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아래 May 07. 2020

걷기가 업이 된다는 것

사실 걷기에 빠졌다기보다는 독특한 여행 방식에 빠졌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내가 자동차, 자전거, 버스 등의 (대중)교통수단과 걷기 중 일부러 걷기를 선택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의외로 오래지않아 그 시초를 찾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서울시 강서구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논이 남아있던 그 곳, 마곡동에 살 때였다. 


당시 나는 버스 정류장인 '128번 종점'까지 어린 걸음으로 15분 이상 걸어가야 했고 그렇게 버스를 타고 딱 두 세정거장을 이동해 방화삼거리에 내려 다시 '개화국민학교'(당시의 명칭으로. 아직도 내 졸업앨범은 국민학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까지 10여 분 이상 걸어야 했다.


어린 나의 마음에도 그렇게나 걸어가서 꼴랑 두 세정거장 만에 내려서 또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났었고 그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데 편도 60원, 왕복 120원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나는 좀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빨리 걷기(때로는 뛰기)를 시도했고 그렇게 모은 60원, 120원은 실제로 내가 저지른 인생의 첫 '횡령'이자 '부'의 실체였다.


그렇게 아낀 120원으로 당시 방신시장에서 핫도그 50원짜리를 사먹고 나머지 50원은 오뎅꼬치 하나를 사먹었다. 문방구에서는 10원짜리도 요긴하게 쓰였으니 새하얗고 엄청나게 딱딱한 사탕 하나가 10원이었다. 그걸 두 개사면 왕복 걷는 시간 내내 입에서 굴릴 수 있었다.


물론 오락실도 빼 놓을 수 없다. 가성비 좋게 50원에 2인용을 골라 죽치고 즐기기도 하였으나 동네 깡패 형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남은 70원도 사라지기에 이는 꽤나 모험을 요구하는 오락거리였다.


중학교는 그다지 걷기에 대한 기억은 없다. 고등학교 때에서야 다시금 걷기에 대한 추억거리가 새록새록하다.


당시 친한 친구(지금은 충남 태안 어디에선가 소방관으로 열심히 살고 있을 것이다.)와 함께 정말 주말 밤마다 미친듯이 걸었던 기억이 있다. 


사실 고등학생 남자 둘이서 그렇게 걷는다는 것은 뻔하디 뻔한 일이다. 누가 예쁘다, 그 애가 날 좋아하나보다.(펵이나..), 그 애 혹시 어떻게 생각하나? 등등 정말 영양가치도 없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사자인 여학생들은 우리에게 단 1%의 감정도 없었음이지만 그 때는 세상이 두 쪽나는 것 보다도 더욱 심각한 주제였다. 무려 밤마다 세, 네시간씩, 심지어는 대여섯 시간씩 걷고 또 걷고 서로의 집에 바래다 준다며 수 차례 왕복했다. 


심지어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리고 군대 가기 직전까지도 그렇게 주말마다 "나는 인기가 있고 어디선가 나를 좋아하는 이가 있을 것은 분명한데 그저 연애 운은 없을 뿐"이라는 근자감에 쌓인 못난이 두 명은 밤마다 걷고 또 걸었다. (결국 둘다 군대 제대할 때 까지 연애경험은 '없음'으로 남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에는 또 다른 친구와 굉장한 망상에 빠져 정동진에서 서울까지 '무전여행'을 한다는 거창한 계획도 짜고 시도했다. 정말 무모해도 이렇게 무모할 수 없었다.


일단 정동진에 도착해서 친구가 '침을 튀기며 자랑하는 친구 아버님의 그 텐트'(라고 할 수도 없는, 낚시터에서 이슬이나 피하는 반원형 가림막 수준이었다.)를 본 순간, 나는 이 무전여행이 굉장히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 정말 환상적으로 멋진 텐트를 치고 또래로 놀러온 여학생 팀과 만나 밤 하늘을 바라보며 '연가'를 부르기는 개 뿔이나...


애시당초 대학1학년 또래의 여학생들이 정동진에 텐트를 짊어지고 올 이유도 없었거니와 (97년도였으니..) 당시의 기준에도 정말 삐까뻔쩍한 4~5인용, 6~8인용 화려한 텐트들 사이에서 우리의 텐트는 영화 '디스트릭트 9'의 난민촌보다도 못 한 존재감을 뿜어내었기 때문이다.


저녁이 되니 여기저기 고기 굽고 음악소리가 들리고 하하호호 청춘들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 가운데 생라면을 철근처럼 씹어먹던 우리는 '연가'는 커녕 '장송곡' 분위기 속에서 다시 짐을꾸려 밤 12시부터 정동진을 도망치듯 벗어났다.


결국 무전여행이란 것은 불가능 했다. 언제나 돈은 우리를 압박했고 그 어떤 개념조차 없던 우리는 각자 20kg이 넘는 배낭과 가방을 둘러메고 (그 와중에 난 출발할 때 통기타를 들고갈까를 고민했었다. 만약 들고 갔더라면 정말, 인생에서 가장 처량한 여행 첫 날을 보냈을 것이고 다시는 정동진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운동화를 신은 채 육체를 혹사, 또 혹사시켰다.


단 하루만에 얼굴 껍질이 벗겨지는 은혜도 입었다. 세수할 때 때가 밀리듯 껍질이 떨어져 나갔다. 발에 물집이 생기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몇 시간이었다. 도로따라 걷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코를 후비면 언제나 굉장한 '결과물'이 나와 심심치않았다. 


무더운 여름, 집에서 쌀과 고추장, 병 속에 김치!와 얇은 이불까지 챙겨 넣은 내 가방은 허리를 작살내기 충분했다. 물론 그 '텐트'라 이름 붙이기도 아까운 물건과 코펠, 버너(캠핑용이 아닌 그 네모진 부.루.스.타)등을 넣은 친구의 배낭도 사정없이 친구를 옭아메고 있었다.


어느 다리 밑에서 20여 분에 걸쳐 밥을 하고, 또 10여분에 걸쳐 라면 두개를 끓인 후 게눈 감추듯 먹었다. 먹고 나서야 밥을 너무 많이 해버려서 절반도 넘게 밥이 남아버렸고 이 상태로는 코펠을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것을 안 후엔 밥이 가득 든 코펠이 내 가방 제일 위측에 더해졌다. 


둘 다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었다. 첫 주먹다짐은 6천원이 남은 상황에서 내가 친구에게 말도 안하고 카메라 필름을 사 버렸다는 것이고(그래도 여행의 흔적은 남겨야 하니) 첫 화해는 결국 내가 집에 전화해 돈을 송금받은 후 어느 민박집에 들어가 무려 20시간 가까이 자고 나서야 일어났다. (정말 오후 두시에 자서 다음날 9시 즈음 일어났다.)


그렇게 4박5일을 걷고 또 걸었던 우리의 무지몽매한 여행은 정선군 어디 즈음에서 끝이 났고 이번엔 친구가 집에 전화해 돈을 송금받은 후 버스를 타고 정선군 읍내로 들어가 서울가는 시외버스를 탐으로써 끝이 났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 여행의 마지막 식사는 정선군 읍내에서 먹은 곤드레 나물 비빔밥이었고 4박5일간 해탈을 넘어 유체이탈 직전까지 간 두 청년의 몰골에 기가 막힌 사장님은 후식으로 수박을 썰어 주셨다.)


이 정도라면 아마 다시는 걸을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내가 사회생활을 할 무렵이다. 당시 나는 포토스톡 회사(상업용, 출판용 사진을 전 세계에서 수급하고 또 판매하는 회사. 직접 촬영도 진행했다.)에서 출판사업팀에 몸을 담고 있었다. 사진들이 상상을 초월하게 거래되는 현장 속에서 나름 시장 내의 감각을 키워가던 나는 어느 순간 특정 고객이 원하는 사진을 직접 찍어 제공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보통 수백장~수천장 단위의 사진이 사용되는 전집이나 교과서, 백과 등은 물량이 큰 만큼 컷 당 가격이 꽤 디스카운트 된다. 가장 벌크로 계약이 된 경우에는 사진 1장당 내가 손에 쥐는 것은 3만원 가량일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그 3만원이 문제가 아니라, '아무리 찾아도 그 사진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곧 제공해드리겠습니다.'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을 이유 삼아 무던히도 전국을 쏘다녔다.


문제는 그렇게 찍어야 할 대상들이 딱, 그 앞에 차를 놓고 찍고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데 있다. 


구리 아차산 삼층석탑을 찍기 위해 평생 관심없던 산을 올라야 했다. 게다가 마침 며칠 전 폭풍이 몰아친 탓에 당시 제대로 표식도 되어있지 않던(지금은 되어있다고 한다.) 삼층석탑 가는 길은 아예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였고 산의 'ㅅ'도 모르던 나는 어찌저찌하여 삼층석탑을 찾아 찍는덴 성공했으나 되돌아오는 길을 잃어 정말 생으로 산 비탈을 올라 등산로를 만나기도 했었다.


단양 적성비도 상행선 단양휴게소에 차를 놓고 조금은 편하게 올라 찍을 수 있으련만 하방리 마을에 차를 대고 한참을 걷고 또 걸어올라 적성산성을 찍고 적성비를 만나기도 했다. 당시에는 출입이 통제되지 않았던 단양 금굴도 그 비탈진 경사(도담리 다리가 생기기도 전이다.)를 미끄러져 내려가 찍어오기도 했다.


<단양 금굴>
<단양 금굴>

그렇게 여행을 시작하며 그 고된 걸음과 땀방울 속에서 기묘한 희열을 맛 보기 시작했다. 적성산성 성벽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제천 정방사에서 청풍호를 내려다보며 나는 아주 조금씩 걷기에 취해갔다. 물론 그것은 너무나 작은 시작이었지만 분명히 의미가 있는 시작이었다.


이후 문화관광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에 몸을 담으면서 나는 각 지자체의 '둘레길'과 '임도', '산책로', '등산로'를 알게 되었다. 가이드북과 소개 리플릿을 제작하기 위해, 그 내용이 되는 사진과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제대로 된 등산스틱도 없이, 트레킹화도 없이 축 늘어진 백팩에 목에는 DSLR 카메라를 메고, 나뭇가지를 꺾은 지팡이를 짚은 말도 안되는 모습으로 거구를 이끌고 걷고 또 오르기 시작했다.


전국의 기차역을 모두 찍는 프로젝트(코레일과 손을 잡아 앱을 개발하려 했으나 결국 개발은 완성된 채로 무산되고 말았다.)중 O-Train, 즉 중부내륙순환열차 라인을 찍던 중, 분천역을 지나 비동역으로 가는 그 구간, 지금은 '낙동강 세평 하늘길 3구간'으로 불리는 그 구간을 잊을 수 없다. 


철교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그 오지, 그 풍경이 주는 잔잔함과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고 싱그럽던 그 공기, 정말 그 자리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여기 공기가 너무 달아. 말도 안 되게 맛있어! 어떻게 이럴 수 있지?"하고 외쳤던 그 날, 양원역까지의 체르마트길 표지판을 보던 설렘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나는 나이 40을 채운 3년 전, 길 여행 전문 온라인 뉴스사에 입사했다. 지금은 휴간 중이지만 1년 6개월간 '로드프레스'라는 길 여행 월간지를 담당했고 '한국고갯길'이라는 브랜드로 다양한 걷기 행사를 진행했다.


그렇게 '걷기'가 직업이 되었다. 

<세상에 편한 '길'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정말 고달픈, '몸'으로 승부를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그 찰나를 기록하고 사진과 글로 남기는 것이 내 직업이 되었다.


그 길에서 떠올렸던 수 많은 생각, 바라보는 내 시선이 절대 객관적이지 못하기에 더욱 잊혀지지 않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제 하나하나 써 볼까 한다.


전문적인, 과학적인, 체계적인 이론이나 실습 안내는 없다. 그저 'Just Walk'의 개념으로 남기는 기록일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조금은 더 가볍게 쓸 수 있고 편하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첫 발이란 그런 것 아닐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