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놀이 멈추기
돈키호테가 두 번째 모험을 떠났을 때, 세상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돈키호테 1부』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딱 알아봅니다.
“혹시… 그 돈키호테 맞죠? 풍차에 돌진했던 그 기사요.”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돈키호테는 멋진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초라한 갑옷과 숱한 상처에서 정의와 용기를 봅니다. 그는 더 이상 현실에 찌든 노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리워했던 기사도의 화신입니다.
유명세는 치러야 할 대가도 큽니다. 누군가 가짜 『돈키호테 2부』를 내놓고 돈을 벌었습니다. 문제는 가짜 책의 돈키호테가 아주 몹쓸 인간이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책을 읽은 사람들 눈에 돈키호테는 형편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며 당사자가 눈앞에서 해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책에 다 나와 있잖아요. 당신은 그렇고 그런 사람이에요.”
사람들 눈에는 살아 있는 돈키호테보다, 책 속 돈키호테가 더 진짜처럼 보입니다. 이제 그는 순수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책이 만든 캐릭터로 존재하게 됩니다.
사람들과 돈키호테의 입장 모두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도 어떤 이미지로 누군가를 이런 사람으로 정리했거나 나 또한 정리되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유명 유튜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메라 앞에서 울음을 터뜨립니다. 예쁘고 깔끔한 얼굴, 항상 밝고 유쾌한 성격, 감각적으로 잘 꾸며진 방. 그녀의 행복한 삶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고해성사는 충격적입니다.
“사실 저는 우울증 약을 먹고 있어요. 제 얼굴은 AI로 꾸민 가짜입니다. 제 방에 놓인 명품 가방과 고급 가구들도 모두 가짜입니다. 더 이상 저는 가짜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동안 여러분을 속여서 너무 죄송합니다.”
화면 속 잘 팔리는 가짜 나와 지치고 우울한 진짜 나의 간극이 폭탄처럼 터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 이해받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를 아바타로 보여 준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 <써로게이트(Surrogates)>의 설정은 이렇습니다. 실제 인간은 집 안의 캡슐에 누워 있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완벽한 외모를 가진 아바타 로봇(써로게이트)입니다. 이 로봇들은 인간의 오감을 그대로 전달해주며, 사회의 모든 범죄와 질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겨집니다.
어느 날, 써로게이트가 파괴되면서 이를 조종하던 사용자까지 죽는 살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FBI 요원 그리어(브루스 윌리스)는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아바타 시스템 뒤에 숨겨진 거대한 음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인공 그리어 역시 처음에는 써로게이트를 사용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자신의 아바타가 파괴된 후 어쩔 수 없이 ‘맨몸’으로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사실 그리어 부부는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지우지 못할 상처가 있습니다. 사고 이후 아내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자신의 늙어가는 몸, 망가진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어두운 방 안에 가두고, 오직 아름답고 완벽한 모습의 써로게이트로만 남편을 대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 하고 그녀와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길 원하지만, 아내는 이 모든 걸 거부합니다.
진짜 자신을 세상에 공개했던 유튜버와 써로게이트로 진짜 나를 숨기고 싶었던 그리어 부인. 이들이 느꼈던 진짜와 가짜 사이의 거리를 AI와 알고리즘은 더 키웁니다. 다른 사람의 욕망이 되고 싶은 인간의 본성을 플랫폼은 잘 알고 이용합니다. 사람들이 나의 어떤 표정에 오래 머무르게 하는지, 어떤 말투에 크게 반응하는지, 어떤 모습을 따라하고 싶어하는 지를 플랫폼은 끊임없이 계산해 줍니다.
돈키호테가 소설 속 멋진 기사처럼 행동하려는 것처럼, 우리는 AI가 계산해 준 더 괜찮은 나를 향해 삶을 연출합니다. 그러는 사이, 피곤함과 통증, 가쁜 호흡 같은 몸의 신호는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진짜 나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우울감,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자책감, 결국 들키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은 결국 스스로에게 묻게 합니다.
“이 이미지가 가짜 나라면, 진짜 나는 어디 있는 걸까?”
돈키호테 이야기는, 한 인간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고정된 이야기와 그에 기초한 타인의 상상으로 해석된다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는 돈키호테를 영웅적인 괴짜로, 또 다른 누군가는 천박한 노인으로 봅니다. 당사자인 알론소 키하노는 어떤 자리에서도 ‘지금 여기의 나’로 말할 틈을 얻지 못합니다.
몸의 철학자로 알려진 메를로-퐁티는 이런 상황에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가짜 인물(캐릭터)과 고정관념이 실재 사람을 압도하는 시대에 “결국 인간은 무엇으로 세상과 만나는가?”를 묻습니다. 그는 ‘몸’이라고 대답합니다. 영화 <써로게이트>의 아내 매기가 그토록 숨기고 싶던 고통받고 늙어가는 몸이 진짜 세계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겁니다.
메를로-퐁티에게 몸은 우리가 세계를 처음 만나는 ‘첫 번째 지성’입니다. 아이는 말을 배우기 전에 손을 뻗어 물건을 잡아 보고 여러 번 넘어지며 균형을 익히고, 얼굴표정과 울음소리로 기쁨과 분노를 표현하면서 몸으로 세계와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내면화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낯선 골목에 들어서면 지도를 펴기 전에 어딘가 불안한 기운을 몸으로 먼저 느끼고, 위협을 눈치챌 때 머릿속 계산보다 심장 박동과 손이 먼저 반응합니다.
그가 말하는 지각은 이렇게 몸 전체가 내놓는 응답입니다. 몸의 대답을 무시하고 나와 세계의 관계를 캐릭터와 이미지로만 관리할 때, 인간은 점점 현실 속 진짜 자신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한다고 그는 경고합니다.
빅데이터와 AI가 일상을 점령한 지금, 우리는 머리로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정작 몸의 언어를 해석하는 능력은 떨어졌습니다. 하루 대부분을 의자와 모니터 앞에서 보내며 수많은 알림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도, 허리가 언제부터 아팠는지, 눈이 얼마나 말라 있는지, 자다가 얼마나 자주 깨는지 잘 모른 채 짜증만 냅니다. 화면 속에서는 늙지 않는 얼굴과 필터로 정제된 일상이 반복되지만, 실제 조금씩 주름이 늘고 기력이 떨어지며 예전만큼 기억력도 좋지 않다고 몸은 조용하지만 지속적으로 알려 줍니다.
우리는 피로와 통증, 우울과 두려움,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접할 때 아주 잠깐 몸의 건강을 떠올립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건강 비법을 찾아 다시 가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사람은 고통이 없으면 변하지 않고, 상실을 겪지 않으면 지금 가진 것의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병실에서의 긴 밤, 실패한 프로젝트를 정리하는 새벽,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 겉으로 보기에는 쓸모없고 비생산적인 순간처럼 보이지만, 그 시간을 통과한 뒤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몸은 바로 이런 변화를 직접 겪어 새롭게 말하는 나 자신입니다. AI는 이 과정을 대신 겪어주지 못합니다. 화면 속 아바타는 영원히 젊고 상처를 입지 않지만, 아픔을 겪지 않는 존재에게는 성장도, 관계의 깊이도 없습니다.
인간의 삶이 가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늙고 상처 입고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를 돌보고 함께 웃을 수 있기 때문이고, 그 모든 인식은 따뜻한 우리의 몸에서 나옵니다.
가짜 이미지를 고백했던 유튜버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과 만납니다. “속아서 화가 난다”는 반응과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다”는 반응이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이제야 사람 같다. 그래서 더 좋다”
이런 반전은 영화 <써로게이트>에도 등장합니다. 주인공 그리어는 결국 전 세계를 연결한 써로게이트 시스템을 강제로 종료합니다. 그 순간 거리의 모든 아바타가 한꺼번에 쓰러지면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 안에서, 늙고 피곤하고 상처 입은 본래의 몸으로 눈을 뜹니다.
완벽했던 가짜 몸을 갑작스레 잃은 사람들은 큰 혼란과 불편을 겪습니다.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아바타 뒤에 숨었던 아내의 얼굴을 마주합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몸으로 만납니다. 세상은 더 이상 매끈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오다 넘어질 수도 있고, 병에 걸릴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불편하지만 솔직한 삶이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 줍니다.
AI와 비대면 기술이 일상을 장악한 지금, 우리도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며 땀 흘리던 순간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최근에 ‘경도게임’(경찰이 도둑을 잡는 놀이)에 사람들이 다시 열광하는 이유도, 알고리즘이 짜 준 캐릭터를 잠시 내려놓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싶은 몸의 요청일 수 있습니다.
가짜를 고백한 유튜버가 이제야 사람처럼 보이고, 시스템에서 나온 사람들이 다시 자기 몸으로 햇빛을 맞는 장면에 감동하고, 경찰이나 도둑이 되어 뛰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몸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 그 몸은 진짜 있는 것을 느끼고 깨달아 의미를 만듭니다.
인간은 경험한 의미를 토대로 또 다른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 의미가 완벽하고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직접 뛰어들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느끼는 전율은 그 어떤 고해상도 그래픽보다 더 강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전해 줍니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우리를 끝까지 인간으로 남게 하는 것은 결국 몸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