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뭐든 좋으니,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 편히 하세요!”
강사가 수업을 마칠 때마다 하는 말이다. 이 말을 이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되뇌일 줄이야. 상실만 가지고 글을 썼더니 죽음에 닿았다. 또 다른 키워드인 성장은 보이지도 않는다. 상실에서 성장으로 가기도 전에 죽음에 파묻혔다. 지금 같아선, 잘 사는 것에는 아예 손도 못 댈 듯싶다. 강사에게 우는소리를 좀 하면서 지금까지 쓴 글을 보냈다.
강사의 답변은 이랬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보내주신 글은 잘 읽었습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고통의 얼굴들을 선생님께선 잘 찾아주셨습니다. 특히 기즈키, 나오코, 와타나베 세 사람의 관계에서 생기는 어려운 문제를 잘 짚어주셨습니다.
이번 수업에서 우리는 특별히 레비나스를 읽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레비나스가 말한 ‘타인의 얼굴’이란 개념이 『노르웨이의 숲』을 새롭게 읽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한 제 생각과 질문을 두 가지로 나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선생님의 글쓰기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첫 번째 말씀은, 나오코가 말한 타자와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타자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타자는 나와 다릅니다. 이런 타자와의 차이점이 나의 경계를 이루면서 세상을 해석하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됩니다.
레비나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그가 말하는 타인의 얼굴은 나의 이해를 뛰어넘는 무한성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타인은 셀 수 없는 다양한 삶의 조건과 맥락에서 나름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무한성으로 인해 우리는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한한 존재를 유한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불안을 느낀다는 겁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 우리에게 불안과 불편을 준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무한한 타인의 얼굴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작은 찻잔에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거대한 바다. 거기서 우리는 넘치거나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환대(hospitality)’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타인을 나의 가두리 양식장에 잡아두지 말고, 그의 바다를 그 자체로 환영하라는 겁니다.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되지 않아도, 그의 삶을 믿고 환하게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환대하는 것을 윤리적 명령으로 선언합니다. 그에게 타인을 환대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윤리적 의무입니다.
기즈키와 나오코 그리고 와타나베는 서로의 얼굴에서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명령을 느꼈을까요? 이것이 제 첫 번째 질문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두 번째 말씀은, 도대체 잘 산다는 게 어떤 뜻이냐 하는 겁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나 혼자 편하게 지내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명, 신체, 인격, 재산, 권리를 빼앗으면서까지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들에게 잘 산다고 하지 않습니다. 잘 사는 것은 수많은 사람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는 공동체에서 좋은 삶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잘 사는 것은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하는 일이었던 것이죠.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제일 높다고 합니다. 잘 산다는 건, 누구와 함께하는 일인데, 그 누군가가 자꾸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인의 얼굴은 우리나라에선 스스로 죽어간 타인의 얼굴로 고쳐 읽어야 할 지경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잘 산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이 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는 그 사람을 너무 잘 알아.”
“우리는 하나야.”
“우린 서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야.”
이 말들은 보통 좋은 뜻이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친밀하고, 믿을만한 관계를 뜻하는 표현들이니까. 하지만 레비나스의 설명을 듣고 나니, 이런 말들이 오히려 위험하단 생각까지 든다. 이해한다는 말은 대단한 오해일 수 있다.
강사가 던진 두 개의 질문은 어려웠다. 하지만 꼭 답하고 싶어졌다. 내 문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첫 번째 질문은 기즈키, 나오코, 와타나베가 서로에게 타인의 얼굴을 봤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동안 가족과 친구의 얼굴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이렇게 묻고 나니 한편 궁금하면서도, 다른 한편 씁쓸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만 확인했던 건 아닐까. 그들이 나의 요구를 어떻게 취급할지에만 신경 쓰지 않았던가.
강사의 두 번째 질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자살하는 우리나라에서 잘 산다는 것의 의미였다. 잘 사는 일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는 강사의 말은 옳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살면서, 어떻게 나 혼자 덩그러니 잘 살 수 있겠는가. 나 하나만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잘 사는 거라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먼저, 기즈키와 나오코 사이에 타인의 얼굴부터 생각해 보자. 기즈키와 나오코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다. 세 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놀았고, 초등학교 시절에 첫 키스를 나눴으며, 사춘기를 지나면서 더 끈끈해졌다. 그들의 관계는 말 그대로 한 몸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엔 타인의 얼굴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다음, 기즈키는 와타나베에게서 타인의 얼굴을 보았을까. 기즈키는 학교에서 와타나베 말고는 친구가 없었다. 따라서 겉보기엔 두 사람이 매우 친해 보인다. 그러나 기즈키에겐 그 관계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는 와타나베 앞에서 자신을 늘 고치고 감췄다. 잘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말하듯, 타인의 얼굴은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불편한 존재다. 우리는 타인과의 불편한 관계에서 그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을 듣는 것이다. 불편하지만,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타인과 우리가 함께 사는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기즈키는 와타나베로부터 오는 불편을 자신의 함량 미달로 돌렸다. 그는 친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 친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만 얽매였다. 그렇게 다시 고치고 꾸민 나는,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의심스럽고 감춰야 할 존재일 뿐이다. 기즈키에겐 타인을 환대할 만한 스스로의 힘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혼자 무너졌던 이유 중 하나인지 모른다.
반대로, 와타나베는 기즈키에게서 타인의 얼굴을 봤을까. 살아 있을 때 둘은 친구였고, 유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엔 윤리적 명령은 없었다. 기즈키도, 와타나베도, 서로를 윤리적 타자라기보단 남자 고등학생 사이에 흔히 있는 친구, 자기 세계 안에 놓인 일부로 여겼을 것이다.
문제는 기즈키가 자살하고 난 뒤에 와타나베다. 열일곱 살 5월의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잡아챈 죽음은, 바로 그때 와타나베도 잡아챘다. 죽은 이의 얼굴만큼 산 사람을 사로잡는 것이 또 있을까. 레비나스에 따르면, 무한성을 가진 타인의 얼굴은 침묵으로 말한다. 나도 이런 경험을 했다. 빈소에서 영정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고인이 내게 꼭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죽은 사람의 얼굴은 말을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은 의미를 담아서.
그렇다면 와타나베는 죽은 기즈키에게서 어떤 말을 들었을까? 내용은 아직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분명하다. 죽은 기즈키의 얼굴이 와타나베라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뭔가 말을 한다는 것, 타인의 얼굴은 죽어서도 살아있는 자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
어이, 일어나, 나 아직 여기 있다니까, 일어나, 일어나서 알아내라고, 내가 왜 아직도 여기 있는지 그 이유를.
그 명령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서른일곱을 먹은 와타나베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나오코와 와타나베 사이는 어떤가. 나오코는 와타나베와 그리 친하지 않았다. 기즈키와 함께 봤을 뿐이고, 그나마 기즈키가 어쩌다 자리를 비우면 둘은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기즈키가 죽은 후엔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죽은 기즈키를 함께 애도하는 공동 분향소 같았다.
비탈길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철로를 가로질러 무작정 걸었다. 어디를 가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걸을 수만 있으면 됐다. 마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종교의식처럼 우리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걸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청소년기에 흔한 연애가 아니다.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죽은 사람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코가 와타나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오코에게 와타나베는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가 아니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의 얼굴에서 기즈키의 죽음을, 기즈키의 죽음과 똑같은 언니의 죽음을 보지 않았을까.
와타나베를 볼 때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과 맞닥트렸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오코의 선택지는 와타나베를 완전히 떠나는 것 말고는 없다. 이렇게 보면, 나오코가 죽기 전 와타나베의 편지를 모두 태우면서 했던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는 말을 전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와타나베가 본 나오코는 어땠을까. 와타나베에게 나오코는 살아있는 나만의 여자 친구가 아니다. 나오코는 죽은 친구의 여자 친구이기도 하다. 나오코의 스무 살 생일에 맺은 두 사람의 성적 관계를 와타나베는 사랑이라고 느낀다. 기즈키와는 불가능했던 결합이 자신과는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나오코가 요양원에 입원한 후, 와타나베는 사랑이 아닌 인간적인 책임을 느낀다. 그에게 나오코는 죽은 기즈키의 여자였다.
어이, 기즈키, 너 마침내 나오코를 손에 넣은 거야. 좋지 뭐, 원래 네 여자였으니까. 결국 그곳이 그녀가 가야 할 장소였던 거야, 어쩌면. 그래도 이 세상에서, 이 불완전한 산 자의 세상에서 나는 나오코에 대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죽은 기즈키가 와타나베에게 했던 것처럼, 죽은 나오코 역시 와타나베에게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와타나베에게 나오코의 죽음은 달랐다. 그는 이미 스무 살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가능하다면 열일곱, 열여덟에 머물고 싶었어.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이제 십 대 소년이 아니야. 난 책임이란 것을 느껴. 봐, 기즈키, 난 이제 너랑 같이 지냈던 그때의 내가 아냐. 난 이제 스무 살이야.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해.
그는 이제 살아가기 위해 대가를 치르고자 한다. 그것도 제대로. 죽은 기즈키와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하고 싶었던 말도 이것이었을까.
스무 살이 된 와타나베는 죽음의 상실을 겪었지만, 그것이 살아가기 위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상실을 성장 에너지로 삼았다. 기즈키와 달리 와타나베는 제대로 살기로 결정했다. 산다는 결정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만, 열일곱, 열여덟에 머물 순 없다. 이제 그는 스무 살 성인이다. 자기 삶에 책임을 느낀다. 나오코가 죽은 이후에도 이런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나오코의 선택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죽은 자들을 기념한다.
어이, 기즈키, 넌 옛날에 내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어들였어. 지금, 나오코가 나의 일부를 죽은 자의 세계로 끌고 갔어. 가끔은 내가 마치 박물관 관리인이 된 듯한 기분이야.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휑한 박물관 말이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곳을 관리하는 거야.
와타나베는 언제 이렇게 훌쩍 컸을까? 나는 이제 성장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검색 결과 나온 문장 중에 나오코가 담당 의사와 나눈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이미 나는 이 부분에 다윗의 별을 쳤더랬다. 나오코는 요양원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뒤틀린 것처럼 보인다고 담당 의사에게 말한다. 담당 의사는 나오코의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고 하면서,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여기에서 생활하는 것은 뒤틀림을 교정하려는 게 아니라 그 뒤틀림에 익숙해지기 위한 거라고 했어. 우리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그 뒤틀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사람마다 걷는 버릇이 다 다르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 보는 방식이 다른데 그것을 고치려 한들 쉽게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고치려다가는 다른 부분마저 이상해져 버린다고 말이야.
그렇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무한히 다르다. 그리고 조금씩 나름대로 뒤틀려 있다. 이걸 인정하지 않고, 칼날 서린 틀에 몰아넣고 눌려버리면 다른 부분마저 이상하게 잘려 나간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고 정해놓고, 그 안에서 모두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은 폭력일 뿐이다.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책 제목에서 전체성은 이런 폭력을 뜻한다.
『노르웨이의 숲』의 시대적 배경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이다. 소설에도 묘사된 것처럼, 당시 일본 대학 기숙사에서는 국기 게양식과 하양식을 정시에 거행했다. 대학생 단체도 우파와 좌파로 나눠 극렬하게 싸웠다. 국가, 국기, 우파, 좌파 등은 전체성이 표출된 것이다.
이 소설에서 유일한 웃음 요소인 ‘특공대’란 인물은 이런 전체성의 피해자다. 그는 지도에만 관심을 쏟는 남다른 대학생이다. 그러나 그는 늘 학생복 차림에 구두와 가방도 까만색이란 이유만으로 극우 집단인 특공대로 불린다. 사실 그는 정치에 관해 100퍼센트 무관심한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그의 고유한 개성과 취향을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놀려댄다. 자기 자신의 뒤틀림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은 채.
외부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뒤틀렸음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 그러나 우리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뒤틀림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야. 인디언이 머리에 자기 부족을 상징하는 깃털을 꽂듯이 우리는 뒤틀림을 끌어안고 있어. 그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사는 거야.
나오코는 요양원의 모습을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사는 것이라 말했지만, 나오코의 단짝인 레이코는 다르게 설명한다. 레이코는 와타나베에게 요양원에서는 다음 두 가지를 명심하라고 한다.
첫째, 상대를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할 것. 그리고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 둘째, 정직할 것. 거짓말을 하거나 사실을 왜곡하거나 마음에 불편하다고 해서 적당히 얼버무리지 말 것.
나는 위 문장 끝에 ‘잘 사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규칙에서 레비나스가 말한 윤리적 명령과 같은 무게감을 느꼈다. 타인을 죽인다는 의미가 나의 틀에 맞춰 그들의 고유성을 가두고 없애는 것이라면,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왔던가. 누군가 자신만의 개성을 발산하면, 바라보고 응원하긴커녕, 내가 속한 전체성으로 그들의 깃털을 얼마나 심하게 뽑아버렸던가. 그러면서도 같은 나라, 같은 민족, 같은 인간이라며 속이고 거짓말하지 않았던가. 거짓말로 얻어진 ‘우리’라는 이름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왔던가.
이제 우리나라에서 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레비나스의 윤리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살률 1위인 이 나라에서, 타인의 얼굴은 내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그를 살릴 수 없었는가?”
“그의 고통을 네가 먼저 알 수 없었는가?”
자살한 이웃의 얼굴이 끝내 꺼내지 못한 물음. 그 얼굴들은 다시 살아나, 지금 나에게 명령하고 있다.
“이제 너는, 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죽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명령에 귀 기울여야 할까. 그 이유는 나오코가 말한 세상에 진 빚과 관련 있다. 인간은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고 만들면서 성장한다. 이 과정은 마치 미숙한 엄마의 몸에서 장성한 아기가 태어나는 산통과 같다. 아직 내가 누구인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정신에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이 불쑥 뚫고 나오는 고통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고통의 과정을 나 혼자 외롭게 통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긴 세월, 누군가가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 주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나오코가 말한 세상에 진 빚이란 바로 이런 다른 사람의 믿음과 기다림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다른 이의 삶을 믿고 기다려 줄 차례다.
죽은 자는 죽음 이후에도 죽이지 말라는 말을 나에게 남기고 있다. 그 명령은 지금 살아있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선포된다. 잘산다는 건, 경제적 성공이나 자기만족이 아니다. 상실의 시대에 잘 사는 건, 빼앗긴 이웃의 얼굴을 보고 계속 윤리적인 응답을 내놓는 것이다. 애도와 상처를 나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죽은 이들의 침묵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이의 얼굴 속에 있다.
나는 자기답게 잘 살기 위한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이웃의 삶을 환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