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와 쓰기를 통한 철학상담과 자기치유
가문의 영광이다. 대학원에서 특강을 했다. 이번 학기가 박사과정 수료 학기인데, 지도교수님께서 철학상담 대학원 석사생들을 대상으로 강연 기회를 주셨다. 글을 읽고 쓰면서 위로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읽기와 쓰기를 통한 철학상담과 자기치유'라고 주제를 잡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오직 내가 경험한 것만 적고자 노력했는데, 글쎄다. 아래 글은 특강용으로 발표한 글을 간추린 것이다.
읽기는 글쓴이의 정신과 읽는 이의 정신이 글이라는 의미 공간에서 조율되는 사건입니다. 글쓴이는 자기 생각을 글이라는 약속된 의미 체계 내에서 표현합니다. 주관적인 자기표현을 글이라는 객관적 의미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글쓴이의 생각이 아무리 주관적이고 창의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종국엔 글이라는 객관적인 체계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글이란 어떤 이의 주관적인 마음이 객관적인 의미 체계인 언어와 만나 생긴 또 다른 의미의 구조물인 셈입니다.
읽는 사람 입장에선 자기 앞에 펼쳐진 글을 해독하는 것에 우선 정신을 집중시키게 됩니다. 글쓴이는 자기 생각, 즉 자유롭게 흩어지는 관념의 수증기를 붙잡기 위해 글이라는 객관적인 냉각장치가 필요한 반면, 읽는 사람은 정반대로, 구성된 글이 자기 앞에 떡하니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읽는 사람은 그 글을 시작점으로 해서 자신의 관념을 출발시키게 밖에 없습니다. 결국 읽기는 글쓴이의 주관적인 생각이 객관적인 글로, 이것이 다시 읽는 이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전환되는 작업인 셈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읽기는 고정된 글 안에 갇힌 작가의 정신을 독자가 자기의 자유로운 정신으로 풀어내는 과정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읽기에는 고정된 글을 약속된 범위에서 풀어내는 1차 작업과 작가의 정신을 풀어내는 2차 작업, 이렇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톨스토이가 러시아어로 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어라는 객관적인 의미 체계를 모른다면 톨스토이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생각들에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이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해 준다면 그 전환된 의미 체계 내에서 톨스토이의 생각에 비로소 다가설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읽을 줄 몰랐던 ‘Пожалуйста прости’(어쩌고저쩌고)를 ‘빠잘루이스따 쁘로스찌’라는 한국어 발음으로 읽어내고, 이 말의 뜻이 ‘용서해줘’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서,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일까요? 읽기의 1차 작업이 어느 정도 느슨하게 열린다 하더라도, 읽기의 2차 작업은 얼마든지 단단하게 잠겨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사례를 한 번 볼까요. 제 책 『철학하는 50대는 미래가 두렵지 않다』에 대한 어떤 분의 댓글과 저의 읽기 사례 입니다. ‘나는 책 제목에 나이를 집어넣는 쓰레기 같은 책은 읽지 않는다.’ 이분은 책 제목만 보고 더 이상의 읽기를 거부했습니다. 아예 읽기의 1차 작업조차 하지 않은 것이죠. 그가 쓴 글을 저는 이렇게 읽어보았습니다.
‘그는 책 소개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많은 출판사로부터 다양한 책을 받아 소개를 해야 하는데, 최근 4~50대를 타켓으로 하는 책들이 제목에 나이를 넣어 출간되었고, 그 중에는 그가 보기에 함량 미달인 책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 중에 내 책을 만났고, 보자마자 읽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쓰레기’라는 단어는 바로 이런 자신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 자신의 짜증을 읽기 거부로 명확하게 드러낸 그의 직선적 표현방식에서 그의 기분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그걸 스스럼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기준에 대한 확신도 한몫했겠지만, 쓰레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걸 보면 최근에 매우 불쾌한 사건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럴 땐 책을 읽기보단, 좀 쉬는 편이 좋다. 내 책 읽기를 거부한 그의 결정은 과격하지만, 적절해 보인다.’
이러한 읽기를 통해 저는 1차 읽기에서 표출된 부정적인 이미지를 걷어내고, 2차 읽기를 통해 그들의 주변 상황과 마음 상태에 공감하며 나름 조언까지 해 보았습니다. 만일 위 두 사람을 대상으로 상담할 수 있다면 이런 읽기가 과연 정확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담이 아니라, 독자의 반응을 조사 중인 저자로서는 ‘쓰레기 같은 책’이라는 참혹한 평가는 아프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제겐 일단 저의 마음을 보호하고, 앞으로 글쓰기를 계속 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읽기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철학상담의 관점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 제가 가진 관련 지식을 저의 세계관과 인간관에 맞춰 반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최근 출판 동향이나 출판업을 둘러싼 업계 관행들을 모은 후, 제 책을 평가한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저의 읽기는 독자들의 부정적인 의견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 나아가 독자들을 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날 제 컨디션이 썩 좋았던 모양입니다. 부부싸움이라도 했다면 1차 읽기부터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차 읽기에 실패했다는 것은 해당 단어나 문장이 가진 ‘사전적 의미’와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읽는 걸 말합니다. 앞서 나온 독자들의 반응을 읽고, ‘오늘은 정말 재수 없는 날이군.’ 또는 ‘지들이 뭘 안다고 저런담.’ 이런 식으로 읽는 것입니다. 따라서 읽기와 쓰기는 내담자의 지금 기분은 어떤지, 사건과 관련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 지식을 어떤 기준으로 배치하고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는지, 이 모든 걸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힘을 가졌는지,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입장까지 고려하는 여유가 있는지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정보는 내담자가 말하거나 듣는 태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읽기와 쓰기가 이런 태도들과 다른 점은 즉각적이지 않고, 일정한 시간을 둔다는 점입니다. 읽기와 쓰기는 말이나 듣기처럼 자신의 내면을 빠르게 통과한 행동이라기보다는, 잠시나마 한 템포 멈췄다가 나온 행동입니다. 읽은 후 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죠. 그래서 읽기와 쓰기는 독자가 머문 시간만큼 마음이 좀 더 많이 묻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읽은 후 글을 쓴다면 자기 마음을 객관화할 수 있어 생각이 좀 더 깊어진다고 믿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은퇴 불안으로 아픈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글이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뭔가 한다고 하면 일단 힘이 들어갑니다. 그만큼 애쓴다는 것인데, 애를 쓸수록 돌아올 보상에 대한 기대도 커졌습니다. 잔뜩 기대하면 할수록 실망이 더 크더군요. 그래서 이번엔 제가 읽고 쓴 서평을 모아서 저를 위한 책을 썼습니다. 제가 겪은 거니까 가볍게 쓸 수 있었고, 쓰면서 즐거웠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오십 줄에 들어서 회사에서 뒷방 늙은이 역할을 맡아야 하는 요즘, 후배들이 먼저 승진하는 요즘, 낙하산으로 온 임원에게 이유 없이 미움받고 있는 요즘, 화초 이름을 외우고 단풍을 쉴새 없이 사진찍고 있는 요즘, 이유없이 몸이 아파오는 요즘, 이 요즘에 연달아 발생하고 있는 마음의 이상기후를 읽기와 쓰기로 차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철학 수업시간에 얼핏 배웠던, 자기치유를 맛본 것입니다.
말로 하건, 글로 하건 상담은 이야기가 뿌리가 됩니다. 철학상담도 이야기를 통해 전개됩니다. 여러분은 내담자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듣고 나서 상담일지에 쓰고, 그 내용을 여러 번 읽으면서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얻은 나름의 생각을 다음 회차 상담에 적용하게 될 것입니다. 즉, 상담자 역시 내담자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상담자들이 내담자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느냐에 몰두한 나머지 자신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철학상담은 족집게 무당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까지 모두 깨알같이 챙겨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의 이야기와 상담자의 이야기를 조화롭게 계속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종국엔 내담자가 자신을 위해 긍정적이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도 철학상담의 한 가지 장점이 아닐까 합니다.
상담자를 자기 발로 찾아온 내담자는 현재 자신의 이야기를 불행한 방향으로 쓰면서 여기에 문제를 느낀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계속 이어지는 특성이 있더군요. 게다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처럼, 좋은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를 낳고, 나쁜 이야기는 나쁜 이야기를 낳더라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따라서 철학상담자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잘 들어야 하지만, 결코 내담자의 이야기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속에 함께 있으면서도, 이야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준 이야기를 계속 찾고 머리에서 이를 놓아선 안 된다고 봅니다.
누군가 저에게 철학상담 대학원에서 뭘 배웠냐고 묻는다면, 저는 상담자와 내담자가 함께 써 나갈만한 가치 있는 기준 이야기를 배웠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깊고 다양한 철학의 우물에서 기준 이야기라는 생수를 긷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는 이제 나올 책에서 제가 맛본 기준 이야기를 적용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누구인가? 지금 내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곧 나이다.’, ‘평생 찾던 아름다움은 자기 자신이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행복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는 의식이다.’, ‘누군가 우리가 잘했다고 봐줄 때,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자신에게 진정한 기쁨을 가르치고 또 가르쳐라.’, ‘모든 인간은 샴쌍둥이다’ 등등입니다. 별 내용 아니죠. 식상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런데, 저 이야기들이 어떤 사람의 삶을 관통해서 나오면 전혀 다른 힘이 느껴집니다. 사람이 변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20년 넘게 반복했던 일이 새로워졌습니다.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마음도 가벼워졌습니다. 그러더니, 세상과 사람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나, 가끔 행복하다는 느낌까지 받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서 여러분 자신이 먼저 자기상담을 하고, 자기치유를 경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상담하다 보면, 내담자에게 알맞은 읽기와 쓰기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의 상담현장에서 제가 했던 행복한 고백이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