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무궁무진, 강화도 20

by 김박은경

18. 모으다-collect-集 : 조양방직

조양방직 터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가슴이 뛰었습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 같았습니다. 사라진 것들이 다시 살아나니까요. 허물어진 것들이 바로 서고, 부서진 것들이 제 조각을 찾아서 자리를 잡으면서 먼지 가득한 시공간이 빛나는 지금 이 순간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꾸는 꿈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기기묘묘하고 아름다운 꿈이었습니다.


조양방직은 이제 <신문리 미술관>으로 불립니다. 이 꿈을 꾼 사람은 이용철입니다. 고철이나 건져 볼 생각으로 조양방직 터를 처음 찾았다고 해요. 당시 공장 터는 쇠파이프와 쓰레기더미에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요. 무너진 건물들 사이 살아남은 몸체는 등나무 덩굴이 휘감고 있었고요. ‘어둠 속에서 세월의 무게를 떠받들고 있는 트러스구조의 이끌림에 빠져버렸다’고 말합니다. (트러스(truss) 구조는 직선으로 된 여러 개의 뼈대 재료를 삼각형이나 오각형으로 얽어 짜서 만든 구조물을 말합니다.)


조양방직공장은 강화 지주 홍재묵 홍지용 형제가 1933년(1934년이라는 자료도 있었습니다.) 민족자본으로 설립했다고요. 서울 경성방직이 1936년이니 그보다도 빠르네요. 조양방직이 문을 열면서 농업과 어업이 주를 이루던 강화의 생산 활동 방식을 바꾸게 되고요. 강화의 직물산업은 가내수공업에서 기계화로 전환하게 됩니다.


일본 미쓰이 상사 서울지점에서 강화 방직공업의 원료를 팔기 위해 총독부와 미쓰이 상사가 공동 부담하여 1932년 전화가 개통되었습니다. 조양방직의 역직기를 돌리기 위해 1934년 전기를 끌어들이고요. 이곳에서 1960년대까지 국내 최고의 인조직물을 생산했는데 1990년대가 되면서 현대식 섬유 공장이 생기고, 신소재 섬유가 나오고, 중국산 값싼 직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쇠락하고 맙니다. 여러 차례의 화재로 사무동 이외 건축물의 형태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당시 금고로 사용되던 콘크리트 구조물을 통해 그 규모를 예상해볼 수 있는 정도라지요.


18-1.jpg (1950년대 조양방직 금고. 출처는 인천일보 2020. 10. 21. “뉴트로, 인천을 즐기다”)

사진은 조양방직의 금고였다고 해요. 공장이 한창일 때는 일꾼들이 돈을 지게로 져서 은행까지 날랐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원래 사무동 안에 있었는데 화재로 대부분 전소되고 금고만 남았다고 합니다.


신문리 미술관에는 이용철 씨가 20여 년간 중국과 유럽에서 찾은 골동품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되어야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100년 정도는 역사로 여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강화도조약 이후로 강화도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는 경향은 그 탓이겠지요.


강화도의 근대문화유산은 역사가 되기 전에 사라지는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사유재산인 경우가 많아서 그 가치 보존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조양방직 외에도 조양방직 사무동, 삼도직물 공장터, 강화양조장 등이 있습니다. 몇 군데는 인천시와 강화군이 근대건축문화유산을 시 지정 문화유산으로 지정, 보존 계획을 세웠지만 강화양조장의 경우 소유자가 화재 위협을 이유로 철거하여 소중한 유산이 사라져버리게 되었고요. 물론 모든 것을 다 보존할 수는 없겠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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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jpg (신문리 미술관(조양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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