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이 사소해지면 좋겠다.
라푼젤의 마녀엄마와 진짜 엄마, 그 둘은 사실 한 엄마라고 했다. 심리학을 하는 친구의 해석이었다. 이 말이, 중1 딸에게 목이 찢어져라 화를 낸 직후 떠올랐다. 내 안에도 마녀엄마와 자상한 왕비 엄마 둘 모두가 있다. 이혼 직후 전남편에게 받은 상스러운 메세지에서 나는 '창녀'였고, 결혼 초반 잠시나마 고분고분했던 나는 '성녀'였을거다. 그에겐 그 둘 모두가 나다. 친구의 말은 진리였다.
영화 '사바하'에서 끔찍하게 태어난 '그것'과 진짜 깨달음을 이뤘다던 '이제석', 그 둘도 사실 하나에서 쪼개진 선과 악을 상징하는것 같다. '이제석'이 '선'일 때, '그것'은 '악'이었는데, '이제석'이 악이 되어가면서 '그것'은 선이 되어갔다. 한 인간이라는 단위, 한 무리의 사람들, 한 국가, 한 행성, 한 은하.... 그런 단위 안에 선과 악은 꼭 고르게 있어야 하나보다. 그렇다면, '그것'이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악'을 담당하느라 세상에 왔다면, 지금 이란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살상과, 트럼프의 노골적인 악행들도 지구에서 꼭 있어야 하는 일이라는걸까?
'악'이 사소해졌으면 좋겠다. 이만큼이나 많이 죽일 정도로 끔찍하지 않다면 좋겠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고개를 디밀지 않으면 좋겠다. 그저 가까이에서 사춘기 딸에게 입는 마음의 스크래치 정도면 좋겠고, 정말 피부 어딘가 베었다가 시간 지나면 그대로 낫는 그런 정도면 좋겠다. 혹시, 이건 내가 누리는 게으름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싫은 일, 버거운 일, 땀흘리는 일을 있는대로 뒤로 미뤄두느라 내 할당의 '고통'을 소화하지 못하는 일들이 모여서, '악'에게 힘을 실어주는 건 아닐까? 예전 잠시 기공을 배울 때 선생님이 그랬다. 인간은 어느정도의 고통을 겪어야만 카르마를 해소하는데, 수련으로 대신 그 고통을 소화하는거라고.
악이 끔찍해지지 않으면 좋겠다. 모두가 수련을 할 수는 없다. 먼저 한 인간 안에서부터 선과 악 모두를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내 안의 마녀 엄마를 인정해야 하고, 내 안의 시기, 질투, 탐욕을 못본 척 해선 안된다. 내가 거부한 내면의 '악'은, 남에게서 찾게 마련이니까. 그걸 '투사'라고 한다. 내가 남에게 하는 모든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했다. 정말 그렇다. 아이의 게으름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것은 내 게으름을 너무 직면해 보게하기 때문인것처럼. 전남편이 남의 흉을 열심히 보는 모습에 스트레스를 받던 것도, 내가 남을 흉보는 마음을 밉게 여기고 억눌렀기 때문인지 모른다. 정치인들을 봐도 정말 그렇다. '이재명 대통령이 계엄할 것이다', '친일파는 민주당에 더 많더라.'는 말로 그들의 언행을 고스란히 자신들의 입으로 증명하고 있잖은가.
그럼, 궁금해진다. 권력을 가지고 '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트럼프와 이란 정권은 '악'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드러내고 있는데... 그들의 내면은 대체 어떤 메카니즘인걸까? '계엄'을 이해해보고 싶었듯, '악'을 이해해보고 싶어서 글을 쓴다. 사실, 그들은 '악'을 '선'으로 둔갑시키는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 악이 끔찍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여전히 투사다. 그들의 겨우 사적인 만족에 불과한 권력과 돈을 위해서 '악'이 '선'이라고 '스스로'를 먼저 속인다. 그래서 스스로 부정한 그 큰 '악'을 적당한 대상에서 뒤집어 씌운다. '마녀사냥'이거나, '우생학'이거나, '나치즘'이거나 하는 무시무시한 것들부터, '여성혐오, 동물학대, 가부장제'처럼 우리의 피부로 느끼는 일상의 일들... 개인의 투사는 관계가 어긋나는 정도로 한계가 있지만, 권력을 가진 자의 투사는 피흘리는 현실이 된다.
트럼프 같은 인간이 영화의 '그것'처럼, 악의 할당량을 담당하고 있다고 믿고 싶지 않다. 한 개인이 제대로 다루지 못한 내면의 악이 증폭되는 시스템오류 정도일거라고, 우주의 원리가 그럴 리 없다고 믿고 싶다. 다시 영화 '사바하'를 떠올린다. '악'이 커지는 만큼, '선'이 고개를 들 것이라고. 지구 저 편에 일어나는 일에 눈물 짓고, 가슴아파하는 일부터, 기도의 힘, 명상의 힘으로 직접 빛을 보내는 일 까지 모든 선이 모여 힘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내 안의 '악'을 정직하게 소화해서, 그 '악'에게는 조금의 힘도 실어주지 않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