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도시 인도 바라나시에서
엄마 우리 그 때 아빠때문에 갑자기 모든 걸 뺏겨버려서 찜질방에서 살았던 날들 기억나?
사람들 잘 시간이라서 대부분의 불이 꺼진 찜질방이긴 했는데, 나 사실 그 날 학교 다녀와서부터 쭉 놀 거리 놀 친구 하나 없는 그 곳에서 숙제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면서 엄마 퇴근하기를 기다렸는데, 막상 엄마가 안 자고 기다린 나 보면서 기쁜 표정으로 ‘매점에서 하드 사줄까?’ 했었는데, 진짜 사먹으면 ‘눈물이 볼아귀부터 올라와 목이 매여서 못 삼킬 것 같다’는 기분을 아홉 살 나이에 벌써 알아버려서 ‘졸립다.’고 뻥쳤는데 엄마 몰랐지? 하드는 엄마 좋아하는 바밤바로 내가 사줄게. 난 엄마의 호의 한 번도 거절해본 적 없는데 말이야. 엄마가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하면 배불러도 괜히 들뜬 마음에 배 꺼진 척 더 먹고 그랬는데. 엄마도 엄마 보기에 그날 나 이상했겠지? 그치.
그래서 나는 여전히 호의를 거절하는 일이 그렇게 슬퍼 엄마. 그냥 괜찮아서 한 거절이어도 말이야. 그리고 엄마 나 아직은 찜질방이 아픈 단어여서 그 이후로 난 엄마랑 단 한 번도 찜질방 간적이 없었지. 볼 꼴 못 볼꼴을 다 봤다는 그 친한 친구들이랑도 한 번을 안 가봤어. 나의 맨 몸을 공유하고 갈아입어야하는 찜질복에서 오는 창피함 말고, 찜질방이라는 단어는 아직 나한텐 하드를 삼키는 일이라서 그래. 무엇보다 아픈 기억 아직도 못 버린 내가 창피해서 그래.
그런데 그 때가 말이야. 내 인생에서 엄마가 가장 멋있던 순간들이었던 것 같아. 물론 지금도 여전히 멋지고 아름답지만 말이야. 내가 혼자 돈을 벌어보니까 말이야. 나 하나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더라고. 게다가 풀칠할 공간도 있어야 하잖아. 늘 엄마 인생에서 최선의 것을 주어서 고마워 엄마. 엄마 나 두고 가버렸으면 난 고아나 노숙자가 되어 한겨울에 꽁꽁 언 시멘트 바닥에서 잤어야할지도 모르잖아? 세상엔 당연한 것 같은 것들이 더 당연하지 않은 것 같아. 대단해 정말.
사실 난 엄마의 책임감을 배우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이건 내가 평생을 배우려고 발버둥쳐도 습득할 수 없을 것 같아.
지금에 와서 뒤돌아보니, 엄마 언니 나 우리 이렇게 셋 다 너무 잘 되어서 다행이야. 엄마 말이 맞았어. 각자 위치에서 스스로에게 정직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면 뭐든 된다고. 이 가치를 엄마라는 사람에게서 행동으로 배울 수 있어서 난 참 행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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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난 엄마 손 잡고 하교 하는 많은 인도 아이들 틈에서, 끈이 한 쪽 끊어진 자기 몸 만한 가방을 간신히 메고 동생 손 잡고 하교 하는 인도 아이의 뒷모습보고도 눈물이 나고, 마음이 끊어지는데 말이야. 종종 맞아죽었다는 아이의 뉴스 기사가 나를 이 세상에 살 이유가 없게 해.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그런 아이들이 사라지지 않잖아. 그런 무력감이 날 힘들게 해 엄마.
그렇게 예민한 마음을 가진채 성장을 하니, 실망스러운 말일지도 몰라 말 못 했지만, 빨리 내 인생은 마감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주위 환경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아픔에 민감한 마음을 멈추기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나는 용기가 없었고, 생을 마감하지 못 했어.
학창시절에는 가짜로 죽고싶어서 시간낭비가 하고 싶었고, 성인 반열에 오르고 나서는 진짜로 죽고싶어서 잘 하면 없을지 모르는 내일때문에 하루하루 가는게 아쉬워 작은 시간도 살뜰히 쪼개 의미있게 보내기 시작했어. 곧 죽는다면 아쉬울 일들부터 하나 둘씩 도전하고 해나가기 시작했고, 그게 모인 결과물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나를 '대단한 사람', '멋진 사람'이라고 칭했어. 나의 행복에는 도움이 되는 말들이지만, 내가 생을 마감하고 싶어하는 생각을 멈추는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어. 멋지건 안 멋지건 나는 아프기 때문이야.
물론 그렇게 살기시작한 그 다음부터 모든 게 달라보여.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은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람이고, 지금 하는 이 식사가 최후의 만찬이며, 지금 하는 이 사랑이 내 마지막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지니깐 말이야. 그래서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의 생명(시간)을 나에게 소비해줘서 감사하다.'고
꼭 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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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늘 가치있었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가치의 기준이 변하기 시작한 건, 나이로만 성인의 반열에 올랐을 때, 그 때부터였던 것 같아. 학창시절 같았으면 가치 있었던 순간들이라는 게, 뭐 학생회장이 된 일이나 1등을 한 일 이런 것 따위였겠지만 성인이 되니깐 달라졌어.
나 말이야,
스무 살에 대학교 올라와서 내가 먼저 관심이 갔던 남자애랑 같이 벚꽃 휘날리는 봄에 지하철을 타고 하교를 하는데 말이야. 헤어지는 순간에 ‘나를 좋아한다.’고 먼저 이야기해줬어. 내 웃음도, 내 향기도, 활발한 것에 비해 고상한 내 취미도, 삶에 대한 애정도 예쁘다 해줬어. 그리고 내가 머리를 하나로 묶은 날엔 ‘이건 은행나무열매냐.’고 놀리면서 한참 만지작대다가 사실 귀여웠다고 이야기해주더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기란 어려운 일인데 말이야. 괜찮은 인생이었지?
그리고 내가 잘 챙기지도 못한 후배가 내가 가장 힘들 때 먼저 손 내밀더라고. 그 때 내 흙 묻은 손이 꼴 보기 싫어서 옹졸하게 내민 손도 못 본척하고, 그저 주저앉으려했는데 말이야. 친구들까지 달려와서 나를 부축해서 일으켜줬어. 난 내 등에 얹어진 섬섬옥수 행렬에 가락가락마다 토끼풀 두 가닥 엮어 풀꽃반지라도 끼워줬어야 했는데 못 그러고 가서 그게 좀 슬프다. 그 사람들은 내가 하늘에서도 한 명 한 명 정성 다해 보호해줄 거야.
그리고 내가 못 하던 물리 있잖아. 이런 저런 시험에 낙방을 번복하던 그 때, 조수역할로 청소며, 보고서작성이며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한 명씩 두 명씩 치고 올라가서 은상, 금상, 마지막엔 학교 대표로 시 대회를 나가게 된 일 말이야. 그 때야 말로 정말 학문을 학문으로써 대했던 것 같아. 아무도 손대지 않으려하는 물리2를 깊이 깊이 공부해보고 말이야. 그래서 말인지 시 대회 나갔을 때, 그 때 마침 머리를 숏 컷 단발로 자르고, 공부에 매진하겠다며 왕눈이 안경을 맞춰 끼고 촌스럽게 갔는데도 내 왼쪽가슴에 인명여고 대표라는 종이 한 장이 나를 가장 훌륭한 여자의 느낌이 들게 해줬어. 내 노력의 시간들이 떳떳해서 그랬나봐. 사내아이들이 많았던 수험장에서 어깨 굽지 않고 내 촌스러운 복장을 이겨낼 만큼.
그리고 새내기가 막 끝나갈 무렵, 내가 애써 담담한 척, 흑석역에서 우연히 마주친 친구에게 나의 비보를 전하게 된 순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때 말이야. 내가 담담한 척 하는 이야기에 내 친구 눈가가 벌게졌어. 괜찮녜. 나의 그동안의 노력을 지켜봐준 친구였는데, 그 노력이 꺾여져 버렸다고 그렇게 눈가 붉힐 줄 몰랐어. 심지어 이성 친구였는데 말이야. 나 잘 산 것 같아. 친구를 울린 건 마음 아프지만 말이야. 난 아직도 그 친구가 좋아.
그리고 엄마 혜진이 알아? 나와 매번 편지로 소통하던 친구 말이야. 그 친구한테 내 밑바닥까지 다 보여줬는데도 나를 늘 ‘훌륭하다’고 이야기해줬어. 이겨내서 기특하대. 동갑이면서 말이야. 사실 그 때가 내 밑바닥을 본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너무 쉽게 애비 없는 애라고 들먹인 순간과 맞물려서 더 크게 느꼈나봐. 엄마. 또 이거 보고 속상해하지 말고. 엄마 잘못이 아니라는 건 세상 누구나 알아. 허지웅 작가의 글을 인용하자면, ‘엄마는 슈퍼맨이었고, 나는 크립톤 운석’이었어. 정말 멋져. 그런데 아직은 세상이 내가 좀 경솔하게 행동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꼬리표가 붙어서 따라오더라고, 내 실수만 정확하게 지적해주면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고쳐볼 생각 있었는데! 그런데 솔직히 나도 처음에는 그 사실이 나도 너무 속상했는데 말이야. 나도 이제 인정하기로 했어. 인정하니깐 오히려 깡이 생기더라고! 아자뵤! 이제 그렇게 말하는 사람한테 ‘맞아요! 저 아빠 없어요! 그런데 그게 왜요?’할 자신감도 생겼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에 힘쓰지 않을 거야. 아니 이거 유언이지. 힘쓰지 않다가서 홀가분해.
그리고 난 두눈박이 세상 속 외눈박이 인줄 알았는데, 외눈박이 세상 속 두눈박이였던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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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인간극장이 정말 좋았는데, 친구들이 할머니냐고 놀렸어도 난 그 프로그램이 가장 좋았어. 물론, 텔레비전을 잘 보지도 않는다만 장면 장면 햇살을 정말 잘 담았고, 사람이 사람냄새나도록 보여줬거든. 그럴 때마다 견디기 어려웠던 외로움 참아낼 수 있었어. 그냥 사람냄새를 탐닉하고 싶었나봐. 혼자라고 느껴질 때마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나오는 편, 시골에 사는 사람들 편부터 찾아서 봤어. 아니 생각해보니깐 나 뭐야? 음악도 김광석 노래 좋아하잖아. 친구들이 옛날 사람이냐고 놀릴 법했네.
그리고 책은 나에게 위로였어. 예를 들어 박완서 작가 책을 보면 삶에 대한 위로가, 박범신 작가 책을 보면 사랑에 대한 위로가, 신경숙 작가 책을 보면 슬픔에 대한 위로가 됐다. 그들이 있어 난 벌어진 상처도 잠시나마 쉽게 아물 수 있었어. 하늘에서 박완서 작가를 꼭 만나고 싶어 그리고 한 번만 안아달라고 하고 싶어. 아마 실제로 만나면 울지도 몰라. 내가 작가를 알게 된 때는 먼저 올라가셨다는 소식을 알고 나서라서, 꼭 한 번 만나뵙고 싶었거든.
그리고 생각보다 난 많은 것들을 사랑했던 것 같아. 받는 사랑 없었어도, 내가 주는 사랑에 족한 인생이었어. 사람도 이성 동성 불문 하고, 나이 관계없이, 남자, 여자 다 좋았고, 동네 똥개도 너무 좋았고, 늘 그렇게 서 있던 은행나무도 좋았고, 저 햇빛도 바람도 습도도 뭐하나 싫은 게 없었어. 난 사랑하느라 바빠서 세상일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 세상의 경쟁에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만 봤나봐. 솔직히 그 때 엄마 나 못마땅했지? 내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길은 그 쪽인데, 그 쪽엔 내가 얼씬도 안 하려고 해서.
그리고 내가 ‘엄마가 나 신경 안 쓰고 엄마 인생 즐겼으면 한 것’처럼, 엄마도 ‘엄마 신경 쓰지 말고 내 인생 즐기게’ 했는데, 나만 진짜로 그래버려서 미안해. 이제 나 없으니깐 엄마도 엄마 인생 살아. 아마 엄마 이름으로 저금해둔 저금통장 있을 거야. 스물 한 살 끝자락에 엄마 멋진 하루 보내보라고 틈틈이 저금한 거야. 비밀 번호는 엄마가 쓰던 비밀번호 그대로야. 엄마가 가장 사랑하지 않는 숫자 네 개.
그리고 언니한테 엄마 다음으로 언니처럼 열심히 사는 여자 처음 봤다고 좀 전해줘. 이제 그만 만족하라고! 얼마나 더 멋있어지려고 그러냐고! 휴 사실 언니가 날 괴롭히던 사춘기시절은 정말 싫었는데 '싫었다.'고 말한 순간부터 ‘이해했다’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해줘. 이건 직접 말 못 하겠다. 엄마가 좀 전해줄래.
인생은 한 점에 불과하다더니, 내 인생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끝없을 줄 알았는데 더 이상 내 인생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내 마음 속에 묻고 떠나야할 것들이 더 많은 것 같아. 그리고 난 바다에 뿌려주면 좋겠어. 우리나라 흙이 되어가는 삶도 좋지만, 난 아직 다 맡아보지는 못한 외국의 향기가 그립거든. 그리움이라는 게 겪어본 일들에서 일어난다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나봐. 못 겪어본 그 곳이 그리워.
이 편지 말고, 내 고사에는 ‘후회 없이 살다 갑니다.’라고 한 마디만 해달라고 해줘. 다른 말은 필요 없어.
그리고
엄마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