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세연년의 파수(把守) 1

-인천 부평의 조병창, 애스컴 시티, 캠프마켓

by 김박은경

오늘은 위의 세 장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셋, 이라고 했지만 알고 보니 한 장소이고요. 장소라고 했지만 많은 부분이 사라졌고 사라지는 중입니다. 저는 그 존재도 모르고 있다가 기사를 읽고 놀라고 궁금해졌습니다. 제대로 알고 싶어졌고 알아야 하기에 이렇게 씁니다. 기억의 파수꾼은 충직한 기록이니까요.


시간 순으로 “조병창(1941) → 애스컴 시티(1945) → 캠프마켓(1973)”입니다.


조병창

1941년 일본은 만주와 중국 일대로 보낼 병기 생산을 목적으로 한반도 내 유일하게 인천육군조병창을 건설합니다. 부평은 분지라는 자연조건과 경인철도 및 항만시설이 인접한 지리적 이점으로 군수기지 입지에 유리했기 때문이지요.


이곳에서 총검과 탄약, 수류탄, 자동차, 항공기 부품, 잠항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병기를 생산합니다. (매달 소총 4,000정, 총검 20,000정, 소총 탄환 700,000발, 포탄 30,000발, 군도 2,000정, 차량 200량 등을 생산) 또한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 근로보국대 등을 조직하여 노역 현장에 강제 동원하는데요.


징병과 징용을 피하고 싶었던 이들이 조병창에 모여들어 군 시설, 도로, 철도, 비행장 신사 등의 건설에 투입됩니다. 작업은 하루 12시간 2교대, 하루 두 끼의 식사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종일 일을 했습니다. 늘 배가 고팠고, 사고와 부상이 잦았고, 엄격한 규율에 감시와 구타가 심해서 탈출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1.jpg 1948년 미군이 촬영한 인천육군조병창, 출처는 인천시립박물관


2. 부평지하호

1941년 말 하와이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연합군의 반격으로 일제는 수차례 작전 방침을 변경합니다. 인천육군조병창에서는 조선 내 생산시설의 분산 및 방호를 위해 주요 민간공장 생산시설을 지하로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지요. 그 과정에서 ‘부평지하호’를 만들게 됩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패망과 동시에 관련 서류들을 모두 태워버리고요. 그 자리에 들어온 미군들은 일본군이 남긴 병기와 탄약들을 바다에 쓸어버리지요. 부평지하호가 알려질 수 없었던 까닭이 그것입니다.


2016년 조사 초기에는 새우젓토굴로 이용되는 지하호도 있었고요. 증거라 할 만한 것은 화랑농장에서 일하시던 몇몇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었고요. 2021년 12월 조사 결과 확인된 부평지하호는 총 26곳, 이중 4곳은 최근 신축공사로 소실되었습니다.

2.png 부평지하호, 출처는 Hellow!서울경인


소년들과 청년들이 저 굴을 파내려갔을 하루를 상상합니다. 제대로 된 도구도 없이 맨손으로 돌덩이를 날랐을 장면을 상상합니다. 쏟아지는 돌과 흙과 귀가 찢어질 듯 터지는 폭약 터지는 소리와 먼지가 가득했겠지요.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날들에 대한 시가 있습니다. 그들이 햇살 좋은 곳에 둘러 앉아 이 시에 귀를 기울이는 상상을 합니다.


한낮의 어둠/ 하늘 끝자락을 말아 올리던 매캐한 연기/ 어둠과 어둠이 역사 앞에 내렸지/

검은 기차에 실려 강제로 끌려온 어린 소년들/ 깊은 산속 붉은 물이 흘러내리는 동굴// 그들은 동굴 벽에 구멍을 내고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지/ 굴을 파던 소년들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왔지/ 폭발음이 들리고 구름 연기가 피어올랐지/ 동굴 입구까지 돌 먼지가 뿌옇게 밀려 나오면/ 소년들 다시 들어가 가슴에 돌덩이들을 안고 나왔지// (중략) 소년들 죽어도 죽은 줄도 모르고 계속 굴을 팠어/ 굳은 제 심장을 팠어/ 죽어도 죽지 않는 소년들/ 죽어서도 계속 굴만 파는//

-이설야, 「굴 소년들」 전문, 『굴 소년들』,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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