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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망망 Jun 28. 2019

필연적인 과도기를 살아가며

나의 무기력증 극복기 2 (feat. 20대 후반, 대학원생)


[마법의 약을 구할 수 없어 글을 쓰기로 했다]라는 글로 무기력증 극복기라는 화두를 던진 지 어느덧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대학원생인 필자는 그동안 기말 페이퍼를 쓰고 이것저것 일들을 계획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바쁘게 살아왔지만, 마치 다음 편이 곧 나올 것처럼 써뒀던 이전 글이 계속해서 마음에 밟혔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발걸음을 뗀다. 꾸준함은 어려운 일이다. 시리즈로 글을 쓴다는 것도.


지난 글에서 예고했듯이(작가의 이전 글 참조), 두 번째 무기력증 극복기는 무기력증의 원인을 진단하는 글이다. 필자의 경우 무기력증의 원인은 내부보다는 외부, 개인적 요인보다는 사회적 요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즉, 나의 무기력증은 상당 부분 ‘20대 후반의 (인문) 대학원생’이라는 사회적 위치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가 어떠한가를 돌아보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20대 후반은 우울한 시기라고 말하곤 한다. 누군가는 사회 초년생일 것이고 누군가는 사회 초년생에조차 접어들지 못한 취업준비생일 것이고, 사회생활을 좀 일찍 시작한 경우라도 현재의 직장에서 계속해서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나의 경우 아직 학생이지만 마냥 학생은 아닌, 때때로 일을 병행하며 지내는(그리고 늘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과 함께 살아가는) 대학원생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상태들의 공통점은 ‘과도기’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병아리도 닭도 아닌 그 중간 어느 즈음에 있는 듯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고나 할까.


과도기에는 우울해지기 쉽다. 현실을 모르는 것도, 전부 아는 것도 아니다. 희망으로 가득 차있지도 않지만 희망을 버리지도 못했다. 게다가 ‘일반적인’ 길을 선택하지 않은 필자의 경우에는 이 선택에 관한 흔들림과, 공감받지 못함과, ‘현타’를 계속해서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예술과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20대 후반의 대학원생에게 결여된 것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것들을 정리해 보자면,


가시적 성과와 보상

지식의 세계에 이제 막 입문한 자는 아주 미개하다. 매일 공부를 하지만, 늘어가는 것은 뿌듯함보다는 무지에 대한 첨예한 자각과 자괴감이다. 어떤 분야를 전공한다는 것은 마치 넓고도 깊은 바다를 홀로 허우적대고 있는 것과 같다. 모르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어떤 날은 어렴풋이 보이는 먼 곳까지 힘차게 헤엄쳐나가야 할 것 같고, 또 어떤 날은 심해로 들어가 심해어들을 관찰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지나친 조바심을 내었다간 질식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돌부리가 많은 지식의 해변. 멀리 갈 것인가, 깊이 갈 것인가? (심해 사진은 없어서 패스.)


어쨌든 자신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들을 끝까지 해냈다면 사실 그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하다. 그럼에도 투입한 노력에 비해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으니, 돈과 시간을 들여 고행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보편성과 주변의 공감

대학원생이라는 길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길은 아니다. 어쨌든 직장인들보다는 함께 아픔을 나누고 공감할 주변인들이 적어지고, 그러다 보면 아웃사이더가 되어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직장인과 대학원생은 서로를 부러워하면서 오해하는 관계인데, 직장인 지인들은 나를 보고 [학생이라서 부럽다, 나도 학생일 때가 좋았는데]라고 말할 때가 많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월급 받아서 좋겠다]라고 그들을 부러워한다. 이 부러움에는 서로가 처한 상태에 대한 참된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마치 평행선과 같은 대화가 된다. 같은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20대 후반 즈음이 되면 점차 비슷한 사람들과만 어울리게 되는 폐쇄적 인간관계가 시작된다.


나는 스스로를 마냥 학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학부생 때와는 달리 나이가 들었지 않은가. 교수님을 대하는 법도 달라져야 하고, 동기들과 쉽사리 말을 놓지도 못하며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대하기도 한다. (물론 이 부분은 학교나 전공마다 분위기가 다를 수 있다.) 아무튼 중요한 건, 학생이라서 그저 좋지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나이에 아직 학생이라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고, 어떻게든 다른 일을 병행하여 이중 신분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20대 초반의 학생 신분과 20대 후반의 학생 신분은 굉장히 느낌이 다르다는 걸, 현재 학생이 아닌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강제성과 주말

대학원생을 자주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요인은 바로 스스로 이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내게 공부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스스로 공부가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혹은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확신이 있어서 이 길로 들어왔다. 꼭 그러지 않아도 됐었는데, 내가 대체 왜 그랬단 말인가? 가방끈이 길어진다고 미래의 월급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예술계로 들어온 필자의 경우 오히려 공부를 더 함으로써 (아마도) 월급이 감소하게 되는 마법을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와 점점 멀어지는 삶이다. 나의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의 모순인 것처럼 느껴진다.


누구도 내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은,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데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쉬게 하는 매니저가 되어야 한다. 적절한 시간 일하고 휴일을 확보한다는 것은, 프리랜서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주 5일 출근을 하지 않는 대신 주말도 보장된 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하다간 학기 중에는 전혀 휴일이 없게 되어버릴 수 있다. 휴일이 없는 생활은 당연히 정신에 이롭지 않고, 무기력에 빠져버리기 쉽다.


제대로 된 휴식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딱 ‘내 선택에 책임진다’는 느낌으로 대학원 생활을 해 왔다. 그러나 공부를 한다는 것이, 예술과 인문학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우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전문가가 되기 위한 과정에서 필연적인 과도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나의 사회적 상황에서 결여되어 있는 것(아마도,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원인들)을 차분하게 정리했던 그 방식으로, 이제는 반대로 예술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나름의 특권)에 관하여 정리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작업을 하면서 나는 생각보다 큰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율성과 사유의 시간

대학원생에게 강제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사유의 지평을 넓힐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과 시간에 쫓겨 살아가기보다는 생각 속에 묻혀 살아가게 되며, 자율적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원하는 지식들을 찾아 습득할 수 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일과 시간에 쫓길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끊임없는 생각이 요구된다.)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건 관점에 따라 지옥일 수도, 특권일 수도 있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 지옥일 수 있는 이유는 많은 경우 허무주의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예술 혹은 인문학과 관련해 석사과정을 밟다 보면 점차 사회의 주류에 묻어가지 못하게 되며, 점차 강하게 사회의 모순을 보게 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이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노동 때문에 생각할 시간을 빼앗기고 있으며, 공부를 하더라도 주로 시험공부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유를 제한하게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렇다면 시험공부가 아닌 토론과 연구로 이어지는 공부를 통해 사유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인 셈이다.


객관적 지성

자괴감이 늘어가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객관적 지성은 늘어가고 있다. 석사과정에 들어오기 전에 인문학이 아닌 디자인을 전공했던 필자이기에 더욱 그런 것일 수 있는데, 그래도 어제의 나보다는 오늘의 내가 더 많은 것을 알고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똑똑해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대체 이 모든 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밀려오는 순간이 있으니.) 그러나 적어도 무지의 늪에 빠지지 않는 일은 중요하다. 무궁무진한 사기와 사이비 종교, 정치적 프로파간다, 타인에 대한 혐오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는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사람이 되어버리기가 쉬운 세상에서, 지성을 통해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타인에게 가해자나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평생 공부해야 한다. 물론 새로운 지식이 늘 옳은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오래된 지식과 새로운 지식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늘 중요하다.





꿈이라는 단어는 아름답지만, 꿈이 현실이 되고 생활이 되었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실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위의 문장은 웹툰계의 주옥같은 명작인 쥬드프라이데이 작가의 <진눈깨비 소년>에서 차용한 대사임을 밝힌다. (기억을 바탕으로 필자가 재구성한 것. 현재 유료화된 네이버 웹툰.) 특히 예술계 종사자들의 경우 꿈이 생활이 되어가는 과정은 지독하고 외로운 여정이다. 예술을 사랑했다는,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묻게 되는 순간들이 올 것이다. 예술 분야가 아니더라도, 그 꿈이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 과정에는 고립이 수반될 것이다. 소위 일반적인 사회에서 고립된 상태에서의 지독한 몰입.


나는 막연했던 꿈이 현실 생활과 맞닿기 시작한 시기를 ‘과도기’라 부르고 싶다. 아직 능숙하지도 않고, 그러나 마냥 무지하지도 않은 우리는 안으로는 수많은 의구심과, 밖으로는 사회의 부조리와 싸워야 한다. 과도기를 살아갈 때 인생의 의미가 소진되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의미’. 그것은 예술을 전공하는 내가 지독하게도 원하는 것이며 회의주의자인 내가 그만큼 얻기 어려운 것이다.


오늘도 묵묵히 밭을 기를 뿐.


우선 나의 인생에 관한 과도한 의미부여를 포기하자는 것이, 무기력증과 완벽주의에 관한 나의 대안이다. 설령 큰 의미가 있다 해도 과도기인 지금은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살고 있을 뿐인 나는, 그저 살아가면 된다. 비록 아직 미개하다 할지라도 어제보다 더 나아졌다면, 무엇 하나라도 더 알게 되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글을 쓰게 되었다면. 그저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P.S. 그러나 이 대안은 과도기적인 것이다. 오늘은 무기력증의 원인에 초점을 맞춘 글이었다면, 다음번에는 무기력증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해서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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