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타운과 파이란과 검은 꽃과 당신과 다시 (3)

by 김박은경

이제 제물포구락부로 갑니다. ‘클럽’을 일본식으로 읽어서 ‘구락부’가 되었습니다. 구락부라니 구기 종목을 하는 곳인가 했어요. 조계 내의 외국인들의 상호교류를 위해 1901년에 설립된 사교클럽인데요. 내부는 사교실, 도서실, 당구대. 식당 등 각종 시설을 갖추었고, 건물 외부에 당시로는 드물게 테니스 코트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비공식 외교 활동을 벌이려고 했지만, 일본 대표들이 서양 대표들과 어울리지 못하여 외국인 전용시설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건축은 러시아 출신 사바틴이 2층 벽돌 건물에 양철 지붕으로 지었고요. 해방 이후에는 미군 장교들이 클럽으로, 대한부인회 인천지회 사무실로, 1952년 이후에는 인천시의회, 인천시교육청, 인천시립박물관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겉은 그대로인데 들어갈 때마다 다른 느낌입니다. 지금은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운영되는데 “커피가 들려주는 인류문명사, 재즈브루잉, 골목스케치, 필름카메라” 등의 강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10.jpg 건립 당시의 제물포구락부, 출처는 인천일보입니다


11.JPG 오늘의 제물포구락부, 입구는 사진의 좌측이고 사진의 우측에는 각국조계석이 있습니다


구락부 장식장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각국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장식장 문을 열어 하나하나 만져보고 싶어요. 저마다 사연이 많아 보입니다. 손때가 묻었고 낡았고 변했어요. 그것들을 두고 떠난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버릴 마음도 버릴 틈도 없었겠지요. 덕분에 남아 전해지는 것이겠지요. 주인을 잃은 물건들마다 희미한 손길이 닿아있는 것 같아요. 그 손에 내 손을 얹는 상상을 합니다. 가만히 둘러보는 내 어깨쯤에 어떤 손이 닿기도 할까요. 아직 있지만 이미 없는 사람도 있고 이미 없지만 아직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귀신이라고 하면 살짝 무섭지만, 사라진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서운한 일이니까요. 잠시라도 뭐라도 어떻게든 남아주었으면 싶은 겁니다.


구락부의 창가에 섭니다. 두꺼운 커튼 너머 창 너머로 인천 바다가 보여요. 오래 전 어느 날에도 같은 바다였겠지요. 바닥은 검은 빛에 가까운 나무 마루입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 마루를 걷고 뛰고 돌던 사람들이 보이는 것도 같아요. 5월의 밤이 열린 창으로 아카시아 향이 흘러들어왔겠지요. 각국의 언어와 모습들이 뒤섞인 이국의 밤은 외롭고 그립고 쓸쓸했을 거예요. 잔뜩 잇속을 채운 자들이 있고, 그자들에 빌붙는 자들이 있고, 그자들을 질시하는 자들이 있었겠지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면서 미워하거나 흠모하면서 쟁반에 컵을, 술을, 음식을 들고 조심히 걷는 사람들을 그려봅니다. 굴욕이었겠지요. 슬픔이었을 거예요.


12.JPG 제물포구락부 내부


검은 바다는 있으나 없는 듯 멀게만 느껴졌겠지요. 그래도 물비린내와 함께 갈매기 울음소리와 함께 음식 냄새와 술 냄새와 향수 냄새와 담배 냄새가 허망한 구름처럼 떠다녔을 거예요. 헐렁한 결속과 아득한 연대가 함께 했겠지요. 파티가 끝나고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불이 꺼진 구락부 창에서 내다보는 바다에는 정박해둔 배의 불빛들이 크리스마스 전등처럼 사랑스러웠을까요. 구락부 건물의 외관은 사진이 남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부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복원된 것이라고 해요. 하여 춤을 추는 클럽 같기도 하고 가배를 판매하는 카페 같기도 하고 국적이 뒤섞인 응접실 같기도 하고 신식 메뉴들이 준비된 음식점 같기도 합니다. 조금씩 다른 것들이 달라붙어서 원래와는 영영 다른 것이 될 텐데요. 과거 또한 일신우일신이라고 해둡시다.


구락부 아래에는 인천역사자료관이 있습니다. 원래는 왜인 사업가 코노의 별장이었어요. 중앙동 4가에서 잡화상 등을 운영했던 사람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동양장이라는 서양식 레스토랑과 송학장이라는 댄스홀로도 사용되었고요. 인천시가 구입하여 한옥으로 개축한 후 1966년부터 인천시장 공관으로 사용, 총 17명의 시장들이 이용했습니다. 많은 사진과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어요. 가파른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숨겨둔 마당 구석에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는 방공호가 있고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벤치가 있습니다. 거기 한참이나 앉아 있었습니다. 방공호 담벼락 위로 들장미가 벽을 타고 오르는군요. 풀숲 속으로 늙은 고양이 한 마리가 느릿느릿 사라집니다. 꽃씨가 둥싯둥싯 떠다니고요. 벌레구름이 비대칭의 형상으로 우쭐우쭐 몰려다닙니다. 이 모든 대상 속에 리듬이 내재하겠지요.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겠지요. 순간의 풍경 속 어느 것이 가장 먼저 사라질까요. 어떤 것이 가장 오래 살아남을까요.


13.JPG 역사자료관 마당, 벽에 방공호가 보입니다


홍예문을 보러 갑시다. 자유공원에서 걸어서 6분 거리입니다. 대한제국 시대에 철도 건설을 담당했던 일본 공병대가 1906년에 착공해서 1908년에 완성합니다. 이 문을 일본인들은 혈문(穴門))이라고 불렀다는데, 제 눈으로는 혈문(血門)으로 읽히는군요. 흙과 벽돌을 나르는 고된 노동 중 흙더미가 무너져서 50여 명이나 죽었다니 말이에요. 예기치 못한 거대한 암석이 있어서 공사가 오래 걸렸다는군요. 인천 중앙동과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가 급증하자 만석동 방면으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벌인 일인데요. 사진을 보세요. 아치형 문 옆으로 보이는 거대한 저 암석이라니. 위험하고 험준한 작업이었을 거예요. 백 년도 더 된 이 문으로 오늘의 자동차와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좁아서 양보와 대기와 조심이 필수입니다.


14.JPG 홍예문


홍예문(虹霓門)은 ‘무지개 홍(虹)’에 ‘무지개 예(霓)’자를 씁니다. ‘무지개 홍(虹)’자는 ‘기름접시 홍’이라고도 하는군요. 기름이 묻은 그릇에 번지는 무지개를 압니다. 해가 드는 탁자 위의 물 컵으로 열리는 무지개도 압니다. 길가의 웅덩이를 뒤흔드는 무지개도 압니다. 거미줄에 매달린 물방울 무지개도 압니다. 없는가 하면 분명히 있고 있는가 하면 전혀 없는 꿈같은 것. 믿을 수 없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아니 믿어야 하는 내일이나 미래 같은 단어들이 무지개와 어울릴 것 같습니다.


집채만 한 암석에 손을 얹어보았어요. 차갑지도 않고 단단하지도 않은 것 같아요. 생물처럼 느껴집니다. 귀를 갖다 대니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요. 제 자세가 위험해보였는지 다가오던 승용차가 클랙슨을 울리네요. 여기에서 파낸 돌무더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흙더미는 어디로 갔을까요. 어딘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남아있을 것 같아요. 온 세상이 하나로 붙어있던 까마득한 시원(始元)을 상상합니다. 지구본의 덩어리 땅들이 하나로 이어졌던 그 시간이요. 하나로 이어져 걸어서 왕래하던 세상이 조금씩 때때로 갑작스레 달라졌겠지요. 이산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을 거예요. 땅과 흙과 바위와 물에게도 아득한 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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