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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 Jun 19. 2022

밀가루에 잘 어울리는 호로록스러운 문장들

윤이나 에세이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별것 아닌 일을 재미있게 쓰는 사람, 자기만의 표현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부럽고 또 신기하다.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아니, 무슨 라면으로 책 한 권을 쓴단 말임? 북카페에 진열된 띵 시리즈와 아무튼 시리즈 사이에서 굳이 윤이나 작가의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를 꺼내 든 이유였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겨울방학, 시냐 소설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2학년이 되면 전공을 정해야 했는데 1년 동안 배운 시, 소설 어느 것에도 재능이 없는 듯했다. 그나마 산문 부문에서 상을 받은 적이 있어 소설을 전공해야지 마음먹은 찰나, 소설 선생님은 시를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사실상 소설에 재능이 없다는 말이었다. 시 선생님은 더 단호했다. 시를 선택한 학생이 부족해 한 명이라도 더 시를 전공하라고 설득하는 와중에도 나에게는 시를 쓰라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를 재능이 없다고 판단한 이유는 같았다. 문학이란 무릇 탁 튀고 현실을 비틀고 때로는 되바라져야 하는데 내 글은 너무 착하고 정직하다는 이유였다. 내 안의 나는 누구보다 되바라진 애였는데 막상 글로 쓰면 그게 잘 안됐다. 그래서 늘 잘 쓰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그들의 감성을 훔칠 수만 있다면 훔치고 싶었다. 한글 파일에 몇 번이고 친구들의 문장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고작 열일곱이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쓸까 열등감에 사무치면서.


클라이밍을 하러 간 시느와 아직 퇴근하지 못한 옒을 기다리며 나는 또 한 번 열등감과 감탄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작 라면으로?’라고 생각했는데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고작’을 수식어로 붙였던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작가에게 라면은 최고의 글감이자, 추억이자, 현재이자, 소망이며 인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면을 너무 먹고 싶어졌다. 바디 프로필을 준비했을  가장 먹고 싶은 음식 1위는 육개장 사발면이었는데, 그때만큼이나 먹고 싶어졌다. 아마  책의 독자라면  번쯤 책을 읽다 말고 라면 물을 올렸을 테니,  책은 라면 소비 촉진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라면 회사들이 눈치껏 작가님에게 라면을 종류별로 담아 보내줬으면 좋겠다.


아무튼 시느와 옒을 만나 우리는 약속대로 한강에 갔다. 나는 뭐 먹을래?라고 물으면서도 속으로는 누가 뭐래도 라면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다. 한강은 라면이었고 라면은 한강이었으므로, 옒은 라면을 먹겠다고 했다. 우리는 사이좋게 라면 하나를 끓여 나눠 먹었다. 호로록 먹으면서 라면에 일가견이 있는 어떤 작가의 책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시느의 새로운 직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꼬들꼬들 딱 알맞게 익은 라면처럼 우리의 밤이 맛있게 익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 책은 완벽히 라면의, 라면에 의한, 라면을 위한 책인 듯하지만 다음날 다시 책을 집어 들었을 땐 호두과자 생각이 났다. 책을 구매한 북카페 ‘선유서가’에서 아주 맛깔난 호두과자를 굽기 때문이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책에 호두과자 굽는 냄새가 배어 있었다. 적당히 익은 밀가루 냄새와 팥앙금의 달달한 향기가 어우러졌다. 날 듯 말 듯 옅은 커피 향도 났다. 읽을수록 라면이 먹고 싶어지지만 뜻밖에 호두과자 생각이 나는 책이라니. 완벽히 밀가루의, 밀가루에 의한, 밀가루를 위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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