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시간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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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라는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철저히 SF적이다. 레이저를 쏘며 적기를 추락시키는 비행체가 등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외계인을 매개로 하는 상상이 경이롭기 때문이다. 영화의 또 다른 모티프인 언어와 시간의 관계가 그러하다. 루이스 박사는 헵타포드(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을 인식하는 다른 방식을 깨닫는다. 이는 단지 시간에 대한 지식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핵심은 훨씬 공상과학적이다. 언어의 변화가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미래에 대한 기억’이라는 역설로 이 기묘한 상상을 풀어나간다. 헵타포드의 언어는 “나는 인간이다.”와 같은 문장처럼 선형적인(직선적인) 구조가 아니다. 그들의 언어는 시작과 끝이 만나는 원형을 그리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의 선형적 언어와 헵타포드의 원형적 언어 사이의 구조적 차이가 시간을 경험하는 차이로 상징화된다는 것이다. 헵타포드에게는 인간이 인식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선형성이 없다. 헵타포드의 언어가 원을 그리듯이 그들의 시간에서 과거는 미래와 연결되며 순환을 그린다.
미래에―동시에 과거와 현재에―그녀의 딸로 태어날 한나(h-a-n-n-a-h)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통해 변화된 루이스의 시간관을 상징한다. 한나의 스펠링이 앞뒤로 동일하게 읽히며 시작과 끝이 없듯이, 루이스에게 한나는 미래의 기억이자 동시에 과거의 기억이다. 여기서 과학적 적합성은 문제가 아니다(물론 엄밀한 과학적 자문을 받았다고 한다). 관건은 빌뇌브 감독이 들려주는 언어에 대한 하나의 신비한 가능성이다.
언어는 많은 것을 결정한다.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 역시 언어에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각 언어마다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시제가 대표적이다. 영어에는 현재 완료가 있고, 프랑스어에는 단순 과거가 있으며, 시제의 변화가 불분명한 중국어 같은 언어도 있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문법적 차이가 아니다. 이에 따라 시간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방식도 달라진다는 것이 핵심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에서 단순 과거는 소설에서만 쓰이는 시제이다. 프랑스인들은 단순 과거로 쓰인 문장을 통해 현실과는 다른 허구적 시간으로서의 과거를 인식한다. 그들의 삶 속에서 허구적 과거가 현재의 나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에서도 시간관에 차이가 있는데,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헵타포드의 시간과는 얼마나 큰 간격이 있을지!
이미 상대성 이론으로 증명되었듯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다.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빌뇌브 감독의 시도는 그와는 다르지만, 시간의 경험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SF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의 기억’에 대한 역설을 ‘이야기’하는 실험이다.
한 가지를 기억하자.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선형적 시간관은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시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은 역사적으로도 변해왔다는 것을, 그에 따라 우리의 세계도 함께 변해왔다는 사실을.
미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미래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겸허히 받아들일 것인가. 영화에서 이런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 루이스의 선택 역시 이런 이분법을 벗어나 있다. 그렇다면 미래의 기억은 우리를 삶의 무의미로 이끌까? 또는 모든 순간을 통제할 수 있는 혜안과 판단력을 줄까? 이 역시 루이스에게 중요하지 않다. 변치 않는 미래의 기억으로부터 그녀가 수용한 것은 삶에 대한 포기나 무의미도, 능동적으로 만들어갈 미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한다.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난 모든 걸 껴안을 거야.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반길 거야.
과거와 미래가 하나로 연결됐다는 것은 그녀의 삶에 현재만이 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선형적 시간이 지워진 그곳에는 매번의 지금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앞으로 맞이할 모든 행복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 순간을 충실하게 채워나갈 현재를 살아가고 기억하기로 한다. 그녀가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할 매번의 순간을 위해.
결말이 완성된 이야기가 아름다운 건 아직 보지 못한 마지막 문장에 대한 기대보다, 매번 읽어 내려가는 그 모든 문장의, 모든 독서의 순간들일 테니까. ‘한나라는 이야기’의 결말보다 한나라는 이야기의 모든 순간이 루이스의 충만함일 테니까.
"네 삶 너머에도 너의 이야기는 존재"하기에.
'contact'가 아닌 'arrival'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