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자라지 못한 내 안의 '아이'를 함께 키우는 '육아'
나는 어제의 나를 밟고 일어서야 했다.
여기에서 어제의 '나'란 잠자기를 좋아하던, 게임을 즐겨하던, 꾸미는 것을 기꺼워하던 기타 등등의 모든 나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육아는, '나'라는 사람의 자아는 저 먼 우주 어딘가로 던져지고 '엄마'라는 새로운 나의 자아가 깨어나며 시작된다.
누군가 그랬다. 엄마는 강하다고.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더 정확한 표현으로 고쳐주고 싶다. '엄마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
아주 짧은(?) 보육교사 이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리고 꽤 오래 초중등 국어 강사를 했던 사람으로서 당차게 시작했던 육아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어떤 것이었다.
무엇보다 남의 집 아기는 예뻐해 주다 보면 자기 집에 가는데, 우리 집 아기는 집엘 안 간다. 하하. 맞다. 여기가 너희의 집이었지. '아들', '둘', '연년생'을 키우다 보면 가끔 정신을 놓곤 한다. 자녀가 셋 이상이신 분들께는 경의를 표한다.
날벼락은 시도 때도 없이 몰아쳤다.
하루는 바나나 꼭지가 까져서 어느 날은 눈앞의 귤이 없어져서(방금 자기가 먹어 놓고...) 때로는 엄마가 자기 변기 물을 내려서 운다. 울고 또 운다. 설득도 설명도 통하지 않는다. 상황이 개선되기 전까지는 계속 운다. 이럴 때 전문가들을 말한다. 아이의 마음에 공감을 해주고,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린 후 차분히 설명해 주라고. 우리는 지성인이지 않은가? 그러니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기로 한다.
나: 우리 준이가 바나나 꼭지가 까져서 속상했어?
아이: 으앙~~
나: 바나나 꼭지가 까져서 속상했겠다. (내 말을 못 들은 건가 싶어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해 본다)
아이: (더 크게)으앙~~
나: (인내) 마음 다 진정되면 말해줘.
아이: 으아앙~~
나는 더 기다리지 못한다. 그리고 어딘가를 가리킨다. '어? 저기 봐!' 아이가 고개를 홱 돌려 내가 가리킨 어딘가를 보는데, 물론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울음은 잠시 멈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한 아이는 다시 더 크게 울기 시작한다. 더 큰 벼락이 몰아친다. 나는 그걸 더 기다리지 못한 불과 15초 전의 나를 원망한다.
그나마 한 아이만 그러면 덜 괴로운 편이다. 두 아이가 동시에 떼를 쓰며 울기라도 하는 날엔 부부싸움이 터진다. 왜 그게 엄한 부부 문제로 번지게 되는지는 겪어보면 알게 된다. 이 내용은 다음 편(육아로 인한 부부 전쟁 발발을 막는 협상의 비밀)을 통해 다시 한번 다루도록 하겠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고 나면 평화롭지 않은 평화가 찾아온다. 그래서 아이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아이의 울음 패턴을 찾기로 한 것이다. 물론 아이의 울음은 어떤 패턴이나 규칙을 찾기가 어렵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게 육아를 더 괴롭게 한다. 또 아이마다 싫어하는 포인트가 모두 다르다. 그래서 육아 책이나 영상을 아무리 찾아봐도 내 아이에게 맞는 걸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려운 것이지 잘 들여다보면 보인다.
우선 우리 아이들의 패턴은 이랬다. 첫 번째, 스스로 하고 싶어 한다. 자기가 영역 표시한 변기의 물을 다른 사람이 내린다거나, 시간 없을 때 밥을 떠 먹여주려 한다거나, 목욕하러 들어갈 때 자기 옷을 벗겨주면 발작 버튼이 눌린다. 그래서 이젠 '이거 엄마가 해 줘도 될까?'하고 먼저 물어본다. 그럼 적어도 날벼락은 피해 갈 수 있다.
두 번째, 형제이다 보니 장난감을 가지고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물건을 구분해 주었다. 형의 물건에는 하트 스티커를, 동생의 물건에는 동그라미 스티커를 붙여주고 각각 다른 상자에 담아 두었다. 그 후로는 적어도 이 부분에선 약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세 번째, 분석이 불가한 부분이다. 이건 그냥 몸으로 겪고(?) 체득하는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바나나 꼭지가 따져있는 걸 준다거나, 껍질을 까서 주는 행위를 무척 싫어한다. 이런 건 그냥 주의해야 한다. 그게 왜 싫은 건지는 엄마인 나도 모른다. 하지만 싫다고 하니까 그냥 안 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좋은 부모란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할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를 위해서. 하지만 좋은 부모가 되는 법에 대한 건 보육교사 매뉴얼에도 없다. 그저 성장 단계별로 적절히 제공되어야 할 것들에 대한 지식이 있을 뿐. 그래서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우리는 지금과 같은 양육을 받아보지 못한 세대가 아니던가. 누가 어린 시절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줬으며, 누가 우리의 마음에 공감해 주었는가. 어른들 시선에서 재단된 우리의 어린 시절은 대부분 무관심과 체벌로 얼룩졌고,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는 나의 어린 자아는 아직 채 한 뼘도 자라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우리는 그 받아본 적 없는 '양육'을 아이들에게 주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그런 자신이 짠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가 되었는데 그렇다고 멈춰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 아이가 나와 똑같은 수순을 밟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도를 닦는 마음으로 인내해야겠지. 가끔 진짜 내가 죽으면 몸에서 사리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렇다고 필자를 너무 짠하게 생각하지 마시기를. 아들 둘 연년생은 혹, 그대에게도 찾아올 수 있는 일이니까. 나라고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 물론 악담은 아니다. 아들 둘 연년생 정말 사랑스럽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그 찬란한 순간은 이후 '주옥같은 명대사 모음. ZIP'을 통해 전달해 주도록 하겠다.
아무쪼록 우리는 부모가 되었으니 '어제의 나를 밟고 일어서'야 한다. 뻔한 말일 수 있지만 그러려면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의 나를 내가 먼저 돌봐야 한다. 그래야 육아도 가능해진다. 혼자 하는 것이 어렵다면 배우자나 친구 혹은 상담 선생님께 도움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필자는 상담 치료를 통해 꽤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면 여러분 모두 오늘의 육아에서 살아남으시기를 바라며 건투를 빈다.
P.S.
문득, 혹여나 아이가 나중에 이 글을 보고 '엄마 내가 그렇게 힘들었어?'하고 마음 아파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그래서 미리 말해주고 싶다. '너라서가 아니야. 세상의 모든 아이는 어린 시절 감정 다룰 줄을 모르고 차근차근 어른들에게 배워나가. 그러니까 이건 엄마가 엄마이기에 응당 겪어나가야, 이겨내야 할 일들이야. 엄마가 되기로 한 자의 책임. 그저 엄마가 엄마일 수 있게 해줘서, 더 큰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줘서 고마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