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러스터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먹고사니즘 시대에, 매킨타이어는 떡이 아니라 덕을 꺼낸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우리는 전쟁, 낙태, 정의에 대해 논쟁할 줄은 알지만, 그 논쟁을 화해시킬 기준은 잃어버렸다. 예컨대, 낙태를 둘러싼 다툼을 보자. 한쪽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다른 한쪽은 태아의 생명권을 주장한다. 문제는 자기결정권과 생명권 모두, 각자의 삶에서 전혀 다른 정당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모두 정당하다 보니 논쟁은 끝날지 모른다. 결국 남는 건, 주장하는 사람의 취향과 감정뿐이다. 이제 도덕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문제에서, 개인적 기호의 문제로 변질되었다.
개츠비가 살았던 재즈시대 젊은이들도 삶의 기준을 잃어버린 채, 전쟁의 비극과 돈이 주는 욕망 속에서 흔들렸다. 부모 세대를 통제했던 청교도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다. 젊은이들은, 어른들이 한때 자신들에게 가르쳤던 삶의 목표가 거짓이라는 걸 목격했다. 당시 많은 미국인이 앞에선 금주와 청교도 정신을 외치면서, 뒤에선 술과 쾌락을 즐기는 이중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이게 좋아, 그건 별로야’가 옳고 그름을 대신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비극은 한편으론 뉴스와 동영상이 되어 광고를 끌어들이고, 다른 한편으론 정치적, 경제적 이해득실로 계산된다. 우리는 K-방위산업의 수출 실적은 자랑하지만, 그 무기가 누구 손에 들어가 어떤 사람을 죽이게 될지는 묻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면, 좋은 사람인 척하는 위선적인 바보로 취급된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고 하지만, 이건 거짓말이다. 돈은 개 같은 사람을 정승으로 바꾸지 못한다. 오히려 돈은 사람을 개보다도 못한 짐승으로 만들 때가 더 많다.
매킨타이어가 덕이라는 유물을 다시 꺼낸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나 사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공동의 가치, 즉 공동선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후손들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만한 삶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문제는 사회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다. 따라서 그 공동체가 합의한 참과 거짓, 좋음과 나쁨, 아름다움과 추함은 자연스럽게 내 삶의 기준이기도 하다. 공동선은 나와 사회를 하나의 의미공동체로 묶는다.
자기 삶의 기준과 그가 속한 사회의 기준이 어긋나는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잘 쓸 수 없다. 삶에 대한 선택 전에 내가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매킨타이어의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공동체가 결코 잃어버려선 안 되는 가치는 무엇인가? 이 가치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어떤 모습으로, 우리 조상과 나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왔는가? 이 가치들과 나의 삶을 하나로 이어 주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가치들을 덕이라고 불렀다.
나는 『덕의 윤리』를 천천히 눌러 읽었다. 읽을수록 어떤 사람이 또렷해졌다. 김장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2024년 12월, 비상계엄 선포와 그에 따른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스승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사회 지도층에 대한 실망과 심리적 혼란 속에서 김장하 선생님의 삶은 나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되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도, 결국 다시 사람에게서 희망을 찾는 게 사람인가보다.
매킨타이어는 우리의 삶을 실천(practice), 덕(virtue), 전통(tradition)이 함께 쓴 이야기라고 한다.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써 나가는 서사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김장하 선생님의 삶에는 어떤 서사가 숨어 있을까. 나는 매킨타이어가 말한 실천, 덕, 전통의 꼬리말을 따라다니며 생각을 정리해 봤다.
첫째,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실천이란, 공동체 안에서 공동선을 만드는 협력적인 활동을 말한다. 예컨대 의술이나 건축이 실천에 해당한다. 의술과 건축은 사회적 협동을 통해 건강과 안전이라는 공동선을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반면, 도박은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고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개인적 행태에 불과하다. 따라서 매킨타이어가 말하는 실천이 될 수 없다.
김장하 선생님에게 한약방 운영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었다. 선생님이 젊었던 그 시절에는 대부분 찢어지게 가난했다. 하지만 아무리 가난해도 아픈 가족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 사람들은 좋은 약재를 싸게 판다는 선생님의 한약방으로 새벽부터 몰려들었다. 선생님은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에게 번 돈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늘 말씀하셨다. 한약방으로 번 돈은 장학 사업과 지역 복지사업에 쓰였다. 한약방은 약자 돌봄과 정의라는 공동선을 만들어 나갔다.
둘째, 덕은 공동선을 계속 실천하도록 만드는 좋은 성품이다. 덕은 어쩌다 벌어지는 이벤트가 아니다. 우리는 자기 이름을 알리려고 생색내는 금일봉 전달식을 덕 있는 행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덕은 습관처럼 좋은 일을 꾸준히 하도록 만드는 훌륭한 자질이다. 덕은 운 좋게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김장하 선생님은 수십 년간 장학, 문화, 복지사업을 계속 실천하셨다. 한 번도 스스로 언론 인터뷰를 하거나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보답하려 할 때마다 "나는 사회의 것을 너에게 준 것이니, 나에게 고마워하지 말고 사회에 갚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에 덕이 무엇인지 고스란히 들어있다.
셋째, 매킨타이어의 전통(tradition)은 단순히 오래된 관습이 아니다. 전통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윤리적 논쟁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배경이며 판단기준이다. 요컨대 전통이 나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역사적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 속에서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질문할 수 있다. 나아가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김장하 선생님은 우리나라 최초로 백정 해방운동을 기념하는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주도하고 지원하셨다. 또한 진주여성민우회 창립, 여성평등기금 조성, 가정폭력 피해 여성 지원, 진주환경운동연합 등 수십 개의 지역 단체에서 사회적 약자를 돕고 공동체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평생 노력하셨다. 이런 활동들은 진주 지역의 전통 속에서 빛나는 형평, 정의, 평화의 의미를 오늘날 되살리는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개츠비는 자기 창조의 신화를 썼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이야기에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그것이 매킨타이어가 말한 실천, 덕,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문학과 다큐멘터리를 구별하라고 충고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이야기를 신화나 소설로 쓰고 싶지 않다. 내 이야기는 사람 이야기이길 바란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람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개츠비에게 ‘위대하다’라는 수식어를 붙이려고 할 때 주저했던 이유를 김장하 선생님의 삶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개츠비처럼 혼자 쓰는 이야기, 다른 사람의 삶이 빠진 이야기에 대해선 위대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인간이다. 먼지처럼 작은 인간이 이리저리 나부끼는 와중에 자기만의 이야기를 쓴다는 건,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려운 일이 모두 위대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약자를 돌보고 일그러진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있지 않을까. 우주와 역사라는 무한히 큰 이야기를 돌봄과 정의로 읽어낸 것 자체가 놀라운 일 아닌가. 나아가 자기 삶을 돌봄과 정의의 저울에 올려, 수평을 이룰 때까지 자기 이야기를 기꺼이 고쳐 쓰는 사람, 김장하 같은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하고 싶은 인간이다.
나는 내 이야기의 방향을 잡았다. 내 이야기는 개츠비의 신화가 아니라, 김장하 같은 사람 이야기이다. 매킨타이어가 말한 실천과 덕과 전통 위에서 내 이야기를 쓴다면, 그건 분명 신화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런 글쓰기는 나보다 불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을 잊지 않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이제 내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살짝 욕심을 낸다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싶은 이야기, 다른 사람 이야기와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더 욕심낸다면, 후손들에게도 당당하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그런 이야기는 그렇게 산 사람만이 쓸 수 있겠단 생각에 이르니, 저 멀리 초록색 불빛이 보인다.
나는 자기답게 살기 위한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삶으로 초록빛 사람 이야기를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