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분위기가 뜨겁다.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다. 이전까지는 각자 책을 읽었는데, 이번 달은 일정을 정해 같이 책을 읽고 토론해 보자고 강사가 제안했다. 토론이 뜨거워진 이유 중 하나는 남자와 여자로 편이 갈렸기 때문이다. 대체로 남자들은 개츠비를 좋게 봤지만, 여자들은 나쁘게 봤다.
어떤 남성분은 이렇게 주장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이렇게 한번 살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츠비는 가난 때문에 결혼할 수 없었던 여자를 되찾기 위해 온갖 일을 다해냅니다. 그는 결국 성공하죠. 끝내 연인의 죄까지 대신 짊어지고 죽는 개츠비의 삶이 허무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남자다운 멋진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한 여성분이 방금 말한 남자를 쏘아보며 되받았다.
“남자들은 한 여자를 찍어두고 그녀가 가정이 있던, 아이가 있던 상관 없이 평생 쫓아다니는 걸 남자답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스토킹이나 연애 폭력이 계속되는 거 아닌가요? 개츠비는 비현실적인 인물이에요. 자기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그 속에서 죽잖아요.”
다른 여성분이 지지 토론에 나섰다.
“맞아요. 이 소설에서 여자는 명품 셔츠를 보고 감격해 울고, 아무 남자나 만나고, 멋진 자동차나 저택에 껌뻑 죽는 속물처럼 묘사돼 있어요. 닳고 닳았다는 표현이 여자에게만 쓰여요. 이건 마초주의 소설이에요.”
남녀 사이에서 비슷한 공방이 이어졌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나는 우물쭈물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개츠비가 왜 위대한지 모르겠어요.”
순간 토론이 잠잠해졌다. 숨을 고르던 침묵은 곧 내 질문에 공감하는 말로 채워졌다. 남자로서 멋진 건 맞지만 위대하다는 표현은 너무 과하다는 의견, 여기서 위대하다는 말은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개츠비의 추한 삶을 비꼬기 위한 반어법이란 해석 등이 나왔다. 모두 일리 있는 주장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개츠비는 위대하지 않았다. 위대하긴커녕 파티와 여자에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강사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토론하길 잘했다면서, 자기 역시 개츠비가 왜 위대한지 궁금하다고 했다. 위대하다고 칭송할 만큼 영웅적인 삶을 살았는지, 아니면 반어법을 이용한 비아냥인지는 작품을 좀 더 꼼꼼히 읽고 나서 생각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와 함께 읽을 책을 소개했다.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이었다. 두 권을 읽고 글을 쓸 때, 아래에 주목해 달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는 누구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거지?’를 묻고 대답해 왔습니다.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구이고,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지를 알아야 한다고요. 이 말은 물질주의와 개인주의에 빠진 우리가 삶의 방향을 회복하려면, 자신의 삶을 하나의 통합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건 영원히 고정불변한 게 아니라, 살면서 계속 만들어져 가는 과정에 있다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나를 이렇게 만들어 가는 건 나의 선택과 더불어 역사적 전통, 공동체적 가치 등이 동시에 작동한다는 거죠. 이런 실천, 전통, 가치에 근거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책임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인간을 매킨타이어는 ‘서사적 자아’(narrative self)라고 불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서사적 자아란 말을 곱씹었다. 사람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다. 비록 내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는 나 혼자 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쓴다는 특징이 있다. 나의 선택과 행동은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어떤 위치와 맥락에서 나온 선택과 행동인 것이다.
개츠비의 삶은 분명 도덕적인 서사적 자아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그런데 이것을 모두 개츠비의 책임으로 돌리는 게 과연 옳을까? 그가 살았던 1920년대 미국이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혹시 개츠비는 당시를 지배했던 이야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바로 이 점이 그가 위대한 이유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강사는 아래 말을 덧붙이면서 수업을 마무리했다.
“『위대한 개츠비』 첫 장에 나오는 아버지의 당부를 기억하세요?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있지 않다는 걸 명심하라.’ 이 말은, 이 소설을 읽는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개츠비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한 번 읽은 소설을 다시 읽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사실, 이번 수업을 듣기 전까지 나는 같은 소설을 두 번 읽은 적이 없다. 한번 읽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다시 읽는 경험은 놀라웠다. 두세 번 반복해 읽은 소설은 마치 전혀 다른 책처럼 다가왔다. 특히 강사의 설명과 토론으로 생긴 새로운 관점이 더해지면서 그 풍미는 훨씬 깊어졌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랬다.
나는 이 세계가 제복을 차려입고 있기를, 말하자면 영원히 ‘도덕적인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기를 바란다.
이 문장에서 ‘나’는 소설의 화자인 닉이다. 닉은 개츠비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소문과 선입견으로 개츠비에 대해 수근댈 때, 닉은 개츠비와 직접 대화했고, 그와 함께 사건을 경험했다. 따라서 닉은 개츠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닉은 독자인 ‘나’와 비슷한 입장에 서 있다. 처음엔 도덕적 잣대로 개츠비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결국 그가 옳았다고 결론 내린다. 말하자면 닉은 아직 개츠비의 위대함을 보지 못했지만, 곧 그것을 알아보게 될 사람의 대표인 셈이다. 이런 닉의 시선에서 다시 읽는 『위대한 개츠비』는, 처음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책이 된다.
이제 나는 개츠비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지 않으려는 썩 괜찮은 독자가 되었다. 이런 태도를 유지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를 좀 더 알아야 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는 부모의 자식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시대의 자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개츠비의 사회적 부모인 1920년대 미국, 이른바 ‘재즈 시대(Jazz Age)’를 공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 미국은 경제적 호황과 함께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전쟁 특수와 유럽 복구를 위한 투자로 미국은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물질적 풍요는 전통적인 도덕과 가치관을 뒤흔들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쾌락주의와 소비 문화가 퍼졌다. 가난한 흑인 공동체에서 시작된 재즈 음악은 젊은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떠올리게 하면서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재즈는 부와 쾌락이 넘실대던 화려한 파티의 배경 음악이면서 동시에, 당시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이것이 이때를 재즈 시대라고 하는 이유다.
이 격변의 시대에 기독교 세력은 썩어 가는 세상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금주법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러나 금주법의 목적은 종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 맥주 양조장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적국이었던 독일계 미국 이민자들의 주요 사업이었다. 금주법은 이들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견제라는 속셈도 있었다. 그러나 윤리를 회복하려고 시행된 금주법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금주령 속에서도 돈에 취한 사람들은 파티와 술을 원했다. 범죄조직들은 불법 밀주 산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한쪽을 세게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다.
전쟁은 젊은이들의 삶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부는 직접 전쟁에 나가 신체적, 정신적 상처에 시달렸다. 다른 일부는 전후 호황을 이용해 성공을 이루었다. 소설 속 주인공 개츠비는 이 두 부류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다. 그는 장교로 참전해 훈장을 받을 만큼 인정받았지만, 군인 월급으로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불법 밀주 사업에 뛰어들었다. 범죄조직과 손잡고 막대한 부를 쌓은 개츠비는 단숨에 상류 사회로 올라섰다.
그러나 당시 미국 상류층은 개츠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배타성은 뿌리 깊은 계급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개츠비와 같은 신흥 부자가 사는 웨스트에그(West Egg)와 톰, 데이지처럼 대대로 부를 물려받은 전통 부자들이 사는 이스트에그(East Egg)는 비록 거리는 가까웠지만, 두 지역 사이엔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었다. 개츠비가 밤마다 열던 화려한 파티에는 호기심에 전통 부자들도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파티의 주인을 만나지도 않았다. 초대도 없이 파티를 즐기고는 개츠비의 과거를 나쁘게 말했다. 그들에게 개츠비의 성공은 그저 놀고 마시다가 버리는 것에 불과했다.
재즈 시대를 산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썼을까? 당대에는 어떤 이야기가 유행했을까? 아래를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들(톰과 데이지 부부)은 별다른 이유 없이 프랑스에서 일 년을 보냈고,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폴로 경기를 하고 재산을 과시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떠돌아다니며 즐겼다.
젊은 부부도 자랑할 것이라곤 오직 돈뿐이었다. 돈 자랑을 위해서라면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좋았다. 그들은 짜릿한 흥분을 쫓아다니며 방황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의미 있겠는가. 이들이 이루고 싶은 가치 있는 꿈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따금 미스 베이커와 데이지는 둘이서 이야기를 나눴다. 색다른 화제도 없이 주고받는 시시껄렁한 대화는 그냥 잡담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들이 입은 흰 드레스처럼, 아무런 욕망도 찾아볼 수 없는 무심한 눈동자처럼 썰렁했다.
그들은 지적으로도 형편없었다. 전통 부자의 상징인 톰은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 있다. 그는 모든 문명을 백인이 만들었다는 걸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다.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는 더 엉망이다. 톰은 자신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다닌다. 자신의 정부를 남들에게 자랑하듯 보여주기도 한다. 닉은 데이지가 당장 그 집에서 뛰쳐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데이지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녀는 지금 누리는 편안하고 향락적인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자기 말처럼 데이지는 닳고 닳은 여자였다.
작가는 이러한 시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웨스트에그와 뉴욕시 중간쯤에는 황량한 지역을 피해 가기 위해 차도가 철로와 만나 400미터 정도 나란히 달리는 곳이 있다. 이곳이 바로 쓰레기 계곡이다. 재가 밀처럼 자라 산마루와 언덕과 기괴한 정원을 이루는 환상적인 농장 말이다.
쓰레기 같은 세상! 여기서 개츠비는 무슨 꿈을 꿨던 걸까?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웠고, 불법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야말로 억척같이 돈을 번 이유는 뭘까? 개츠비의 이 모든 노력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바로 과거 연인이었던 데이지의 마음을 되찾는 것. 그의 화려한 파티는 단지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데이지가 언젠가 그의 집을 찾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다림의 표현이었다.
개츠비는 밤마다 데이지 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녀를 상징하는 초록빛은 마치 그 옛날 이민자들의 눈에 보였던 신세계의 초록색을 연상케 한다. 실체도 없던 신세계의 꿈이 한때 꽃처럼 찬란하게 그들 눈에 떠올랐던 것처럼, 개츠비는 쓰레기 세상 너머에 있는 자신만의 이상향을 응시한다.
개츠비에게 돈은 단지 성공의 증거가 아니다. 돈은 자신의 순수한 시간을 되찾고,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는 마법의 음료였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그저 추억에 첫사랑이 아니다. 데이지는 신화 속 여신이다. 그녀는 개츠비의 숭배와 믿음의 대상이다. 그러나 여신은 보이지 않는 신비로 남아야 한다. 비밀스러운 베일을 들추는 순간,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신화의 뻔한 결말 아니던가. 사실 개츠비도 자기 앞에 나타난 데이지에게서 벌써 허무함을 느꼈다.
“안개만 끼지 않았더라면 만 건너에 있는 당신 집이 보였을 겁니다. 당신 집의 부두 끝에는 항상 밤새도록 초록색 불이 켜져 있더군요.” 개츠비가 말했다. 데이지가 느닷없이 개츠비의 팔짱을 끼었지만 그는 자기가 방금 한 말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았다. 아마 그 불빛이 지니던 엄청난 의미가 이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이제 개츠비는 자신의 팔짱을 끼고 있는 현실의 데이지가 아니라, 자기 환상 속 데이지에게 빠져 있다. 환상이 그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과거를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자기의 이야기라는 듯. 쓰레기 같은 세상에서 그를 구원해 줄 이야기는 과거에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없다. 이건 누구에게나 명백한 현실이다. 그러나 개츠비는 이 현실을 부정한다.
“나 같으면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과거는 반복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불쑥 말했다.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요? 아뇨, 반복할 수 있고말고요!” (…)
“난 모든 것을 옛날과 똑같이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그녀도 알게 될 겁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개츠비를 이해하겠다는 것이 욕심이란 걸 깨달았다. 미친 사람은 이해가 아니라 포기가 답이다. 모든 걸 옛날과 똑같이 돌려놓겠다니, 선을 넘었다. 이해는커녕 오해와 불신만 높아졌다.
그러다 며칠 후, 책 맨 앞에 있는 시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럼 황금 모자를 쓰려무나
그래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녀를 위해 높이 뛰어오르려무나
높이 뛰어오를 수 있거든.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사랑하는 이여,
황금 모자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을 차지해야겠어요!”
페이지 아래엔 시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 시는 『위대한 개츠비』를 쓴 피츠제럴드의 첫 장편소설 『낙원의 이쪽』에 등장하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의 제목을 어떻게 지을지 고민했다. 제목 후보였던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 ‘높이 뛰어오르는 연인’ 등이 바로 위 시에서 유래하였다. 결국 소설 제목은 『위대한 개츠비』로 최종 결정되었다.
그렇다면 피츠제럴드는 ‘황금 모자를 쓴’과 ‘높이 뛰어오르는’ 대신에, ‘위대한’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젊지만 가난한 개츠비에겐 황금 모자가 없다. 돈 없이는 높은 명성도 차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는 황금 모자를 쓰고 높이 뛰어올라야만 한다. 그녀가 자신을 차지해야겠다고 외칠 때까지! 그녀는 인간 개츠비를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황금 모자를 가진 부와 높이 뛰어올라 유명해진 그 사람을 차지하고 싶을 뿐이다.
개츠비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데이지에게 선택받을 수 없었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가난한 제임스 개츠(James Gatz)는 죽고, 부유하고 세련된 제이 개츠비(Jay Gatsby)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나는 영어 이름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개츠비(Gatsby)에는 옛 이름 개츠(Gatz)가 남아있다. 나아가 개츠-비(Gats-by)는 무엇에 의해(by) 만들어진 개츠(Gatz)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그는 돈과 명성이 만든 새로운 사람, 개츠비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비극. 설령 죽을지라도, 황금 모자를 쓰고 더 높이 뛰어올라야만 선택되는 신화. 그가 사랑한 여인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사람은 무일푼 청년 개츠가 아니라, 돈과 명성을 모두 거머쥔 영웅 개츠비였다. 그녀는 그런 영웅에 어울리는 우아한 여신이었다. 사실 개츠비는 옛 개츠 시절부터 이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때 그는 자신이 전력을 다해 성배(聖杯)를 좇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특별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우아한’ 여자가 도대체 얼만큼이나 특별할 수 있는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개츠비를 남겨둔 채 부유한 자기 집 안으로, 그 부유하고 충만한 삶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다른 사람이 돼야 했던 한 인간의 삶을 곰곰이 되새겼다.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이 아닌 줄 알면서도 목숨까지 걸었던 가난한 청년의 꿈. 그 꿈을 나는 독자의 특권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청년은 자신의 사랑이 결국 사라져 버릴 환상인 걸 알면서도, 자신을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무모한 헌신과 자기 부정 속에서도 끝끝내 자기만의 신화를 밀어붙였다. 바로 이 비극 어딘가에 인간의 위대함이 숨어 있는 것일까.
작가는 개츠비가 바라봤던 초록색 불빛과 신대륙 이민자들의 눈에 비친 초록빛 대륙을 연결했다. 어쩌면 개츠비는 신대륙 이민자들의 삶을 상징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미지의 땅으로 향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지금의 나를 버려야 했다. 그들은 살던 고향을 등지고 낡은 배에 몸을 실었다.
이민자들은 항해 내내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마실 물이었다. 당시 기술로는 장거리 항해 동안 신선한 물을 충분히 보관하기 어려웠다. 많은 이들이 오염된 물을 마셨고, 그로 인해 이질, 장티푸스 같은 질병이 돌았다. 쥐와 벼룩이 들끓었다. 더러운 손, 씻지 못한 그릇 등 비위생적인 환경은 질병을 더욱 부추겼다. 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이 다닥다닥 붙어 지내다 보니, 한번 전염병이 돌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면역력이 약한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먼저 죽어갔다. 전염병과 싸우면서,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에 시달리면서, 그들은 두 달 넘게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갑판에 올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초록의 대지를 가슴에 담았다.
마침내, 그들은 꿈에 그리던 신대륙에 도착했다. 그러나 신대륙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곳에는 원주민과 먼저 도착한 이민자들이 있었다. 항구 주변에 썩은 생선과 배설물에서 나오는 악취가 그들의 삶을 대신 말해 주었다. 그들은 이방인을 경계하고 아이와 여자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초록빛 대지는 사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피의 땅이었다. 목숨과 꿈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손에서 총과 술을 놓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 중 일부가 물질적인 풍요를 얻었다. 안락한 삶은 인생 전체와 맞바꾼 값비싼 것이었다. 그렇게 이룬 아메리칸 드림에 그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좇던 종교적 이상을, 자유와 평등을, 인간적인 삶을 얻었을까. 아니면, 떠나온 고향과 이웃을 떠올리면서 그래도 그때가 따뜻했다고 눈물을 흘렸을까.
개츠비가 죽던 날, 그는 데이지의 전화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결국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는 웅장한 저택의 수영장에 누워 자신의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았다.
개츠비 자신도 전화가 걸려 오리라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고 이미 그런 것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 옛날의 따뜻한 세계를 상실했다고, 단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것에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희망 없이, 환상 없이, 이 위험하고 허무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신의 경지에 올라선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신의 경지에 한참 모자란다. 따라서 삶을 견뎌내기 위한 성배가 필요했다. 이민자들이 미국 땅에 모든 걸 걸었던 것처럼, 나 역시 자본주의라는 땅에 인생을 걸었었다. 아메리칸 드림처럼 자본주의도 나에게 신화를 만들어 주었다. 자본주의는 누구에게나 기회를 준다, 자본주의는 공정한 경쟁을 보장한다, 땀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직에 충성하면 조직이 너를 지켜준다. 나는 자본주의의 복음을 암송하며 나의 이야기를 써 나갔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나는,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대학을 졸업했다. 새벽 3시부터 오후 3시까지 두세 가지 일을 하면서 7년간 고시를 준비했다. 결국 낙방했고, 사법고시는 폐지됐다. 출세의 꿈은 여기서 꺾였다. 당장 먹고살기 위해 아무 데라도 들어가야 했다. 밥벌이 못 하는 인간을 벌레 취급하는 것도 자본주의의 클리셰(cliché) 중 하나다. 나에겐 밥벌이를 위한 새로운 신화가 필요했다.
‘당신의 젊음을 바치십시오. 우리는 당신을 전설로 만들 것입니다!’
구인 광고가 마음에 들었다. 나를 전설로 만들어 줄 회사라면 나도 뭔가 보답해야 했다. 젊음과 열정을 기꺼이 바쳤다. 가족 식사보다 팀 회식이 먼저였다. 부모님보다 상사에게 효도했다. 납기를 맞추기 위해 하청 업체 직원들을 갈궜다. 회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불법 담합도 마다하지 않았다. 힘들 때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주문을 외웠다. 영혼까지 탈탈 털어 넣었다. 30년쯤 지나니, 한 꼬집 자존심도 남지 않았다.
끝내 나는 전설이 되지 못했고, 퇴직자가 되었다. 황금 모자 같았던 자본주의의 환상이 바람에 날리는 순간, 인생 전체가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열심히 한다’, ‘일 잘한다’, ‘에이스다’에서, ‘고집이 세다’, ‘손발이 안 맞는다’로 바뀌더니, 이제 ‘한물 갔다’로 인물평이 바꿨다. 돌이켜보면 그건 인생을 쏟아붓게 만드는 회사원용 플롯이었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쓰지 못했다는 것을 은퇴 직전에야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표준계약서를 내 이야기처럼 베껴 썼던 것이다. 사실 나의 이야기라는 게 따로 있는지조차 몰랐다. 그냥 이렇게 살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남의 인생 말하듯 했다. 돌아보니, 인생 뒷골목이 지저분한 낙서로 얼룩덜룩하다.
이제 나는 높이 뛰어오르는 걸 간절히 바라지 않는다. 누가 황금 모자를 준다고 해도, 피식 웃어넘길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내 이야기를 완전히 접은 건 아니다. 앞으로 살날이 새털보다 많다. 그래서 여전히 꿈이 필요하다. 로또 말고 뭔가 꽉 찬 꿈. 솔직히 나도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꿈이 있다. 강사가 했던 매킨타이어의 말이 생각났다. 내 이야기를 쓰려면, 먼저 내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일까? 이 이야기는 어떤 꿈과 환상을 나에게 주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