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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an Oct 23. 2019

우울의 추억 - 가끔 미치도록 나를 숨기고 싶을 때

투병의 일상화, 일상의 투병화. (2)

어린 시절, 컴퓨터라는 것이 그래도 집에는 한 대씩 있어 간다는 것이 뉴스가 되어갈 즈음이었다. '윈도우즈'라는 것은 등장도 하지 않았고 '도스'가 가장 보편적인 OS였던 시절, '베이식'이라는 프로그램을, 그게 뭔지도 모른 채 학원에서 열심히 배웠던 것 같다. 그걸로 도스 화면에 트리 같은 모양을 만들었던가, 했던 것 같다(그게 재미있어서 계속했었으면 지금쯤 개발자가 되어 잘 나갔으려나). 하지만 나에게 컴퓨터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건 베이식이 아니라 타자 연습이었고, 또래 중 꽤 빠른 편에 속했다. 그리고 난 아주 당당하게도, 남들보다 타자가 빠르다는 이유 하나로, 장래 희망을 무려 '컴퓨터 프로그래머'라고 선언했다. 그게 정확히 뭐 하는 직업인지는, 25년 정도 지난 지금도 모른다.


가끔 생각 나는 어린 시절의 그저 웃음 나오는 추억일지 모르지만, 지나치게 모범적인 헤어컷의 사진과 함께 교실 게시판에 붙어 있던 장래희망 카드와 같은 이런저런 것들이 문득 소스라치도록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굉장히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PC방이니, 오락실이니 하는, 어른들이 들었을 때 표정이 썩 밝아지지 않는 곳들은 거의 가질 않고. 그렇다고 해서 또 전교 1등을 하거나 반 1등을 하거나 해 본 적도 없는, 그런 생활. 좋은 기억이 있어 봐야 소소하고 나쁜 기억이 있어 봐야 털어버릴 수 있을 법한 그런 정도의 굴곡. 그런데 이상하게, 가만히 있다가도 그 시절 전혀 기억할 필요도 없고 기억에 남아있는지도 몰랐던 아주 사소한 일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날 미치도록 부끄럽게 만드는 일들이 불쑥불쑥 생각이 난다.


처음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사 가서 놀림받았던 나의 말투,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었던 친구들의 말,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내 나름은 친하다고 졸졸 따라다니던 친구가 불현듯 지은 것 같았던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 날 주인공으로 스케치북에 몰래 그렸던 슈퍼히어로 만화의 그림과 대사들, 혼자 좋아하던 여자 아이 이름을 수줍게 말씀드렸더니 우리 집에 놀러 온 아주머니들에게 신이 나서 그 얘기를 퍼뜨리신 엄마, 지금은 차마 입 밖에 내놓기 민망한 어린 시절 어린 마음속 '예쁜' 말들, 좀 더 자라서는 근거 없이 부리던 허세들과 누군가가 부러워서 느꼈던 자잘한 열등감들, 그리고 남들이 보지 않을 때 혼자 놀면서 벌인 소소하게 이상한 짓들.


이런 기억들, 몇 십 년을 잊고 지냈던, 기억할 필요도 없고 딱히 내 삶의 큰 줄기에 영향을 미친 것 같지도 않은 그런 아주 하찮고 자잘한 기억들이 어느 순간부터 순간순간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안은 미래에 대한 거고, 우울은 과거에 대한 거예요. 약효가 있는지 불안이 좀 가셨나 봐요. 그리고 그 자리에 우울이 들어선 것 같아요."


기억이 나는 것조차 신기한 과거의 기억들이 왜 이리도 갑자기 불규칙적이면서도 꾸준하게 내 마음속에 들이닥쳐서 날 부끄럽고 미칠 것 같이 만드는지 물었을 때, 의사 선생님의 대답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런 부끄러운 마음이 가득 들어찰 때의 느낌은 공황이 닥칠 때의 그 불안함은 분명 아니었다. '발작'과 '몸서리'가 아주 큰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는 단어들 일지 모르나, 체감컨데 느낌은 분명히 달랐다.


전자의 증세는 아무래도 한자로 된 한국어보다는 영어 단어의 조합이 더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 같다. 'Panic Attack'. 그야말로 패닉이고, 그야말로 어택. 지금 나에게 닥친 뭔가 크게 안 좋은 것, 그래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 보게 되는.


하지만 후자는 실체가 없다. 몸서리를 쳐 보지만 그냥 허공에 삽질하는 느낌. 떠오른 기억들을 애써 묻으면 새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새로운 기억. 앞에서 나열한 어린 시절의 이상한 기억들부터 시작해서 며칠 전 회사에서 나도 모르게 해 버린, 다행히 상대가 흘려듣고 넘어간 헛소리까지 부끄러움의 연대기가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러는 가운데 주기적인 몸서리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부끄러운 삶을 살았느냐'라고 누가 물었을 때, 딱히 엄청 당당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인생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왜 나의 삶의 모든 단편에는 온통 부끄러운 것들 투성이일까. 사실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는데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냥 아니라고 믿고 있는 걸까.




이러한 부끄러움증(?)의 하이라이트는 잠이 들고자 하는 순간 이 증세가 찾아올 때이다. 꽤 성능 괜찮은 수면제를 처방받았지만, 이 증세에는 썩 잘 들지 않는다. 하루를 정리하는 밤 시간이라 그런지, 이때의 이 증상은 오늘부터 시작해서 연대기의 역순으로 이루어진다. 어제, 그저께, 지난주, 지난달, 작년 이맘때, 입사 초기, 대학생 시절, 군 시절...


오늘은 거슬러 올라가고 올라가며 괴로워하다, 군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등병 시절 싸이월드에 이런 다이어리를 썼던 기억에 완전 발목이 잡혀 잠을 이루지 못하고는 이 글을 쓰겠다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여러 가지에 익숙해지는 중. 노래 없이 노래를 듣는 것에, 날개 없이 날아 네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에... 어쩌고 저쩌고.'


....... 죽고 싶다. 이렇게 워딩이 통째로 기억나는 저주받은 기억력. 한창 공부해야 할 때는 하나도 발휘가 안 되고 지금 이리 활개를 치는 걸 보니 이 놈은 나의 적임에 분명하다. 나의 적에게 저주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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