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무궁무진, 강화도 19

by 김박은경

17. 짓다-build-建 : 성공회성당

아름다워요. 아름다운데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글을 쓰며 두 번을 갔는데 한 번은 코로나로 문을 닫았고, 두 번은 들어갈 수 있다고 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닫혀 있었어요. 눈앞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니 안타까운 마음에 대문이며 담장을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올려다보는 십자가는 어찌나 정겹던지요. 높은 언덕 위에 선 성당의 사진은 외부에서 찍은 것밖에 없습니다. 내부는 자료사진으로 대체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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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jpg (성공회성당)

성공회는 영국에서 발생한 개신교의 한 분파입니다. 가톨릭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내용적으로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형식면에서도 가톨릭으로부터 자율성을 띠게 되었고요. 성공회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된,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 대한 신앙 고백에서 ‘거룩(聖)’과 ‘공번(公)’의 의미를 따서 이름이 붙여집니다.


한국 성공회 선교는 한국 교구 초대 주교인 고요한(Charles Jhon Corfe)에 의해 시작됩니다. 고요한 신부는 영국 해군의 군종사제였는데 당시 조선에서 해군력 증강을 위해 설치한 통제영학당과 관련이 깊습니다. 성공회의 강화 포교와 확산에는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국이나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에 비해 영국에 대한 강화 사람들의 반감이 적었다는 점, 통제영학당 파견 교관들이 영국인이었다는 점, 그들의 종교가 성공회였다는 점 등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영국 선교사들은 서울과 제물포에서는 의료 선교나 문서 활동에 주력했으나 강화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본격적 전도 활동을 시작합니다. 1898년 갑곶에 학당을 열고 6명의 학생들에게 성서 교육을 시작하고요. 사고력을 배양하는 교육 목표 아래 한국 선교를 담당할 전도사 양성이 목적이었습니다. 한국성공회의 첫 세례신자이자 첫 사제가 배출되지요.


19세기 말 조선의 첫인상은 헐벗고 가난하고 완고하고 미개한 족속으로 여겨졌지만 당시 서양 선교사 중 드물게 조선어에 능통했던 영국인 조마가 신부는 강화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 한옥 성당을 짓고 마당에는 큰 종을 달아 은은한 종소리를 울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진리를 찾아 언덕에 오르게 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조마가 신부는 1896년 700평의 땅을 마련, 성당 건축의 첫발을 내딛습니다. 1899년 1월에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900년 11월에 완성되었고요. 성당 크기는 한옥으로 계산하여 종으로는 10간(間), 횡으로는 4간, 총 40간으로 잡았고요. 총 250명이 들어가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성당의 터는 구원의 방주를 상징하는 배(舟)의 형태로, 성당 내부는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을 구현합니다.


성공회성당의 성단 안에는 성공회의 신앙과 한옥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공회성당의 솟을대문도, 외삼문 중앙문의 중심에 있는 태극무늬도 우리 고유의 범종에 새긴 십자가 무늬도 그러합니다. 앞마당의 보리수는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연상케 하고요. 회화나무는 보통 향교와 궁궐 앞에 심어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던 곳을 상징합니다. 한반도를 덮친 태풍으로 회화나무는 뿌리까지 뽑히고 말았지만 한옥 지붕 위에 달린 자그맣고 동그마한 십자가는 여전히 보기에 좋습니다.


조마가 신부는 직접 신의주로 가서 백두산 원시림에서 벌목한 적송을 구하여 뗏목으로 서해안을 거쳐 강화까지 운반했다고 합니다. 벽돌과 흙은 강화의 것을, 옆쪽 출입문은 영국산 참나무로 만들었답니다. 건축을 구상한 트롤로프 주교와 궁궐 도편수의 기술력이 함께 만들어낸 작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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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jpg (성공회성당. 출처는 강화군청)


성당 정문의 난간 보이시지요? 원래 일본이 아시아 태평양 전쟁 때 국민총동원령과 함께 물자공출을 하며 성공회 성당의 종과 계단 난간을 가져갔던 것을 복원했다고 합니다. 공출의 역사를 알게 된 일본인 성공회 신자들에 의해서요.


17-4.jpg (성공회성당 계단)


성공회성당은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기조로 삼으면서 서양의 양식을 결합하여, 조선 사람들이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여 많은 유학자가 개종하여 신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해요.


지금 보아도 성당은 한눈에 들어옵니다. 당시에는 더욱 두드려져 보였겠지요. 강화읍 어디서나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언덕 위에 세워졌으니까요. 복음이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존중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요.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우리의 전통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뿌리를 내린 토착화 선교의 사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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