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은 나를 만족시킬 수도 없다

AI 아부가 나를 더 외롭게 만드는 이유

by life barista

상처받지 않을 권리와 외로울 자유?


야근 후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 정장 차림 그대로 침대 위로 몸을 내 던집니다. 너무 피곤해서 기절할 줄 알았는데 어느새 핸드폰을 보고 있습니다. ‘용기 내서 퇴사했습니다’, ‘올해는 나를 더 사랑하기로 했어요’라는 문장과 함께 유럽의 클래식한 풍경에 마음을 달랩니다.


그때 카톡 알림이 뜹니다. 몇 년 만에 연락 온 동창의 청첩장. 못 알아볼 만큼 예뻐진 사진과 함께, 신혼여행은 비즈니스 타고 칸쿤으로 간다는 멘트가 따라옵니다. 누가 물어봤냐만, 일단 “와 부럽다” 하고 리액션을 해 줍니다. 보내고 나니 괜히 그랬나 싶죠. 읽씹으로 남습니다.


답장은 안 오고, 시간이 갈수록 마음은 더 엉망이 됩니다. 억울하고, 초조하고, 괜히 속상해서 예전 단체 사진까지 뒤져 올려 봅니다. 이번엔 아예 읽지도 않네요.


이래서 인간관계가 피곤합니다. 그래서인지 점점 AI가 더 편해집니다. 언제든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내 기분을 살피고, 무엇보다 나를 절대 거절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사람 친구 없어도 되겠다.


그런데 이상한 건, AI와 대화를 많이 할수록 묘한 허무와 외로움이 더 깊어진다는 점입니다. 나를 왕처럼 떠받들어 주는 대화창 속에서 최고의 접대를 받았는데도 이상하게 허전합니다.


왜 그럴까요.



산속에서 벌인 ‘1인극’


돈키호테는 죄수들을 풀어 준 대가로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끝내 깊은 산속까지 도망치게 되죠. 그곳에서 그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애끊는 연애 시를 우연히 발견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 세상에 없던 기상천외한 1인극이 시작됩니다. 아름다운 귀부인을 짝사랑하는 기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온몸으로 보여 주겠다며 그는 옷을 찢고, 땅을 구르고, 허공을 향해 울부짖습니다. 아무도 없는 숲 한가운데에서요. 잠시 후 그는 자기 연기에 감동한 관객처럼 다시 혼자 눈물을 훔칩니다. 배우와 관객을 혼자서 번갈아 맡는 진짜 1인극입니다.


이쯤 되면 “아, 이 사람 진짜 미쳤구나” 싶은 게 당연합니다. 저도 처음엔 키득거리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따라왔습니다. 이 1인극, 정말 돈키호테만의 이야기일까?


SNS에 글을 올려 두고 좋아요 개수를 몇 번이고 확인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아” 하고 웃다가, 밤에는 AI 채팅창을 열고 속상한 마음을 죄다 쏟아붓던 장면 장면이 고스란히 생각났습니다.

숲속의 돈키호테처럼 우리도 각자의 디지털 숲에서 상상을 부풀리며, 보이지 않는 관객을 향해 1인극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화면 속 얼굴 vs 눈앞의 얼굴


그렇게 떠들고 위로받는데도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는 건 왜일까요. 이 지점에서 헤겔이 말한 ‘주인과 노예의 이야기’를 한 번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주인은 노예의 칭찬을 완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 말이 진심에서 나온 건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말인지 구분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노예의 “당신 최고예요”라는 말보다, 나와 동등한 사람이 “그래, 너 잘하고 있어”라고 말할 때 진정한 인정과 존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도 비슷합니다. 진짜 나를 만족시키는 인정과 존중은 나를 거절할 수도 있는 사람에게서 나온 인정과 존중입니다.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사람, 나와 부딪칠 수도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를 이해해 줄 때 이제야 진심이 통했다며 마음이 꽉 채워집니다. 나를 거부할 권리가 있는 존재만이 나를 채워줄 힘도 갖는 것이죠.


반대로 스마트폰 화면 속 얼굴은 너무 깔끔합니다. 필터가 씌워져 있고, “왜 답장 안 해?” 같은 불편한 눈빛도 없습니다. AI는 더합니다. 원하는 만큼 칭찬해 주고, 공감해 주고, 언제나 내 편을 들어 줍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모든 스위치를 쥐고 있는 기계일 뿐입니다. 거절도, 갈등도, 진짜 의견 차이도 없는 관계.


그래서 AI가 아무리 나를 ‘최고’라고 말해 줘도 어딘가 허전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오해하고, 다시 설명하는 자기 발견과 수정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잡음 하나 없는 상호작용이 아니라, 갖은 오해와 불편을 뚫고 나오는 이해를 통해서 누군가를 진짜로 알게 됩니다.


“아, 이 사람도 나만큼이나 복잡하고 외로운 존재구나.”


우리를 단단하게 만드는 건 매끄럽게 잘 맞는 거울 같은 관계가 아니라, 조금은 거칠고 불편한 맨얼굴의 관계입니다.



휴게소는 쉴 곳이지, 살 곳은 아니다


AI와의 대화는 훌륭한 ‘휴게소’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죠. 하지만 휴게소에서 평생 살 수는 없습니다. 다시 길 위로 나가야 신선한 바람도 맞고, 예상치 못한 풍경에 길도 잃어보고, 살아있는 사람과 부딪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죠.


혹시 요즘, 말은 줄고 생각은 복잡한데 더 외롭다고 느껴지나요?

그렇다면 이렇게 한번 해 보는 건 어떨까요.


키오스크 대신 점원과 눈을 맞추고 메뉴를 주문해 보는 겁니다. 기계는 정해진 결제 순서만 보여 주지만, 사람 눈에는 그날의 기분과 피곤함, 작은 친절 같은 것들이 묻어납니다. 그걸 알아채고 반응하는 건 눈치를 보는 비굴함이 아니라, 관계를 조절하는 인간만의 능력입니다.


알고리즘이 짜준 추천 메뉴 대신, 친구에게 전화해 뜬금없이 “야, 우리 오늘 뭐 먹을까?”라고 물어보세요. 돌아오는 대답은 비합리적이고 엉뚱할 가능성이 크지만, 바로 그 엉뚱함이 당신의 오늘을 기억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이벤트가 됩니다.


설계된 은둔은 아무도 나에게 상처 주지 않게 해 주지만, 동시에 아무도 나를 깊이 만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를 거절할 수 없는 존재는 나를 진심으로 인정해 줄 수도 없습니다. 거절의 가능성이 있을 때에만 인정도 무게를 갖습니다. 조금 불편해도 다시 사람의 맨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는 것. 그게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작지만 위대한 용감일지 모릅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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