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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서점 Apr 30. 2024

우리는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 하이브와 민희진

브랜딩과 세계관

며칠 째 사람들이 둘 이상 모이면 하이브와 아트디렉터 민희진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를 합니다. 온라인 커뮤니티도 시끌시끌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의 편인지, 상대방이 누구의 편인지가 더 궁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훈 작가님은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라는 책으로 이런 말들에 관하여 말한 바 있습니다.  



'어느 편인지를 밝히라니!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이 나의 지성일 수 있는가. 당신들은 또 어느 편인가. 이 양자택일을 인간의 현실에 적용시켜서 이쪽이다 저쪽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별로 쓰잘데기 없는 말 쪼가리를 이미 권력으로 쪼개져버린 현실에 대입시켜가면서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다면 나는 우습고 꼴같지 않아서 대답하지 못한다.'  


-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개수작'을 그만두라' 중에서, p.89~90  



이미 하이브와 민희진 사건(사건이라고 부를만한 일인지 모르겠지만)은 음모론으로까지 번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적대적으로 생각하던 커뮤티니나 집단을 악마화하고 비방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단정 짓는 단계까지 가버렸기 때문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옳고 그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저는 친구들에게 "우리는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일을 통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화예술'과 '비즈니스'의 개념 충돌과 간극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법정 공방은 꽤 오래 걸릴 테니까요. 그런 지난한 이야기보다는 민희진 님이 어떤 것을 만들고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가 더 궁금하고요.


두 시간 가량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대척점에서 답답함을 느낀 사람들도 적지 않고요. 하지만 욕설과 배임, 억울함 관련 발언을 걷어내고 나면 아트디렉터 민희진이 보입니다. 사실 민희진 님은 위 이야기를 걷어내면 기자회견 내내 브랜딩에 관한 이야기를 했더라고요. 기자회견을 듣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정리하면 세 가지였습니다.


1. 브랜딩은 세계관이다. 세계관이 무너지면 브랜딩이 무너진다.

2. 문화예술 또한 세계관이다. 역사와 맥락이 있다.

3.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인지 보여주어라.'


세 번째 이야기는 저희 어머니께서 어릴 적부터 해주셨던 말씀인데 기자회견을 보면서 문득 떠올랐습니다. 어떤 방식이 옳은 지는 의견이 갈리겠지만, 내 자신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점에서 배울 점이 있었어요.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마다 참아왔는데, 참을 때마다 상대방은 만만하게 보고 더 날뛰곤 했거든요. 요즘 들어 부쩍 참지 말고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2015년 GQ와 당시 SM 엔터테인먼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민희진 인터뷰는 그가 문화예술을 어떻게 보고 받아들이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민희진은 누구인가?

https://www.gqkorea.co.kr/2015/09/09/sm-%EC%97%94%ED%84%B0%ED%85%8C%EC%9D%B8%EB%A8%BC%ED%8A%B8%EC%9D%98-%ED%81%AC%EB%A6%AC%EC%97%90%EC%9D%B4%ED%8B%B0%EB%B8%8C-%EB%94%94%EB%A0%89%ED%84%B0-%EB%AF%BC%ED%9D%AC%EC%A7%84-%EC%9D%B8%ED%84%B0/


인터뷰에서 '좋은 것'에 관하여 묻자, 민희진 님은 '좋은 것은 각자의 상황과 기호에 맞게 골라내고 가려내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만이 찾아낼 수 있는 그 무엇'이라고 규정합니다.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추구하는 의도와 목적'이라고 답하기도 하고요. 민희진 님 자신도 '좋은 것'이 '모두에게 좋은 절대적 가치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정형화된 성격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모호하게 말할 수 밖에 없고, 모호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문화예술을 추상적이고 모호하다고 말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극명하고 선명한 것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GQ 인터뷰가 흥미로운 것은 민희진 님이 참고하거나 영향 받은 다양한 콘텐츠들이 열거된다는 점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 너: 파이널 컷>,  알랭 들롱과 로미 슈나이더가 주연한 <수영장>,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오프닝 시퀀스. 이렇게 영향 받은 콘텐츠, 문화를 알게 되면 세계관이 확장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모호하게 보일지 몰라도 생각의 폭과 범주가 넓어지고 또렷해지곤 합니다.


(구)올 뮤직 가이드(All Music Guide). 올 뮤직 닷컴(https://www.allmusic.com/)은 음악을 들을 때 유용한 사이트입니다. 아티스트 페이지마다 유사한 아티스트, (해당 아티스트가) 영향받은 아티스트, (해당 아티스트가) 영향을 준 아티스트, 함께 활동한 적이 있거나 활동 중인 아티스트가 적혀있어 비슷한 음악을 찾거나 장르의 계보 등을 알아가며 음악을 들을 때 좋습니다.


이건 제가 음악을 듣거나, 영상 콘텐츠를 볼 때 재미를 느끼는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향 받은 아티스트를 찾아 올라가다보면 취향의 범주에 속한 음악을 만날 수 있거든요. 오마주, 레퍼런스, 패러디, 모티브, 리메이크, 샘플링, 표절... 한 끗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을 분별하는 능력은 문화예술 콘텐츠를 언제, 어디서, 얼마나, 어떻게 쌓았는지에 달렸으리라 생각합니다.


디렉터의 역량도 콘텐츠를 접하고 그 깊이와 넓이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듯 합니다. 디렉터의 일이란 어쩌면, 많은 경험을 쌓아서 서투르거나 어색한 데 없이 능숙하게 잘 다듬는 세련된 콘텐츠를 만들고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민희진 님뿐만 아니라, 많은 아트디렉터가 세련된 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은 비즈니스의 영역이지만 브랜딩이고, 마케팅이지만 브랜딩입니다. 모든 것이 브랜딩으로 귀결되는 세계관을 만드는 일입니다.


브랜딩은 세계관을 쌓고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오차는 브랜딩의 실패가 됩니다. 오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세계관을 견고하게 해줄 역사와 맥락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민희진 님이 기자회견 내내 답답해했던 부분이 이해되었습니다. '하이브 첫 번째 걸그룹'이라는 말과 '르세라핌과 뉴진스를 착각시키려는 의도'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건 브랜딩과 세계관을 처음부터 다시,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일일 테니까요.


민희진 님을 나르시시스트나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자기 피해자화 하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단정하는 사람들은 맥락보다 지금 보이는 행동에 더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경영권 찬탈시도로 여겨질 법한 행동은 법정에서 다툴 일입니다. 타인의 인격을 단정 지어 말하는 분들의 행동도 법정에서 다툴 일이지요. 우리는 신도, 판사도 아니기에 단언할 수 없습니다.


사실 민희진 님은 '작업에 있어서' 일관된 말과 행동을 해왔습니다. 2015년 GQ인터뷰에서 '모두 같은 방식으로 제작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각자의 방식을 갖는 것이 더 좋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번 기자회견에서도 처음부터 '나는 브랜딩을 매우 중요시 한다.'라고 말하며, 방시혁 의장에게 프로듀싱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는 이유도 브랜딩 관점에서 보면, 그 문제 제기가 이해됩니다. 


어떤 이들이 보았을 때 뉴진스에 집착하는 것도, '나는 내가 주인이 아니어도 되고 뉴진스와 하려던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도 회사를 떠나 어도어에서 손을 떼게 되면 뉴진스의 브랜딩이 무너지기 때문에, 아이돌이 아무리 상품이라도 앞서 GQ 인터뷰에서처럼 ''누군가의 구미에 맞추려고 시간을 쏟기 보단 ‘좋은 것’의 노력이자 전략, 작업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번 기자회견에서 한 시장, 업계에 관한 이야기. '음반 시장 너무 다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라는 GQ 인터뷰의 '다양한 시도로 확장된 포트폴리오의 구축은 모두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결국 시장의 흐름을 바꾸고, 확장시키는 데 일조한다. 한정된 시장 내에서 개체 수만 늘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와 맥락이 이어집니다. 어떠면 2015년 인터뷰에서 말했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의 역린을 건드린 것일지도 모르고요.


그래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나? '추구하는 의도와 목적. 만약 작업 과정에서 최초 의도가 훼손되는 경우가 생기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


당신은 설득을 잘하는 사람인가? 설득보단 먼저 납득이 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고, 보통 작업의 목적과 당위가 뚜렷하기 때문에 그 부분을 강조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설득의 과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 어찌 보면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기자회견 내내 민희진 님이 답답해했던 부분은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일을 설득으로 무마하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민희진에게 세계관은 설득한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납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에 합류하면서 했던 회사의 리브랜딩, 브랜드 아이덴티티, 그녀가 생각하는 좋은 브랜딩에는 바라는 태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함축되기에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꼈을 수도 있겠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지 않겠다 다짐하는 건 세계관이자 브랜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트디렉터 민희진 님에게 기자회견에서 말한 그 모든 것, 작업과 삶은 민희진이라는 세계관이자 브랜딩이기도 하니까요. 문화와 예술은 철학입니다. 철학이 없는 작품은 양산형 상품일 뿐 그 안에 세계가 없습니다. 자신의 철학이 없고 사람과 세상, 시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뉴진스라는 팀과 브랜딩, 세계관을 떠올리면 영향 받았을 수많은 콘텐츠부터 관련된 아티스트들이 떠오릅니다. 90s, SPEED, Duckbay, Ylva Dimberg, Beasts And Natives Alike, 250, FRNK... 뉴진스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눈여겨 보게 되는 신발 브랜드도 떠오르네요. 이 모든 것이 세계를 이룹니다. 8,90년대 미국, 일본 문화를 접하며 자라 2024년까지 디렉팅을 하는 사람의 세계 말입니다.


이건 민희진 님 혼자 이룬 결과는 아닐 거예요. 앞에 드러나지 않는 많은 노력이 쌓인 결과일테지요. 각각의 것이 모여 하나를 이루고 그 하나는 각각의 문화를 포용하는. 세계관이란 우리가 어떤 지식이나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근본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입니다. 8,90년대 대중문화를 접했던, 동경했던 사람들이라면 뉴진스나 민희진 님의 아트디렉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인정할 거예요.


그래서 방시혁 의장도 하이브로 민희진 님을 영입시키지 않았을까요. 지금 벌어진 일들은 어쩌면 세계와 세계, 세계관과 세계관의 부딪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비즈니스는 그들의 문제니까 차치하더라도 이번 일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킬까요. 그녀가 생각하는, 뉴진스 데뷔 이후 가장 성공했다고 느끼는 점을 보면, 모든 것이 흐트러지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길 바라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일본 리얼사운드 민희진 인터뷰

https://realsound.jp/2024/02/post-1574758.html


'오래전부터 창작부터 사업까지, 모든 프로세스를 함께 작업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20년 이상 이 업계에 종사하고 느낀 것입니다만, 엔터테인먼트 사업은 프로듀스와 경영이 동시에 유기적으로 운영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음악과 시각적 컨셉의 구현, 마케팅, 사업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일사 흐트러지지 않고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요소를 분리해서, 컨셉이 중요하다, 음악이 중요하다, 멤버가 중요하다, 마케팅이나 비즈니스가 중요하다, 등의 비교논리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느낍니다. 각각 비교 우위가 아니라, 서로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섬세하고 치밀하게 각각의 영역을 연결하고, 실제로 가시화하여 성과를 낸다는 것은, 브랜딩 이상의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시간 짜리 기자회견에서 나온 우리 대중음악계의 많은 일을 정리하기란 쉽지 않겠지요. 이번 일이 단순한 반란이 될 지, 세상을 바꾸는 하나의 흐름이 될 지 지켜볼 일입니다. 그리고 아트디렉터 민희진이, 또 다른 디렉터가, 어떤 프로듀서와 뮤지션이 '취향에 근거한 다양한 문화적 소스를 어떻게 재해석, 재구성하고, 새로운 수단으로 완성도 높은 표현을 하는지' 지켜볼 일입니다. 내일은 그녀가 좋아한다는 Francis Lai, Antonio Carlos Jobim, Bruno Nicolai 앨범을 들어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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