는 도로가 아니다. 내가 잠시 멈춰야 다른 방향의 누군가가 지나갈 수 있다. 그것이 운전자가 되었든, 삶의 다른 궤적을 그리는 타인이 되었든 말이다. 경쟁자이든 동료이든 먼저 가는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말자.


오늘도 나는 도로 한가운데 교통섬에 멈춰 선다. 예전 같으면 조바심을 냈겠지만, 이제는 이 멈춤이 싫지 않다.


"그래, 지금은 당신들이 흘러갈 차례입니다. 내 신호는 조금 뒤에 올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