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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글이 더 가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by 김박은경

“음식의 경우처럼 우리는 결핍이 풍족보다 즐겁다고 믿지는 않는다... 이런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재화를 통한 쾌락>에 대한 글이다. 저자는 2000년 전의 사람,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할 때 그을린 두루마리 중 하나다.


CT와 AI 기술을 통한 해독작업 중 가장 어려운 것은 검게 탄화된 파피루스에서 검은 잉크를 구분하는 작업이라고 한다. 6일 CNN에 따르면 AT기술을 이용해 돌돌 말린 두루마리 문서 속 첫 번째 텍스트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 성공했는데 가장 먼저 확인된 단어 중 하나는 ”역겨움“이라는 그리스어였다. 텍스트가 두 줄 이어지는 동안 두 번이나 등장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두 번이나 역겨웠을까.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쓰지 않으려는 욕심 같은 것은 없었을까, 아니면 너무 역겨워서 매 줄마다 역겹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글은 아니었을까. 혹시 제목이 '요즘 내가 역겨운 것들‘은 아니었을까.


2023년 두루마리 판독 경진대회인 베수비오 챌린지에서 AI기술을 이용해 글씨를 판독하는 작업에서 처음 읽어낸 그리스어 문자는 ’ 보라색‘이라는 뜻이었다. 검은 잿더미 속의 글자를 읽어내는 것은 신비하고 흥미롭다.


두루마리 속 한 글자가 지금 우리가 마음을 다해 쓰는 한 글자보다 더 귀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텐데. 나 역시 저 프로젝트에 관심이 무척 많고 열광하고 있지만 오래되고 낯설고 알 수 없는 저 글자들이 지금 들고 있는 책의 한 줄보다 더 가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스캔한 두루마리의 내부. 베수비오 챌린지, CNN 아시아경제 2025.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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