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나는 그런 상황들 '덕분에'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
지난 3년,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우리의 삶이 많이 바뀌었다. 2020년 초, 나의 대학원 진학 시점은 전세계가 패닉에 빠졌을 때였다. 모든 해외여행이 중지되었다. 아직 백신이 없었기에, 일단 외출을 줄이고 모든 만남은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다.
합격은 했으나 바로 미국에 갈 수는 없었다
일단 우리 학교도 중국인 학생들의 비자 발급이 중단되어 수많은 박사생들이 미국 땅을 밟지 못했다. 신학기는 9월에 시작하는데 여름까지 한국도 비자 심사가 재개될 지 미정이었고, 이 때 많은 한국 학생들이 입학을 미루거나 첫 학기를 한국에서 시작하는 것을 선택했다. 대부분의 강의가 온라인으로 개설되었기에, 나 또한 첫 학기를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수강하기로 결정했다.
3박 4일 동안 진행되던 OT도 온라인으로 대체되었고, 신입생들은 서로를 줌(Zoom) 화면을 통해 만났다.
제한된 상황속에서, 수면 아래 나의 오리발은 더 바쁘게 움직였다.
어지러운 시국 속에서도 긍정적으로 돌이켜볼 일들이 많았다. 특히 나는 아시안 학생으로서 온라인 강의의 특장점을 오히려 많이 발견하였는데, 오늘은 그 중에서 다섯가지만 꼽아보고자 한다.
Yale은 다양한 학생들의 다양한 환경을 존중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1학년 전체가 들어야 하는 필수 강의의 경우 다양한 time zone을 고려하였고, 특히 낮과 밤의 시계가 정반대인 아시안 학생들이 들어올 수 있는 시간대에 배치되었다. 그래서 나의 시간표는 주로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 저녁 10시~새벽 2시 사이에 채워졌고, 낮 시간이 비는 덕분에 일과 학업을 병행할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일반적인 대학원 수업은 기본적으로 출석점수 차원의 토론점수를 요구했다. 전체 점수를 100이라고 했을 때, 내가 들었던 1학년 수업들은 토론 20 / 개인과제 20 / 조별과제 20 / 개인 논문 30 / 퀴즈 10 정도로 나눠져 있었다. 수업에 참여하기 전, 할당된 논문 3-4개를 읽고, 수업 중에 자신의 의견을 공유해야 수업에 진짜 참여했다고 여기는 듯 했다.
평소 토론을 중요시하는 문화 때문에 반드시 Real-time으로 수강하면서 토론할 것을 요구하는 수업도 있었지만, 코로나 시국을 고려하여 50% 넘는 수업에서 Asynchronous attending, 즉 녹화 버전으로 수업을 수강할 수 있게 허락해주기도 했다. 이 덕분에 나는 마치 헤르미온느의 시계(!)를 가진 것처럼, 동시간대에 진행되는 수업들을 하나는 실시간으로, 하나는 녹화버전을 통해 수강할 수 있었다.
*헤르미온느의 시계(Time Turner):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마법 물건으로 헤르미온느가 수업을 듣기 위해 맥고나걸 교수가 준 시간을 되돌리는 물건. 모래시계를 한 번 돌릴 때마다 1시간씩 과거로 돌아간다.
대신 녹화버전으로 수업을 들을 때도, 수업 시작 전에 반드시 게시판의 해당 수업의 주제에 대한 나의 의견과 근거를 'Discussion paper(토론 주제 제안)'라는 이름으로 올려야했고, 다른 수강생들의 페이퍼 3개 이상에 나의 생각을 댓글로 달아야 했다. 이 토론 주제를 제기할 때 생각보다 까다로운 측면이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1) 업로드 된 사전 논문 3개에서 직접 제시되지 않은 주제여야 하며, 2) 구글링으로 쉽게 답을 검색할 수 있는 내용은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다 - 라고 제한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다.
게시판에서 열띈 토론이 이어진 주제 혹은 다룰 만한 포인트를 골라서 강의 중에 한 번 더 토론이 이어졌는데, 녹화버전을 보다가 내 주제가 다뤄진 것을 볼 때면, 수업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 같아서 뿌듯했다.
온라인 course 는 강의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 학창시절 외워야 하는 내용이 있으면, 녹음해서 듣고는 했었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주요 부분을 구간 체크해놓고 1.5배속으로 계속 다시 들을 수 있으니 편리했다. 대학원 강의에 암기식 수업은 없었지만, 최초에 개념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생소한 구조나 단어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했다.
추후에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겠지만,"Perspective"라는 수업에 매주 석학들이 찾아오고는 했는데, 평소에 절대 들을 수 없는, 놓칠 수 없는 한 마디 한 마디를 recording으로 다시 들을 수 있어 특별했다.
강의 시스템에서는 녹화 강의에 자동 생성된 Caption 탭을 제공했다. Native인 친구들은 자막이 필요 없을 수 있지만, 나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기능이었다. 말이 빠르신 교수님의 설명을 따라갈 수 없을 때도 있었고, 생소한 학문 용어들은 아무리 다시 들어도 미궁속이었다. Caption탭의 스크립트는 자동생성된 결과였기에 100%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잠시 멈추고 보면서 단어를 추론할 수 있었다.
Caption 스크립트의 경우, 누구의 발언인지 꽤나 정확하게 구분해주어서 중간에 학급 친구들이 마이크를 켜고 질문한 내용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업 중에 오갔던 채팅창을 확인할 수 있는 Discussion 탭도 유용했다.
신기하게도 코로나 시국에 학생들의 수업 정시 참여율은 99.9%에 달했다. 아무도 늦지 않고 정시에 줌을 통해 클래스에 접속했다. 통학에 시간이 소요되지 않고, 통학길에 도로에서 마주할 수 있는 변수도 없고, 설령 조금 초췌한 모습이더라도 적당히 마스크를 쓰고 참석할 수 있었던 덕분인 것 같다.
코로나로 미국에 입국 비자를 받지 못해 전 세계에서 수업을 듣는 학우들을 위해 대부분의 수업이 아침 일찍 혹은 저녁 늦게 진행되었는데도, 모두 방금 막 일어난 모습으로도 수업에 들어왔다.
그 중에서 MBA & Environment 과목 중 하나였던 Fundamentals of working with people은 현지 시간 아침 8시에 수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침대에서 바로 접속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퇴근 후 밤 10시에 접속하는 나를 비롯한 친구들을 위해 교수님은 항상 "Good morning, Good evening, and Good night everyone!" 하고 시작 인사를 건네곤 하셨다.
학생들 중에는 코로나로 인해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져 돈을 벌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는 김에 시간이 날 때 조금씩 일하기로 마음 먹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나처럼 낮에는 Full-time 업무를 하고, 저녁과 주말을 할애해서 Full-time 수업을 듣는 경우는 잘 없었기에, 교수님들께서 조금 더 기억해주시는 편이었다.
재미있게도, 내가 코네티컷 기숙사에서 지냈던 시기, 같은 클래스 친구의 배경 속 창문이 내 방과 비슷해서 같은 건물에 산다는 것을 발견한 적도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기숙사 건물 라운지에서 티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가끔 수업에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빠르게 구글링을 하고, 교수님이 사전에 전달 주신 논문 pdf 에서 해당 부분을 찾아갔다.
내가 하고싶은 얘기가 있는데, 조금 더 세련된 문장으로 말하고 싶을 때에도, 일단 빠르게 네이버 파파고 창을 켜고 영어로 내용을 적었다. 내가 적은 영어 문장이 한국말로 정확히 번역이 안되는 경우, 가운데 화살표 버튼을 눌러서 영문 <-> 국문 <-> 영문을 오가며 정확한 표현을 찾아냈다.
만약 현장 강의였다면, 그렇게 신속하게 수업 내용을 따라가기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나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신기하고 감사하게도, 6개월 정도 지나니 문장 구사를 위해 파파고의 도움을 얻을 일은 거의 없어지고, 학술적 용어를 구글링하는 일이 더욱 많아졌다.
교수님들은 온라인에서도 양질의 수업을 제공하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수업 중간에 소수 그룹을 만들어서 토론을 하게 하고, 다시 전체 수업으로 모여서 토론 내용을 공유하는 방식은 거의 매일 활용 되었다.
특히 재밌었던 케이스들이 너무 많지만, 그 중 떠오르는 몇 가지만 공유하고자 한다.
1) The Wreck Havoc
어느 날 MBA 클래스에서는 The Wreck Havoc 이라는 게임을 곁들인 협상 수업을 하게 되었다. 이름도 어려운 이 게임은, 사전에 룰이 공유되지 않고, 일단 부딪혀 보면서 게임의 방식과 성공 방정식을 습득해야만 했다. 랜덤하게 배정된 미국, 중국, 캐나다, 독일 등의 국가 명들을 팀명으로 달고, 각 단계별 문제를 풀어서 자원을 획득한 후, 이 자원을 가지고 국가별로 연합(Alliances)을 맺어야 했다.
나는 United States (미국) 팀이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각자 자신의 비교우위를 신속하게 발휘해서 팀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분업이 이뤄졌다. 문제를 빨리 푸는 나를 비롯한 몇 명의 팀원들이 '자원'을 획득하는 동안, 우리 팀 Kevin이 다른 국가 진영에 찾아가서 상대의 자원 리스트(자본, 함대 등)를 파악했고, 전략가인 Brooks와 함께 어떤 국가들과 연합해야 최고의 진영이 나올지 고민한 후, 협상을 하러 떠났다.
보통 이런 게임에서는 비등비등한 상황에서 가까스로 승리를 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이 날은 우리 진영이 비슷한 자원으로 연합을 이용해 압승을 거두었던 드문 케이스였기 때문에 특히 기억에 남는다.
2) Change Management Simulation:Power and Influence
하루는 하버드 MBA에서 고안했으리라 추측되는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2인 1조로 게임을 진행했다.
임의의 회사 A가 있고, 해당 조직에서 나와 짝꿍이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정해진다. 시간 내에 목표 달성을 위한 Critical Mass(최소량)에 도달하기 위해, 조직 변화를 감지하고, 조직 내에서 반대하는 사람과 찬성하는 사람을 찾고, 목표 달성을 위해 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때로는 조직 전체와 소통하기 위해 타운홀을 열거나, 알림을 보내기 위해 Newsletter를 쓰기도 하는 등,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옵션 중에서 무엇을 먼저 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 관건인 활동이었다.
특정 액션을 취하고 나면, 바로 게임 내에서 시간이 1~2주씩 흐르고, Score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예컨대, 타운홀을 열어서 의견 청취를 하면 진척률이 5% 올라가고, 전체 직원 중에서 찬성하는 사람의 숫자가 올라가는 식이다. 조직도에서 인물별 찬성/반대 사유와 인간관계도 표시되는 등 다양한 변수를 고려하도록 고안되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 활동에 Priority (우선순위) 와 Right order(접근 순서)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조직 변화의 초창기에 효과가 있었던 Newsletter 등은 후반부로 갈 수록 효과가 반감되고, 디테일한 리서치 등으로 오피니언 리더를 공략하는 것이 주요한 순간이 왔다.
결국 우리는 제한시간 2분을 남기고 Critical Mass에 도달할 수 있었고, 다른 조보다 빠르게 Main Room으로 복귀했다.
평소 다른 활동에서는, 혹여나 팀이 더 나은 방향으로 진전되는 것을 방해할까봐, 스스로 성공방정식을 충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의견 내는 것을 자제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는 팀원이 '나 대체 이거 어떻게 하는건지 모르겠어' 라며 헤매는 동안, 내가 제안한 시나리오가 성과를 거둬서 기억에 남는다.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서 느꼈던 것들을 반영해서 전략에 도입했을 때, 스코어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뿌듯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서 나는 MBA 수업이 비즈니스 전략, 협상 전략을 매우 밀도있게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현업에서 근무를 하면서 '학교에서 얼마나 배우겠어'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오히려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코어 근육을 빠르게 습득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 마치며
이처럼 내가 당시에 수업을 온라인으로 듣지 않았다면, 업무와 병행하며 전과목 H(Honor)를 받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혹시 온라인 수강을 예정하고 계시다면, 조금 더 기분좋은 설렘으로 시작하시게 되길 바란다.
*Yale graduate school grading system (예일 대학원 성적 기준)
Criteria for each grade are the prerogative of individual faculty; however, the School uses a standard numerical system for converting scored tests and assignments to the grading system, as follows:
H - Honors (92–100)
HP - High Pass (83–91)
P - Pass (74–82)
F - Fail (73 and below)
목차
* Intro - 내 돈 벌어 하는 공부, 그 여정에서 만난 멋진 순간들
» 서른에 대학원을 간 이유
» 시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 학풍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 내가 예일에서 배운 것들
» Side effect를 고려하라
» 석학들이 영광스럽게 찾아오는 곳
» 표절에 관용은 없다
» 오피스아워 - 교수님의 단골 과외 손님
» 일 잘하는 교직원
» 잘 못 넣은 로스쿨 수업
» 모두가 넘쳐나는 논문 과제 속에 고통 받고 있다
» 정의는 다양하게 정의된다
» That's a good question
»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수업
» Diversity, diversity, diversity
» 학교는 거대한 박물관
» 예일대 학생들의 공통점
» psychological safety
» 신선한 충격, 특별한 수업들
» 그들이 천재소리를 듣는 이유
» 환경 대학원에서 배운, 문명에 대한 감사함
» 현재 진행형인 토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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