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안의 불안, AI 시대에 삶의 목표가 더 중요해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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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정말 제 일을 대신하게 될까요?”
얼마 전 만난 어느 개발자분이 제게 던진 질문이에요. 그분의 눈빛에는 기술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깊고 무거운 불안이 비쳤습니다. 사실 이건 그 분만의 고민은 아닐 거예요. 법전과 판례에 인생을 걸었던 변호사도, 재무제표의 빈틈을 메우던 회계사도 지금 다 비슷한 마음이죠. "이 일을 하려면 적어도 10년은 굴러야 해"라고 믿었던 나만의 영역들이 AI용 질문 몇 줄에 무너지는 걸 보면서, 불안하지 않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전문성’이라는 성벽을 차곡차곡 쌓아 왔습니다. 자격증, 학위, 오랜 시간 몸으로 익힌 기술들. 이런 것들이 인생의 변덕을 막아 주는 든든한 철옹성이라고 믿어 온 거죠. 그런데 지금, AI라는 녀석이 그 성벽을 가볍게 허무는 걸 목격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어 온 세계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고, 심지어 내 생계까지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예상. 이건 단순한 걱정을 넘어, 우리 삶 자체를 흔드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익숙한 지식의 성벽 안으로 더 깊숙이 숨어들 것인가, 아니면 이 흔들림을 인정하고 성문 밖으로 나갈 것인가.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서재 안으로 숨어버린 한 사람
400년 전, 스페인 시골에도 비슷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알론소 키하노. 우리에겐 돈키호테라는 이름이 더 친숙한 인물이죠.
그는 특별히 나쁜 사람도, 무능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었습니다. 대포와 총이 전투를 지배하면서 기사의 창과 갑옷은 점점 쓸모를 잃어 갔습니다. 인쇄술의 발달로 값싼 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옛이야기와 새로운 생각이 뒤섞인 채 쉽게 퍼졌습니다. 기사보다 상인이 중요해지고, 명예보다 돈이 앞서는 시대.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대전환기였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그가 끝까지 붙잡은 건 기사도 소설이었습니다. 책 속에서 기사는 언제나 정의롭고 결국 승리했습니다. 기사가 칼을 들고 달려 나가면 악이 사라지고 세상은 조금씩 더 좋은 곳으로 변했습니다. 알론소 키하노는 그 이야기 속에서 비로소 가슴이 뛰었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책 속에서 그는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불타는 책과 무너지는 서재
돈키호테의 광기가 심해지자, 주변 사람들은 책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동네 신부와 이발사는 그의 책을 하나하나 꺼내 들고 심판을 시작합니다. 어떤 책은 위험한 상상력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버려지고, 어떤 책은 나름 도덕적 교훈이 있다는 이유로 살아남습니다.
당시 이런 검열은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윤리적 기준을 지키기 위한 ‘정화 작업’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신부와 이발사는 책이 인간을 미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고, 지식이 영혼을 구원하거나 타락시키는 힘을 지닌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지식은 지금처럼 ‘내 커리어를 위한 투자’라기보다, 공동체와 신 앞에서 ‘바르게 서기 위한 기준’에 더 가까웠습니다. 수도원과 교회에서 이어진 학문은 자기 실현보다 영혼의 구원 같은 초월적 가치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적어도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과 대답만큼은,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또렷했습니다. 물론 그만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많이 포기해야 했지만요.
시대가 바뀌면서 지식이 향하는 방향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금 우리의 일상을 한 번 떠올려 볼까요. 자녀 학원, 이직 준비, 자격증 시험… 우리를 둘러싼 거의 모든 지식 활동이 곧바로 ‘내 경쟁력’이 됩니다. 지식은 삶의 의미를 묻는 통로라기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한 성능 점수처럼 느껴집니다.
서재와 아카이브 그리고 불안
철학자 미셸 푸코는 한 시대가 무엇을 지식으로 인정하는지를 ‘아카이브’라는 말로 설명했어요. 한 시대가 합의한 지식의 목록 같은 거죠. 돈키호테의 서재에 기사도와 명예가 쌓였다면, 오늘 우리들의 서재에는 학위, 자격증, 검색 기록, 그리고 빅데이터가 쌓여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치 있는 지식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돈이 되거나, 경쟁에서 이기게 해주거나, 효율을 높여주는 지식일 거예요. 자격증과 스펙, 실무 기술이 그렇게 중요해진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무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자기 몫을 극대화하는 생존 수단으로 여깁니다. 이 관점은 분명 놀라운 혁신과 풍요를 만들어 냈지만, 동시에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일상화했습니다.
돈키호테가 잘못한 건 책을 읽은 게 아닙니다. 책 속의 세계관을 현실 위에 그대로 덮어씌운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비슷할지 모릅니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인간’이라는 한 가지 관점만을 현실 위에 덧칠한 채 살아온 건 아닐까요.
목표가 생존뿐이라면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도구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무엇이 삶의 목적인가를 다시 묻지 않는 한, 어떤 시대의 지식과 기술도 우리를 불안에서 해방시켜 줄 수 없습니다.
생존만이 목적이라면, AI는 언제나 내 자리를 노리는 적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효율성과 생산성의 경쟁에서 인간은 결국 기계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삶의 목적을 “이 기술로 어떤 의미와 가치를 만들 것인가”로 옮기는 순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AI는 나의 일자리를 빼앗는 악당이 아니라, 내가 세운 뜻을 이루도록 돕는 착한 조력자가 됩니다.
중세가 강조했던 초월적 가치와 공동체를 향한 관심,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중시하는 개인의 자유와 자기실현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이상과 현실, 나와 공동체의 균형을 이루려면 이 두 관점이 모두 필요합니다. 지적 능력이란 정보를 많이 쌓는 힘이 아니라, 내가 세운 삶의 목표에 맞게 정보를 고르고 삶에 적용하는 역량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능의 설계’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이 기능을 쓰려는가라는 ‘의미의 설계’입니다.
돈키호테의 비극은 서재에서 배운 과거의 세계관을 끝내 수정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의 서재를 통째로 불태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 지켜야 할 신념과 이제 내려놓아야 할 아집을 구별하는 삶의 목표와 그 의미입니다.
A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1. 서재 문을 걸어 잠그고 “결국 예전 방식이 이길 거야”라고 되뇌며 버티기
2. 서재 문을 열고 나와, “내가 진짜 지키고 싶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먼저 묻고 그에 맞는 지식과 기술을 골라 쓰기
돈키호테는 첫 번째 길을 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우리는, 두 번째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AI가 집어삼킬 직업의 운명’같은 영상을 볼 때, 위기감을 느끼는 게 사실입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이미 전부 빼앗긴 사람처럼 무기력하고 불안하기도 하죠.
그럴 때, 이렇게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불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