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가두다-imprison-囚 : 유배지
연산군 유배지 가다가 유배되는 줄 알았어요. 네비게이션을 따라 공사 중인 진흙탕 길을 아무리 올라가도 없더라고요. 입구의 공사가 유배지 공사인 줄은 몰랐어요.
교동도는 강화도 최북단에 있는 섬입니다. 왕족이나 귀족이나 사대부들의 귀양지로 자주 선택되는데요. 서울에서 가까우니 감시하기 수월하고 물살이 빨라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동에 유배된 역사적 인물로는 고려의 희종, 세종의 3남인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인 임해군, 광해군, 연산군 등이 있습니다.
성종의 맏아들로 등극한 연산군은 『여지승람』을 간행하고 상평창, 진제창을 설치하는 등 명민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는 지문을 읽기 전까지는요.
이후로 그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아내는 일에만 매달리다가 외조모를 만나 폐비 윤씨가 죽으며 남긴 피 묻은 헝겊조각을 받게 됩니다.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언을 전해 듣지요. 이후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인물들을 참수하고 이미 죽은 관련자들은 부관참시 합니다. 연산군은 폐비 사건을 명분으로 전제 군주의 위상을 굳히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패륜과 음사와 황음무도에 무속을 좋아하던 그는 중조반정으로 폐위되어 위리안치 됩니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산 자의 무덤’이라고 불립니다. 가장 중죄인에게 내려진다지요. 집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고 외부인의 출입도 금지되고요. 울타리가 높고 좁아 하늘도 보이지 않고 음식을 넣어주는 작은 창문 하나만 뚫려 있는 초옥이었다고 해요. 연산군은 1506년 위리안치 된 지 두 달 후에 사망합니다. 독살설이 돌지만 역질과 화병이었다고 합니다.
교동향교 가까운 곳에 연산군이 유배된 곳 중의 하나로 추정되는 연산군 우물이 있는데요. 연산군이 마셨다는 우물 속에는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다지요. 또 교동읍성 읍내리에는 부근당(扶芹堂)이 있는데 연산군과 그의 아내 신씨의 초상으로 추정되는 탱화가 걸려 있습니다. (실록의 기록이 연산군을 왕자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한다는 글만 남고 구체적인 장소는 나오지 않아 추측만 할 뿐입니다.)
연산군은 광해군과 함께 군(君) 칭호로 전락한 임금입니다. 두 임금 모두 강화도로 유배를 갔고요.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물러난 후 강화도로 귀양을 왔다가 다시 태안과 교동을 거쳐 제주도까지 가서 이승을 하직합니다. 정조는 연산군과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은 것을 목격하고 자랐으니까요. 측근들이 아버지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고 권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탕평책을 써서 조선의 부흥에 일조합니다.
지나간 시간이 다가올 시간의 목을 조르지 않도록 잊을 것은 잊고 버릴 것은 버렸다면 좋았겠지요. 무엇이 옳고 무엇이 좋은지 알면서도 그럴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불행이 행복을 막아버리는 일이지요. 그렇게 힘들었을 삶을 살다 간 사람을 모셔두고 소원을 빌기도 합니다. 부근당이라고요. 연산군과 그의 아내의 원혼을 모셔두었습니다. 부근당 앞에서 벌이는 부군당 굿 장면을 첨부합니다. 구천을 떠돌고 있다면 이제 원한을 모두 풀고 편안해지셨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