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파다-carve-板 : 훈맹정음
인천시청역사에는 박두성의 벽화가 있습니다. 1926년 인천 강화 출신 박두성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글 점자를 반포합니다. 당시 조선에는 미국식 변형 점자와 일본어 점자밖에 없다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다가 비밀리에 한글점자를 만든 것이지요. 1926년 11월 4일, 훈맹정음 반포일을 기념하여 매년 11월 4일은 “점자의 날”로 지정되었습니다.
박두성은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보통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일본인들이 만든 ‘조선총독부제생원’에 있는 맹아부로 가게 됩니다. 그곳은 시력에 문제가 있어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모아 교육을 하던 곳인데요. 기독교인으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선 사람이면서 교사 자격이 있는 박두성이 적격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요. 그의 나이 26세 때의 일입니다.
그 교실은 그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두 손을 더듬거리며 서로 다투고 있었는데 ‘감겨진 두 눈에선 파리가 윙윙거리고, 낡은 옷에 음식물 자국과 먹다 흘린 음식물 건더기가 붙어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고요.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사물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게 합니다. 동물원에 가서도 동물들을 직접 만져보게 하고요.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적 개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주판을 구해 가르치기도 합니다. 점자판과 점자책을 만들게 됩니다. 바로 강화에서요.
사실 훈맹정음을 만들던 시기는 일본의 조선어 사용 금지 압박이 심했던 때라고 해요. 훈맹정음의 사용을 위해서는 일본 정부로부터의 허락이 필요했고요. 그는 조선총독부에 편지를 써서 보내며 일본 총독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일본의 감시와 압박을 피해 『천자문』, 『조선어 독본』, 『명심보감』, 『3·1운동 비사』, 『성경』 『의학 서적』 등의 점자책을 만듭니다. 10여년에 걸쳐 만든 신약성경과 구약성경 원판이 전쟁 통에 불에 타서 손실되는 일이 벌어지자 다시 성경을 점자로 만들기 시작, 1957년 3월 30일 점자 성경 1질 24권이 완성됩니다.
그의 말을 옮깁니다.
“어떤 민족이 노예가 되더라도 말을 간직할 수 있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앞이 안 보인다고 마음까지 안 열리면 안 된다.”
“능숙한 목수는 굽은 나무도 버리지 않는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너희들 마음까지 우울해서는 안 된다. 밝고 명랑한 마음을 가지려면 늘 쉬지 않고 배워야 한다.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마음까지 암흑이 되고 마는 법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모국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이중의 불구가 될 터, 그들에게 조선말까지 빼앗는다면 벙어리까지 되란 말인가?”
“세상에 눈으로 보고 하는 일이 많지마는 눈으로 보아야 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 도리어 손으로 만져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보다 틀림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점자책은 점자가 상하니까 눕혀 놓지 말고 반드시 세워 놓아라.”
박두성 선생의 따님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따님(고 박정희 여사)을 2011년에 뵈었다고요. 화평동 냉면 골목의 한 건물에서 그림을 지도하시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인천의 그림 할머니로 소개될 정도로 잘 알려진 화가였다고 해요.
따님이 그리는 박두성 선생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진 스파르타식 교육자였어. 한 글자라도 빼먹거나 잘못 읽었다간 점자 번역기 아연판을 들어 날 때리는 거야. 처음엔 의붓아버지인 줄 알았다니까.” 여덟 살 딸에게 성경을 읽게 하고 자신은 아연판에 점자를 새기고 아내에게는 성서 점역을 엮어 책자로 만드는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굿모닝인천>, “훈맹정음, 송암 박두성, 2020년 11월호)
전철을 기다리며 점자를 손으로 쓰다듬어 봅니다. 오로지 점으로 이루어진 글자, 뭐라고 써 있는 것일까요. 보이지 않는 눈 대신 손끝으로 더듬어 볼 수 있는 커다란 창이 작은 요철마다 열려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