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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연 Apr 16. 2023

행복에 대하여

신을 이기는 방법

이 글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 혹은 절대자를 향한 다소 냉소적이고 무신론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위 내용이 불편하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 이 글을 무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 사진은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에서 시민들이 희생되자, 한 수녀님이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을 호소하며 무장 군경들 앞에서 무릎을 꿇은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나는 가장 추악하기도, 가장 고결하기도 한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가 이 사진인 것 같다.


누군가는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해 사람을 죽인다.

누군가는 총과 무력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인다.

누군가는 신념과 사랑으로 사람을 살린다.

그렇기에 가장 추악한 것도, 고결한 것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고통과 비극이 있다는 점에서 신의 존재나 의도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세상에 선하고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불의의 사고, 범죄, 자연재해, 전쟁, 기아, 환경문제, 정치적 투쟁과 탄압, 빈곤 등, 많은 이유로 인류는 자신의 잘못 없이 고통받기도 한다. 나는 때로 편하게 방구석에서 브런치를 쓰는 순간조차도, 아프리카의 아기들이 굶어 죽어나가는데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채소를 먹을 때도, 바다는 플라스틱으로 신음한다는데 테이크아웃 커피를 구매할 때도, '나의 생 자체가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살아가는 양식을 바꾸지 못하는 나 자신이 위선적임에 조소한다. 그러다가도 결국 '나는 내 할 만큼 하고 있어. 세상에 많은 고통이 있는 건 세상이 모순적이고 뒤틀려 있기 때문이고, 내가 신도 아닌데 할 만큼만 하면 되지 뭐.' 라며 스스로 합리화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렇게나 고통으로 가득한 것일지라도, 이런 세상을 고안한 신을 이기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 본 적이 있다.


1. 염세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는 선택지는 주어진 생에 충실하지 못하며,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옳지 못하다.

2. 쾌락을 좇으며 산다. 는 선택지는 쾌락의 휘발성으로 인해 지속적이지 못하며, 세상에 대한 회피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옳지 못하다.


3. 고통과 불행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며  / 세상을 조금이라도 옳고 나은 방향으로 만들어 나갈 것.


나는 결국 3. 번의 결론에 이르렀고, 내 남은 생을 그렇게 살기로 했다. 위 문장의 / 는 의도된 것인데, 문장을 전단과 후단으로 나누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조금 더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싶다.


전단에 대하여 : 세상의 고통과 불행은 내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가난, 기아, 환경, 전쟁 등의 발생과 소멸은 유약한 개인의 의지와 능력으로 완전히 소탕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아무리 뛰어난 운동가라 하더라도 위와 같은 지구적 고통은 없앨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지치는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부분을 찾고 행복할 수 있다. 감옥, 질병, 전쟁 등등 사람은 불행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작은 것에서 적극적으로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내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변수인 '나의 인지'를 통해, 어려운 환경에서도 우리는 적극적으로 행복해야 한다.


후단에 대하여 : 전단과 같이 행복하면, 세상을 조금 더 낫게 바꿀 힘을 비축할 수 있다. 우리 개인이 태평양의 플라스틱 섬을 없앨 수는 없지만, 생수 소비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길가의 쓰레기 하나 정도는 주워서 정리할 수 있다. 부유한 연예인들처럼 수많은 재산을 기부할 수는 없겠지만, 술 담배 커피를 줄여 한 달에 만원 정도는 기부할 수 있다. 완벽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을 경우 조금이라도 행동한다면 그걸로 되었다. 우리 모두가 속세를 버리고 '윌든'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세상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도록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지속 가능하게 세상을 바꾸며 살려면, 결국 나부터 행복해야 한다. 내가 고통 속에 있으면서 타인을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내가 여유 있는 만큼만 타인을 도울 수 있다. 그러니 내 행복과 여유를 버는 만큼 세상에 돌려주며 살면 된다.


그래서 나는 태어난 김에 행복할 것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는 못했지만,

행복할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만큼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며 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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