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불러낸 독후감
요즘 드라마 경도로 기다리며를 재미있게 본다. 생각났다. 옛날에 쓴 독후감이.
에스트라공(이하 ‘고고’)과 블라디미르(이하 ‘디디’)는 고도라는 이름의 어떤 사람을 기다린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다. 고도가 내일 온다는 약속을 대신 전하는 양치기 소년은 고고와 디디에게 두들겨 맞는다. 오지 않는 고도에 대한 궁금증은 계속된다. 고도는 과연 실존인물일까? 그가 내일은 정말 올까? 그러나 무대엔 고고와 디디, 즉 고도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의 기다림만 가득하다.
단 한 번도 짠하고 나오지 않지만
그의 약속이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면
그는 이미 주인공이 아닐까?
고도는 과연 살아있는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고도는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삶 전부를 옭아매고 있다. 이 쯤 되면 질문을 바꿔야할 지경이다. 과연 실존, 즉 진짜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없어도 있는 사람들을 지배한다면 진짜 있는 사람과 뭐가 다를까? 단 한 번도 짠하고 나오지 않지만 그의 약속이 누군가...의 희망이 된다면 그는 이미 주인공이 아닐까?
나는 고도를 포기했다. 내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로 했다. 아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고고와 디디 두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비정상, 바보 혹은 환자 같은 고고와 디디의 말과 행동은 내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기로 하고 안 한다. 그렇다고 말했는데, 저렇다고 말한다. 저렇다란 말에 그렇다고 말한 사람이 옳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이해했다고 말했지만 오해였다. 오해였다고 사과했는데, 오히려 지금은 더 잘된 일이란다.
25년 넘게 같은 회사,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 언젠가 나아질 거라 믿는다. 오지랖 넓게도 자식과 후배들에게 훈계한다. 언젠가 잘 될 거라며 공수표를 남발한다. 긍정하라고 한다. 미래는 밝다고 한다. 10,000시간을 채워 보라고 한다. 그런 시간이 20년을 지나 30년에 다다른다. 그렇게 퇴직한 선배들이 수두룩하다. 나만은 다를 거라 굳게 믿지만, 결국 고도는 오지 않는다.
인생이다. 왜 태어났는지 모른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인생에 딱히 목적이란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 인생이 둘, 셋 모였다고 없던 목적이 생길 리 없지 않은가? 누가 올지 안 올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를 기다릴 것인가 기다리지 않을 것인가는 내가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질문을 바꿔보자. 누군가를 기다릴 것인가? 기다리지 않을 것인가? 나는 누굴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