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새로운 환경에의 도전에 대한 열정을 되찾고 싶은 분들께
나는 서른 살에 대학원에 지원했고, 정확히는 서른한 살에 합격장을 받았다. 학부를 마치고 바로 석박사 통합과정을 거쳐 학문의 길을 추구하는 친구들 대비 늦은 나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 설레는 일이기도,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지만, 사회 초년생 시기를 거쳐 약 7년간 직장생활을 하며 이제야 커리어가 안정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 직장인 현대카드에서 제공하는 복지와 보수에 불만족한 것도 아니었기에, '석사를 하면 최소 2년 동안 수입이 없어질 텐데 괜찮을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안정적으로 월급 나오는 회사를 그만두고 떠날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움직이게 한 동력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개인마다 터닝 포인트에서의 트리거는 다르겠지만, 한국 대기업에서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조직에 배치되면, 항상 나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달리곤 했다. 이직해서는 최소 6개월, 새 회사에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프로젝트 조직에 불려 가면 나를 이끄는 리더에게 나를 뽑은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조직에서 주어지는 목표는 대부분 나에게 선택권이 없었고,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절차나 시간이 부족했다. 아니 사실 전무했다. 물론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쏟는 노력이 개인의 궁극적인 커리어 발전이나 인생 목표와 연관이 되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은 너무도 받아들여야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성공하는 스타트업이 인재를 설득하고, 팬덤이 강력한 브랜드가 고객을 끌어당기기 위해 브랜드 철학을 역설하듯, 소처럼 일하는 직장인에게도 'Why'는 필요했다. '왜 잘 진행되던 프로젝트를 그만두고 새로운 업무를 하러 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결여된 상태로 몇 번의 사이클을 돌다 보니 번아웃이 왔다.
4년 간의 시간 동안, 서로 간의 연관성이 적거나, Data Science 본부의 Data Service 실에 소속된 Software Engineer에게 주어져야 할 일인지 모를 업무가 랜덤 하게(?) 배정되었다.
1) 쇼핑 검색 앱의 검색 성능을 높이기 위해, 다른 검색 엔진 사이트가 어떤 기준으로 자사 결과 페이지를 평가하고 있는지 논문을 찾아보고 이를 자사의 평가표로 만드는 작업,
2) 해외송금 앱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외환 영역으로 금융 서비스를 확장하기 위한 신사업 기회를 모색하는 일,
3) 마이 데이터 사업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유럽의 GDPR과 같은 글로벌 규제를 살펴보고, 자사의 레거시 데이터를 어디까지 어떻게 제공할지 규칙을 정하는 일 등
누군가에게는 각각 모두 의미 있고, 장기적으로 커리어 성장에 도움이 되는 업무라고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선택해서 주어졌거나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한국의 대기업에는 개인을 위한 Career discussion 기회가 없었고, 평가 후에 매니저와 리뷰하는 시간도 없었다.
문제는 내가 What이 주어질 때마다 전속력으로 달렸다는 사실이다. 일단 하라고 하니 열심히 잘 해내고 나서, 나를 신뢰하게 되면 그때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몇 번의 사이클에서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혹자는 '직장생활을 연애에 비유하면, 굳이 모든 것을 올인하기보다는, 썸 타는 관계 정도로 유지하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다만 3년 6개월 넘게 나 홀로 '그럼에도 이 직장이 좋은 이유'를 찾아내는 짝사랑을 했던 것 같다.
많은 한국의 젊은 이들이 대학 졸업 후에 기업에 입사해서, 조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타인의 인정을 중요시하던 사람이었다. 개인의 성향이나 강점을 파악해주는 Strength finder를 비롯한 심리 검사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승진이 밀리면, 실망해서 회사를 떠날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조직원들이 '저 사람이 우리 팀에 있어서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앱 비즈니스를 하던 본부에 있을 때는, 시니어(10년 차 이상)와 주니어(8년 차 미만)가 페어로 매칭 되어 프로젝트를 하곤 했는데, 과장님 차장님들이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으로 나를 뽑는 것이 목표인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회의록 깔끔하게 작성하기, 정보 보안에서 zero defect (=적발건수 0) 달성하기, 엑셀 시트를 자동화하기, 회사의 복잡한 데이터 구조 속에서 원하는 테이블을 얻기 위해 데이터 추출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와 같은, 충실한 서포터로서의 역량만 길러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같은 시간에 대학 동기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머신러닝 분야의 Guru가 되어있기도 하고, 브랜드를 창업해서 키우기도 하고,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있기도 했는데, 내가 하루의 대부분을 쏟고 있는 노력들은 오롯이 나를 위한 역량으로 쌓이지 않고 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둔 결과물이 회사에 쌓이고 나서 일부라도 나의 것이 되는지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나와 비슷하게 데이터 업계에 종사하다가, 직장생활 5년 차에 로스쿨에 들어가서 현재는 변호사가 된 지인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분의 로스쿨 진학 동기 또한, 조직에서의 노력이 나에게 남기는 것이 적었기 때문이었기에, 둘이서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데이터 컨설팅을 통해 여러 회사를 돕고, 매출을 신장시켰는데,
이직 시장에서 나는 이름 없는 주니어 애널리스트였다
- 변호사가 된 S 선배
Private 기업에서의 업무 성과와 비교하면, 누가 뭐래도 학위는'내 것'이었다.
내가 노력해서 공부한 결과물은 그 누구도 '다음 목적지로 떠날 때 두고 가라'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7년 차 직장인이었던 2020년, 나를 위한 비싼 투자를 하기로 결심한다.
30대 이후의 삶에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내가 존재할 예정이었다. 결혼 후에는 누군가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혹은 엄마로서, 작은 조직의 리더로서, 내가 누릴 풍요로움에 따라 마땅히 감수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예측되었다. 더 큰 가족이 생기면, 내가 벌어둔 수입이라 할 지라도, 나 혼자만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합리적 의문이 들었다.
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우리 엄마는, 딸 둘을 키우면서 잠시 목표를 뒤로 미뤘고, 대학 강단은 아니더라도 교육업에 종사하셨다. 사람을 둘이나 '제대로' 키워내려다 보니 '잠시'는 이내 20년이 되었고, 결국 큰 딸이 대학을 졸업하는 시기가 되어서야 원했던 대학원 공부를 마치실 수 있었다.
엄마가 평생 보여주신 '끊임없이 배우는 모습'은 자연스럽게 우리 자매에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축복받은 기반이 있는 것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더불어 30대가 되면서 내 또래 주변에 아픈 사람이 늘었다. 아픈 부모님을 부양하는 친구들이 늘었고, 본인이 갑작스럽게 아픈 경우도 있었다. 이전에는 가족을 부양할 능력 자체가 나에게 없었던 20대였기에 오직 보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는 원하면 공부할 수 있지' 생각했던 나의 어렸던 생각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에 나의 주요 인생 지침이 되기도 한 Jin.K.Park님의 하버드 졸업식 스피치 문구를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의 인재를 키워내는 데 얼마나 많은 사회적 자원과 노력이 뒷받침되는지 알 수 있다.
"Our talents are the collective/common asset of the society - Jin.K.Park"
*심지어, 일을 하면서라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최소한 급히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없다는 뜻이며, 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있더라도 짬을 내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 그 일을 지지해주고 조금이라도 집안일을 더 맡아주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공부 혹은 자기 계발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있다면, 절대로 소수의 유리한 환경에 있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길 당부드린다.
결국 개인이 인생에서 오롯이 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길게 주어지기 쉽지 않기에, 아직 젊은 나이에 그 기회를 잡겠다고 생각했다.
목차
* Intro - 내 돈 벌어 하는 공부, 그 여정에서 만난 멋진 순간들
» 서른에 대학원을 간 이유
» 시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 학풍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 내가 예일에서 배운 것들
» Side effect를 고려하라
» 석학들이 영광스럽게 찾아오는 곳
» 표절에 관용은 없다
» 오피스아워 - 교수님의 단골 과외 손님
» 일 잘하는 교직원
» 잘 못 넣은 로스쿨 수업
» 모두가 넘쳐나는 논문 과제 속에 고통 받고 있다
» 정의는 다양하게 정의된다
» That's a good question
»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수업
» Diversity, diversity, diversity
» 학교는 거대한 박물관
» 예일대 학생들의 공통점
» psychological safety
» 신선한 충격, 특별한 수업들
» 그들이 천재소리를 듣는 이유
» 환경 대학원에서 배운, 문명에 대한 감사함
» 현재 진행형인 토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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